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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뚜아네트의 아들 루이17세 (Louis XVII)

정준극 2008. 1. 30. 11:52

마리 앙뚜아네트의 아들 루이17세

1785-1795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16세의 둘째 아들 루이 샤를르는 형 루이 조셉이 8세 때에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의 왕세자(Dauphin)로 임명 되었고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가 처형당한 후에는 루이17세로 명명되어 2년동안 명목상의 프랑스 국왕으로 지내다가 10세의 어린 나이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루이17세의 마지막 생애가 어떠했는지 살펴본다. 루이17세는 따지고 보면 마리아 테레자의 외손자로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라고 할수 있다.

 

10세의 어린나이로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학대를 받다가 세상을 떠난 루이 샤를르(루이17세)


1793년 1월, 루이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자 추방당한 왕당파들은 은밀히 모여서 루이16세의 어린 아들인 루이 샤를르(Louis Charles)를 루이17세로서 선포했다. 루이 샤를르는 당시에 감옥에 갇혀 있었다. 공화정부는 왕당파들이 왕정을 복구한다고 믿고 이같은 음모를 근본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당시 8세의 루이17세를 따로 감옥에 가두기로 결정했다. 루이16세가 처형된지 6개월이 지난 7월 초, 일단의 혁명위원회 위원들이 왕실가족들이 갇혀 있는 템플(Temple)감옥을 찾아왔다. 이들은 루이17세를 마리 앙뚜아네트로부터 떼어 놓아 따로 데려가려고 했다. 겁에 질린 루이는 울면서 곧장 엄마 품으로 뛰어 들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아들을 껴안으며 막아섰다. 위원들은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만일 아들을 내놓지 않으면 당장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당당하게 맞섰다. 그러기를 두어시간이나 지났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이제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루이는 끌려가면서 엄마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울며불며 소리를 질렀다. 마리 앙뚜아네트도 제발 아들만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루이는 독방에 감금되었다. 바로 아래층에는 루이의 누이인 마리아 테레스가 갇혀 있었다. 공화정부는 루이를 루이 캬페(Louis Capet)라고 불렀으며 마리 앙뚜아네트는 ‘위도우 캬페’(과부 캬페)라고 불렀다. 캬페는 부르봉(Bourbon) 왕조를 일으킨 위고 캬페(Hugo Capet)의 성(姓)이다. 루이와 마리 앙뚜아네트를 캬페라고 부른 것은 일종의 모욕이었다. 왜냐하면 왕실 사람들은 이름만 부르며 성은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이17세를 루이 캬페라고 부른 것은 선조들을 스스로 모욕토록 하는 조치였다.

 

 부르봉 왕조를 창건한 위고 캬페(Hugo Capet)


공화정부는 어린 루이를 왕족인 아닌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 재교육시키기로 했다. 공공안전위원회는 안투안 시몬(Antoine Simon)이라는 술주정꾼 신발장이를 감옥으로 데려와 루이를 그의 조수로 일하도록 했다. 시몬은 아주 못된 사람이었다. 걸핏하면 어린 루이를 때리고 별별 방법으로 괴롭혔다. 더구나 시몬은 루이에게 자꾸 술을 마시게 했다. 그 때문에 루이는 어린 나이에 이미 술에 중독이 되어 있었다.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아마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을 잊기 위해서였던것 같았다. 어린 루이는 매일 혁명의 노래인 ‘라 마르세이유’를 불러야 했고 공화주의자들이 상징적으로 입는 특별한 옷과 모자를 써야 했다. 술주정꾼 겸 구두장이인 시몬은 어린 루이에게 부모를 욕하고 저주토록 가르쳤으며 귀족들을 증오토록 교육시켰다. 그리고 하나님을 저주토록 가르쳤다. 심지어 시몬은 어린 루이를 창녀들과 함께 자도록 했다. 결국 루이는 성병에 걸렸다. 간수들은 계속하여 루이에게 단두대 얘기를 해주며 ‘너도 단두대에 올라설 날이 멀지 않았다’고 위협했다. 그럴 때마다 루이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간수들은 루이에게 ‘네 엄마와 아빠가 실은 너를 좋아하지 않았다. 널 아들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아직 살아있지만 너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어!’라고 말해주었다. 실은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가 모두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후였다. 루이는 부모의 비참한 죽음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의 마리 앙뚜아네트(왼쪽 마리아 테레스, 가운데 아기가 루이-샤를르, 오른쪽이 루이-조셉)

 

술주정꾼 시몬은 1794년 갑자기 감옥을 떠났다. 그후 루이는 6개월 동안 아무도 접근할수 없는 비밀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결국 루이는 1795년 6월 8일, 캄캄한 감옥에서 폐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루이의 몸은 각종 종양과 옴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루이의 시신을 검사한 검시관 필립-장 플르탕(Philippe-Jean Pelletan)은 그가 영양실조로 뼈만 남아 있을 정도로 앙상하게 여위였다고 기록했다. 검시관은 루이의 몸에 채찍으로 맞은 상처자국이 많이 있어서 놀랬다고 말했다. 가슴과 등, 다리와 팔이 상처 투성이었다고 한다. 검시관은 루이에 대하여 동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죽은 루이를 해부하면서 왕족의 심장은 따로 보관한다는 관례를 생각하고 심장을 떼어내어 작은 항아리에 넣어 몰래 가지고 나왔다. 루이의 시신은 상트 마르게리트(Ste Marguerite) 공동묘지에 아무런 표지도 없이 매장되었다. 이것이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아들인 루이 17세의 처절한 삶이었다.  

 

루이17세를 매장한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하는 상트 마르게리트 섬. 이 섬은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 '철가면'으로 유명하다.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면, 1973년 1월 21일, 루이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다음날, 왕당파들은 어린 루이 를 프랑스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1주일후 프로방스(Provence)백작이 감옥에 있는 루이17세를 대신하여 섭정을 한다고 선언했다. 누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섭정이라고 자청하고 나섰으니 우습기는 했다. 그로부터 왕당파들은 루이17세와 왕실 가족들을 템플 감옥에서 탈출시키려는 음모를 진행시켰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루이는 7월 3일에 어머니인 마리 앙뚜아네트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격리수용되었다. 그리고 주정꾼 신발장이인 안투안 시몬의 손에 넘겨졌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루이는 감옥에서 시몬과 그의 마누라로부터 말할수 없는 잔혹행위를 당했다고 하지만 기록이 없어서 입증되지는 않았다.     

          

루이17세가 갇혀 있던 템플 감옥. 루이17세의 누이인 마리아 테레스도 함께 감금되어 있었다.


그런데 루이의 죽음에 대하여 심상치 않은 소문이 나돌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감옥에서 죽은 아이는 가짜이며 진짜 루이는 교묘하게 탈출하여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 소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우선 루이를 교화시킨다는 미명아래 가족과 함께 감옥에 들어와 살면서 루이에게 온갖 학대를 일삼았던 주정꾼 시몬이 별다른 이유 없이 갑자기 감옥을 떠난 점이다. 시몬은 감옥을 떠나면서 남긴 보고서에 루이가 아주 정상적인 건강상태라고 적었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 그런 보고서를 쓴 것처럼 생각된다. 시몬이 떠난후 루이는 빛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감옥으로 옮겨졌다. 마치 맹수를 가두는 우리처럼 쇠창살로 막은 감옥이었다. 루이는 이곳에 갇혀 있으면서 실어증에 걸려 나중에는 거의 벙어리처럼 되었다. 간혹 심문을 위해 사람들이 찾아 왔지만 루이가 말을 하지 않아(또는 말을 못해) 번번이 허탕치고 돌아가야 했다. 루이가 죽은후 검시과정도 규칙에 따르지 않은 허술한 것이어서 의문을 증폭시키고 있다. 본인확인을 위한 절차를 위해 루이의 누이 마리아 테레스만을 데려와 어두운 감방에서 확인토록 한 것이다. 마리아 테레스는 나중에 석방되어 비엔나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석방되기 전까지 감옥에 있었고 동생 루이의 죽음을 직접 확인까지 했다는 마리아 테레스는 감옥에 있는 중에 전혀 슬퍼하는 모습이 아니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루이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았다는 해석이다.

 

템플 감옥에서의 가족 이별 장면(루이16세가 단두대로 끌려가기 전 마지막 작별. 울고불고 하는 아이들)


얼마후에는 루이17세를 동정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를 감옥에서 빼어내어 유괴해 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마치 ‘잃어버린 왕국’에 대한 전설처럼 ‘잃어버린 왕세자’(Lost Dauphin)라는 전설은 그렇게 하여 생겨났다. 1814년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부르봉 왕조가 복권되자 전유럽에서 수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기가 루이17세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루이17세의 아들이라며 나섰다. 그럴듯한 후보자로서는 자연주의자인 제임스 오두본(James Audubon), 미국 위스콘신의 선교사로서 모호크족의 후손인 엘리아저 윌리엄스(Eleazer Williams), 독일의 시계제조자인 카를 빌헬름 나운도르프(Karl Wilhelm Naundorff)등을 들수 있다. 그중에서 나운도르프가 가장 그럴듯했다. 나운도르프에 의하면 공공안전위원회의 한 사람인 바라(Barras)라는 사람이 훗날 나폴레옹의 왕비가 되는 조세핀(Josephine)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벌써 얼마전부터 루이17세를 유괴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바라라는 사람은 만일 조세핀이 루이17세를 볼모로 붙잡고 있으면 나중에 혹시 부르봉 왕조가 복권하더라도 그를 이용할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바라는 루이와 비슷하게 생긴 목각 인형을 만들어 템플 감옥 4층에 갇혀있는 루이와 바꾸어 놓기로 했다. 그러나 일당중의 한 사람인 로랑(Laurent)은 만일 목각인형으로 바꾸어 놓으면 너무 발각되기 쉬우므로 아예 벙어리 소년으로 대체하면 사람들을 속일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로랑 등은 미리 루이와 비슷한 벙어리 소년을 템플 감옥에 가두어 놓았다는 것이다. 로랑은 미리 손을 써서 벙어리 소년의 사망확인서를 위조하여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벙어리 소년이 갑자기 병에 걸려 죽은 것처럼 만든후 루이의 방에 넣어두고 대신 루이를 관에 넣어 공동묘지에 매장한다고 얘기하고 밖으로 데려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루이의 지지세력들이 공동묘지로 향하는 관을 중간에서 습격하여 루이를 빼 돌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의 얘기에 따르면 술주정꾼 시몬의 부인이 루이를 큰 빨래 바구니에 넣어 몰래 밖으로 데려나왔다는 것이다. 시몬은 루이의 보호자라는 명목아래 루이를 무척 괴롭히던 구두장이였다. 그러한 시몬의 부인이 루이를 크게 동정하여 감옥에서 빼냈다는 얘기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기 때문에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더구나 벙어리 소년을 공연히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욱 믿을 만한 얘기였다. 또 다른 얘기는 두가지 계략을 동시에 진행시키되 벙어리 소년의 경우는 방패막이이고 실제로는 시몬의 부인을 매수하여 그를 통해 데려나오는 것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왕비가 된 조세핀.


리슈몽(Richemont)이란 사람이 있었다. 원래 이름은 앙리 에베르(Henri Hebert)라고 했다. 리슈몽은 루이17세가 템플 감옥에서 죽은지 20여년이 지난 때에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사기죄로 체포되어 7년이나 감옥생활을 했다. 감옥을 나온 리슈몽은 1828년 파리에 와서 자기가 루이 샤를르라고 주장하고 재산과 타이틀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5년후 리슈몽은 다시 체포되었다. 무슨 죄목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선동죄였을 것이다. 리슈몽은 12년 형을 받았다. 그는 얼마후 탈옥하여 종적을 감추었다가 7년후에 다시 프랑스에 나타났다. 그는 프랑스에서 13년을 살다가 1853년 8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비에는 ‘프랑스의 루이 샤를르’(Louis Charles de France)라고 새겨 있었다. 나중에 정부가 그 묘비를 철거했기 때문에 지금은 찾아볼수 없지만 당시의 매장기록은 지금도 남아있다. 왜 기어코 자기를 루이 샤를르하고 했을까?

 

남부 네덜란드의 델프트의 모습 (그림)


다시 나운도르프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1810년 느닷없이 베를린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기 이름이 카를 빌헬름 나운도르프라며 관련 서류를 보였다. 그는 종교적인 박해(구체적으로는 유태인에 대한 박해)를 피해 베를린으로 왔다고 설명했다. 원래 그 사람의 이름인 나운도르프라는 것은 프러시아령 폴란드에 있는 작은 마을로서 유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가 유태계이며 유태교에 대한 박해를 피해 베를린으로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베를린에서 슈판다우(Spandau)에 정착했고 몇 년후에는 요한나 아이너트(Johanna Einert)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슈판다우는 베를린에서도 유태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며 나치시대에는 유태인 강제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그는 1825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죄로 체포되어 3년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고 한다. 그후 파리로 와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본인으로 말씀드리자면 바로 감옥의 죽음에서 천우신조로 살아남은 루이 왕세자올시다!’라고 선전하였다. 루이16세를 모셨던 사람들로서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생김으로 보아 왕세자(루이17세)가 분명한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루이17세에게 속한 재산을 찾기 위해 앙굴렘(Angouleme)공작부인(루이17세의 누이인 마리아 테레스)을 상대로 소송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당국이 그를 사기꾼으로 몰아 추방하는 바람에 멀리 네덜란드의 델프트(Delft)에 가서 여생을 보내다가 1845년 8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비에는 ‘루이17세,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 루이 샤를르, 노르망디 공작’(Louis XVII., roi de France et de Navarre (Louis Charles, duc de Normandie)이라고 적혀 있다. 만일 나운도르프가 루이 샤를르 왕세자 겸 루이17세라고 한다면 60세를 살다가 세상을 떠난 셈이다. 그런데 참으로 수상하게도 네덜란드 당국이 발행한 사망확인서에도 ‘부르봉의 루이 샤를르, 노르망디 공작, 루이17세’(Charles Louis de Bourbon, duc de Normandie (Louis XVII)이라고 적혀있다. 네덜란드 당국은 나운도르프의 아들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부르봉가문의 명칭을 사용할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렇게 하라고 승인하였다. 이어서 나운도르프의 아들을 루이17세의 후계자로서 공민권도 인정해 주었다. 네덜랜드 당국이 나운도르프라는 사람의 신원을 보장했기 때문에 나운도르프에 대한 이야기는 수많은 루이17세 후보자 이야기 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프러시아령 폴란드의 유태인 출신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부르봉 가문의 사람이 어떻게 유태인이 될수 있는가? 지금도 프랑스에는 나운도르프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고 한다. 다만, 나운도르프 이야기 중에서 한가지 궁금한 것은 그가 1810년대에 베를린에 나타났을 때 왜 유태인 행세를 했으며 왜 프랑스의 왕족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루이17세라고 주장한 카를 빌헬름 나운도르프. 생긴 것도 ... 


세 번째 주장자는 엘리아저 윌리엄스(Eleazer Williams)이다. 템플 감옥에서 탈출했다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어떻게 감옥에서 탈출하였는지 얘기해 달라고 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어릴 때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의사들은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커서 기억상실증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얘기를 추측해보면, 감옥에서 탈출한 루이17세가 그를 탈출시킨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갔으며 서부의 뉴욕주에 도착하여 도시에서 살지 못하고 산속 인디언 부족들과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그 길만이 프랑스에서 온 도망자들이 당국의 눈길을 피할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그는 엘리아저 윌리엄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뉴욕주에서 살 때에 별로 달리 할 일도 없어서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실각한후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조가 다시 복권되었다. 오를레앙 공작의 아들인 루이-필립(Louis-Philippe: 1773-1850)이 국왕이 되었다. 그의 아들 드 주앙비유(de Joinville: 1818-1960)는 유명한 해군 제독으로서 미국을 방문한 일이 있다. 이때 우연히 엘리아저 윌리엄스를 만났다. 드 주앙비유는 엘리아저 윌리엄스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엘리아저 윌리엄스가 아무래도 루이17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 주앙비유는 아버지 루이-필립의 왕권을 위해서 루이17세인 엘리아저 윌리엄스로부터 왕위를 양위한다는 문서를 받고 싶었다. 그렇게 해준다면 프랑스에 있는 루이17세의 재산을 되돌려 받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실상 프랑스에 있는 루이17세의 재산은 새로 국왕이 된 루이-필립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아저 윌리엄스는 그같은 제안을 거절했다. 그후 엘리아저 윌리엄스가 루이17세라는 주장은 신빙성을 잃어 없던 일처럼 되었다.

 

그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루이17세라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아무도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만일 루이 샤를르(루이17세)가 감옥에서 탈출해 나왔다면 너무 병약하여 얼마 가지 못해서 죽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지 않다면 남들이 볼수 없는 어두운 그늘 아래에 숨어서 숨을 죽이며 살았을 것이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그의 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악한들을 프랑스 왕세자와 연관된 사람들로 그렸다. 그러고 보면 루이17세가 미국으로 건너 왔다는 설도 흥미를 끈다.

 


드 주앙비유 왕자


[루이17세의 심장]

오리지널 스토리에 따르면 루이17세가 감옥에서 죽은후 플르탕(Pelletan)이라는 의사가 시신을 해부했으며 그때 심장을 따로 떼내어 단지에 담아 보관했다고 되어 있다. 프랑스 왕실의 관례를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후 루이17세의 심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다는 것이다. 처음에 플르탕은 그 심장을 루이17세의 사촌인 루이18세에게 전해주려 했다. 그러나 루이18세는 그 심장이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며 믿지 않았다고 한다. 플르탕이 루이17세의 심장을 루이17세의 누이로서 앙굴렘(Angouleme)공작부인인 마리아 테레스(마리 앙뚜아네트의 딸)에게 전달해 주려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 이후의 전설은 이렇게 진행된다. 플르탕의 제자가 심장을 훔쳐 가지고 있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자기 부인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심장을 플르탕에게 돌려주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인 부인은 심장을 플르탕에게 되돌려 주는 대신 파리의 대주교에게 전달했다. 심장은 1830년 혁명 때까지 파리교구에 보관되었다. 그후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스페인에 보내 상당기간 보관토록 했다. 극히 최근인 1975년, 루이17세의 심장은 수정 항아리에 담아 파리 교외에 있는 생 드니(St Denis) 성당의 부르봉 왕조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생 드니 성당에는 루이17세의 부모인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결국 루이17세는 부모의 곁으로 간 것이다.

 

 생 드니 교회에 있는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의 묘비 및 기념상


1990년대에 당시 정부의 역사문제 담당자인 필립 들로름(Philippe Delorme)은 루이17세의 심장에 대한 DNA 검사를 주선했다. 독일 뮌스터대학교의 에른스트 브린크만(Ernst Brinkmann)교수와 벨지에의 유전한 교수인 장-자크 카씨망(Jean-Jacques Cassiman)이 각각 별도로 유전자감식 검사를 했다. 그리하여 2000년에 루이17세의 심장의 DNA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칼에 있는 DNA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 후에 루이17세의 심장은 2004년 6월 8일, 생 드니 성당에 최종 안치되었다. 그러나 그 DNA 검사는 다만 모계만을 추적할수 있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부계에 대하여는 확실한 정보를 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 심장이 마리 앙뚜아네트의 첫째 아들인 루이-조셉의 것이 아니겠느냐고 해도 확실히 아니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다만, 당시 왕실의 관례에 따라 왕족의 심장을 떼어 내어 따로 보관할 때에는 우선 방부처리부터 했는데 루이17세의 심장이라고 하는 것은 방부처리를 하지 않고 알콜에 담아 놓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플르탕이 임시로 보관했었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가진다. 

 

루이17세의 누이인 마리아 테레스 샬로테(앙굴렘 공작부인).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