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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뚜아네트의 딸 마리-테레스 샬로트(Marie-Therese Charlotte)

정준극 2008. 2. 3. 06:31

마리 앙뚜아네트의 딸 마리-테레스 샬로트 

20분간의 왕비

 

어린시절의 마리-테레스 공주


[마리아 테레자의 외손녀]

마리-테레스-샬로트(Marie-Therese-Charlotte)는 마리 앙뚜아네트가 낳은 네 자녀중에서 가장 오래동안 생존했던 딸이었다. 마리-테레스(영어식 발음은 메리 테레이스)는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의 딸이기도 하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란시스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외손녀이며 또한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셉(Joseph) 2세와 레오폴드(Leopold) 2세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리-테레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라는 데에 이의가 있을수 없다. 이름만 해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던가? 그보다도 마리-테레스는 격동하는 시대에 살면서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을 모두 지켜본 인물이다. 마리-테레스는 1778년 12월 19일 파리에서 태어나 1851년 10월 19일, 향년 73세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리-테레스는 샤를르10세(Charles X)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과 결혼하였으며 당굴렝(d'Angouleme) 공작부인이란 칭호를 가졌다. 마리-테레스는 시아버지 샤를르10세가 퇴위서에 서명하고 이어 남편도 퇴위서에 서명하는 20분 동안만 프랑스의 왕비였다.


[행복한 어린 시절]

마리-테레스는 루이 오거스트 왕세자(나중에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자녀이다. 마리-테레스는 루이 오거스트 왕세자와 마리 앙뚜아네트가 결혼 8년만에 얻은 첫 자녀이다. 프랑스 왕실은 루이 왕세자와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뚜아네트가 1770년에 결혼하자 다음 왕위를 이어갈 왕자(도팽)의 탄생을 고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결혼할 때에 신랑 루이는 16세였고 신부 마리 앙뚜아네트는 15세였으니 이들 청소년들로부터 자녀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그후 시간이 지났지만 남편 루이 오거스트는 사냥에만 정신을 쏟았고 날씨가 나빠서 사냥을 나가지 못하게 되면 방에 틀어박혀 자물쇠와 열쇠를 만드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그런대로 손재주가 좋았던 루이 오거스트의 유일한 취미는 열쇠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신혼이지만 그토록 고대하던 자녀는 태어나지 않았다. 속상한 마리 앙뚜아네트! 더 속상한 친정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그로부터 8년후인 1778년, 드디어 첫 자녀가 탄생했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23세 때였다. 그 8년동안 주위에서는 마리 앙뚜아네트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모두들 노심초사했다. 특이 친정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마음은 안절부절이었다. 그러다가 임신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베르사이유는 물론 비엔나의 쇤브룬은 축제 분위기였다. 모두들 내심 아들을 열심히 소망했다. 옛날에는 초음파 검사라는 것이 없어서 복중 아기의 성별을 알수 없었다. 아무튼 태어난 아기는 딸이었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하지만 베르사이유로서는 섭섭할 뿐이었다. 그러나 젊은 엄마인 마리 앙뚜아네트는 너무나 기뻐서 어린 딸을 바라보며 ‘아이구, 내 강아지’라며 너무나 좋아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린 마리-테레스를 팔에 안으면서 ‘넌 사람들이 바라던 아이가 아니었어! 그래도 우린 널 너무나 사랑한단다. 아들이면 국가에 속하겠지만 넌 딸이기 때문에 나의 것이야! 내가 행복할 때에는 그 행복을 네게 나누어 줄거야! 하지만 내가 슬플 때엔 네가 그 슬픔을 씻어 주아야 해!’라고 말했다. 아기의 이름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어머니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비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마리-테레스는 프랑스 국왕의 첫 딸로서 ‘마담 로얄’(Madame Royale)이라고 불렸다.

 

[아름다운 폴리냑 공작부인]

마담 로얄인 마리-테레스는 어릴 때부터 폴리냑(Polignac)공작부인인 가브리엘르 드 폴라스트론(Gabrielle de Polastron)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랐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아름답고 재능있는 폴리냑 공작부인을 마리-테레스 공주를 보살피는 팀(Household)의 팀장(Governess)으로 임명하였다. 폴리냑 공작부인은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베르사이유 궁정의 가수로 활동했었다. 루이16세도 폴리냑 공작부인을 무척 좋아하고 신임하였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연인관계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친밀한 친구로서 지냈다. 루이16세는 딸 마리-테레스를 너무나 애지중지했다. 응석이란 응석은 모두 받아주었으며 해 달라는 것은 다 해주었다. 마리-테레스를 무척 사랑하는 마리 앙뚜아네트도 그런 루이16세에게 ‘여보, 너무 옹야옹야 하면 안돼요. 애를 망쳐 놓는 일이예요’라며 몇 번이나 옐로우 카드를 내보였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딸 마리-테레스를 건방지고 못된 여자로 기르지는 않기로 결심했다. 예를 들면 남편 루이16세의 결혼하지 않은 숙모들 처럼! 마리 앙뚜아네트는 가끔 노동자-농민의 아이들을 궁전으로 불러 마리-테레스와 함께 놀도록 하고 밥도 같이 먹도록 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과도 어울리도록 한 것이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마리-테레스에게 가지고 있는 장난감들을 가난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라고 권면했다. 착한 마리 앙뚜아네트! 

 

폴리냑 공작부인

 

[잘못된 이미지]

일반적으로 마리 앙뚜아네트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물질이면 제일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 자녀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받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가르쳤다. 1784년 정월 초하루, 마리 앙뚜아네트는 마리-테레스가 놀고 있는 유아원 방으로 왔다. 마리-테레스에게 새해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선물은 평범한 작은 것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마리-테레스에게 ‘얘야, 실은 우리 예쁜 강아지에게 줄 선물을 잔뜩 사가지고 오는데 마침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만났지 뭐니! 아주 여러명이나 되었어! 먹을 빵도 없고, 입을 옷도 없고, 추운데 불을 지필 나무도 없는 사람들이었어! 그 사람들의 아이들을 보니 너무 불쌍하더라! 그래서 너에게 줄 장난감을 다 나누어주었단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돈도 다 나누어주었어! 그래서 네 선물을 다시 살 돈이 없었지. 자, 올해에는 이 장난감 하나면 됐지? 어이구, 우리 착한 강아지!’라고 말했다. 마리-테레스에게는 동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 살 어린 루이-조셉(b. 1781), 일곱 살 어린 루이-샤를르(b. 1785), 그리고 여덟살 어린 여동생 소피=엘렌-베아트릭스(b. 1786)이다. 모두 함께 이른바 베르사이유 병설 유아원에서 마담 폴리냑의 사랑스런 보살핌 속에 지냈다. 여동생 소피는 태어난 이듬해에 죽었으며 오빠 루이-조셉은 7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작은 아들 루이-샤를르가 다음 왕위를 계승할 왕세자(Dauphin)가 되었다.


[혁명의 와중에서]

베르사이유에서 마리-테레스는 무럭무럭 자라났지만 베르사이유 밖에서는 민중혁명의 불길이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결국 갱제가 문제였다. 국가재정은 적자(赤字)에 허덕이게 되었고 일반국민들의 생활은 도탄(塗炭)에 빠지게 되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전제주의를 반대하는 감정이 폭발직전에 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경제적 난관과 사회적 불안은 1789년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프랑스 정부는 미국독립전쟁을 지원하느라고 수많은 자금을 퍼부었다. 정부 재정은 파산직전에 있었다. 백성들은 몇 년째 가뭄이 계속되어 기근에 허덕여야 했다. 사태가 이쯤되면 누군가 선동가가 등장하기 마련이며 유비통신이 만발하기 마련이다. 선동가들은 굶주린 백성들이 불만을 터뜨릴 대상을 찾아주면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리 앙뚜아네트가 타깃이 되었다. 어찌 보면 전혀 우연하게 잘못 선택한 타깃이었다. 어쨌든 마리 앙뚜아네트는 돈문제와 섹스문제 양면에서 진실이 왜곡된 비난을 받아야 했다. 마침내 군주제가 몰락하자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공격은 참으로 도가 지나칠 정도로 극심했다. 새롭게 자유를 누리게 된 백성들은 언론의 자유도 함께 누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저속한 신문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들은 순전히 언론의 자유라는 미명아래 있는 소리 없는 소리를 아무런 제재 없이 뱉어 내놓았다. 저속한 3류 신문들은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하여 온갖 비방비난과 중상모략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마치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백성들의 증오심을 만들어 내기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연일 실리는 깜도 안되는 ‘카더라’ 기사는 백성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마침 그러한 때에 마리 앙뚜아네트의 막내 딸인 소피-엘렌-베아트릭스가 생후 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1년 후에는 왕세자인 루이-조셉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의 가정은 내우외환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한 시점에서 프랑스는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1789년을 맞이했다.

 

[바스티유의 함락]

1789년 7월 4일, 성난 군중들은 바스티유를 함락했다. 사정이 급박해졌다. 왕실 사람들의 안위가 제일 걱정이었다. 일부 왕실 가족들은 프랑스를 빠져나갔다. 루이16세 정부의 수상이던 브르토이(Breteuil)는 독일로 피난해야 했다. 루이16세의 동생이며 마리-테레스의 작은 삼촌인 다르투아(d'Artois)백작 샤를르는 ‘너는 살아야 한다’는 루이16세의 명령으로 외국으로 빠져 나갔다. 마리-테레스를 보살피는 팀장인 폴리냑 공작부인은 마리 앙뚜아네트와 마찬가지로 군중들의 공격 타깃이었다. 폴리냑 공작부인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간청에 따라 스위스로 도피하였다. 폴리냑 공작부인의 후임은 드 투르젤(de Tourzel) 후작부인이었다.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그의 딸인 폴랭(Pauline)은 마리-테레스와 죽을 때까지 친구로 지냈다.


그해 10월, 폭도와 같은 군중들은 베르사이유를 포위하고 ‘왕과 왕비를 잡아내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왕실 가족들은 베르사이유를 포기하고 파리 시내에 있는 튈러리(Tuileries)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베르사이유에비해서 모든 것이 훨씬 불편한 생활이었다. 게다가 자유스럽지 못했다. 사실상 혁명당국에 의해 연금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마리-테레스는 어느덧 10대의 어엿한 소녀가 되었다. 마리-테레스는 곤경에 처한 불쌍한 어머니 마리 앙뚜아네트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다. 위로도 해주고 싶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마리-테레스는 비록 따듯한 마음과 친절한 감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성적이고 조용해서 엄마 마리 앙뚜아네트를 사랑하는 자기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지냈다.   


[템플 감옥의 고아]

날이 지날수록 정치적 상황에 악화일로를 달리자 국왕과 왕비는 이제 자기들의 생명조차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가족들을 데리고 파리를 떠나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튈러리 궁전을 탈출하는 계획이 마련되었다. 그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당연히 사람들의 눈에 띠게 마련이므로 일부 가족들은 시종의 행색을 하도록 했다. 국왕과 왕비는 목적지를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동북쪽의 몽메디(Montmedy) 요새로 잡았다. 몽메디 요새는 왕당파들의 거점이었다. 국왕과 왕비, 그리고 가족들은 극적으로 튈러리를 떠나 무사히 파리를 빠져 나왔다. 그러나 몽메디 요새로 가는 길목인 바렌느(Varennes)에서 혁명주의자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루이16세가 배가 너무 고파서 자꾸 ‘밥먹고 가자!’라고 말한 것이 시종들의 비위를 건드렸고 그 중 한사람은 베르사이유에서 루이16세로부터 모욕을 당한 일을 생각하고  혁명당국에 루이16세의 탈출을 밀고했던 것이다. 국왕과 왕비 일행은 파리로 되돌아왔다.


1792년 가을, 군주제가 폐지되자 당국은 이제 더 이상 국왕과 왕비가 아니라고 발표하고  가족들을 모두 템플 요새에 수감하였다. 그리고 1793년 1월, 마리-테레스의 아버지인 루이16세는 단두대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아버지와 딸은 언제나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이다. 이별을 슬픈 것이었다. 마리-테레스는 아버지 루이16세의 비참한 죽음으로 험난한 파도 속에 홀로 남아 있는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얼마후에는 왕실 가족중 유일한 남자인 어린 루이-샤를르를 따로 떼어내어 다른 감방에 넣었다. 템플 감옥에 남아 있는 사람들중 여인으로서는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테레스, 그리고 루이16세의 여동생으로 마리 앙뚜아네트와 매우 가깝게 지내던 마담 엘리사베스가 있었다. 세사람의 여인중 마리-테레스만이 공포정치에서 살아남았다. 1793년 10월, 마리 앙뚜아네트는 가족과 떨어져 콩시에르제리(Conciergerie)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그곳에서 반역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뒤집어씌운 죄목 중에는 아들 루이-샤를르와 부정한 성적관계, 즉 근친상간을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아무런 근거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마리 앙뚜아네트에게는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유죄가 내려져 있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형집행인은 전에 왕실 사형집행인이었던 상송(Sanson)이었다. 이듬해인 1794년 5월, 마리-테레스와 같은 감방에서 지내던 숙모 마담 엘리사베스가 한 밤중에 사람들에게 끌려 나가 다음날 새벽 처형되었다. 마리-테레스는 어머니가 죽은 소식도 듣지 못했으며 숙모인 엘리사베스가 죽은 소식도 듣지 못했다. 마리-테레스가 알고 있던 사실은 아버지 루이16세가 죽었다는 것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마리-테레스에게 무슨 일이 있어 났는지 얘기해 주지 않았다. 마리-테레스가 감금되어 있던 방의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마치 손톱으로 긁어 쓴 듯 새겨져 있다. 괄호안은 원래의 글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 마리-테레스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머니 소식을 듣지 못합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도 없습니다. 수천번이나 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Marie-Therese is the most unhappy creature in the world. She can obtain no news of her mother; nor be reunited to her, though she has asked it a thousand times)

- 제발 살아 계셔요, 사랑하는 어머니! 하지만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니! (Live, my good mother! whom I love well, but of whom I can hear no tidings)

- 아, 아버지! 하늘나라에서 저를 굽어 살펴 주세요. 이 딸의 생활은 너무나 참담하답니다. (O my father! watch over me from heaven above, life was so cruel to her.)

- 오 하나님! 우리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O my God! forgive those who have made my family die)

  

어느날 과격 공화파의 지도자인 로베스피에르 막시밀리안이 감옥의 마리-테레스를 찾아 왔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추측이다. 혁명정부는 왕실 가족들에게 절대로 관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포정치 기간중에 단 한번, 외부 사람이 찾아온 것은 마리-테레스가 프랑스를 떠나도 좋다는 명령서를 전달하러 온 사람뿐이었다. 1795년 당국은 마리-테레스를 비엔나에 있는 프란시스2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보내 감독토록했다. 마리-테레스로서는 어머니의 고향이며 사촌오빠 프란시스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있는 비엔나로 갈수 있었다.  

 

[사촌인 루이-안투안과 결혼]

비엔나에 정착한 마리-테레스는 얼마후 쿠르란드(Courland)의 미타우(Mitau)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는 삼촌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프로방스(Provence)백작 루이-스타니슬라스(Louis-Stanislaus)가 러시아 황제 파울1세(Paul I)의 빈객(賓客)으로 머물고 있었다. 나중에 루이17세가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자 루이-스타니슬라스는 스스로 프랑스의 국왕 루이18세(Louis XVIII)라고 선언했다. 루이-스타리슬라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남동생인 다르투아(d'Artois)백작이 있을 뿐이었다. 루이18세라고 자칭한 루이-스타니슬라스는 종사를 든든히 하고 싶었다. 그는 마리-테레스에게 남동생 다르투아백작의 아들인 루이-안투안(Louis-Antoin)과 결혼하기를 종용했다. 마리-테레스와 루이-안투안은 서로 사촌간이었다. 계보로 보면 루이-안투안이 다르투아백작 다음으로 왕위 계승자 서열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마리-테레스는 삼촌의 제안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들였다. 친척들과 함께 살수 있다는 안도감에서였다. 루이-안투안에 대하여는 ‘마리아 테레자의 막내딸 마리 앙뚜아네트 편’에서도 언급하였으므로 참고 바랍니다.

  

루이-안투안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수줍음이 많고 말할 때 더듬는 일이 많은 청년이었다. 일설에는 임포텐트(성기능장애자)라는 얘기도 있었다. 그래서 루이-안투안의 아버지 다르투아백작은 마리-테레스와 자기 아들과의 결혼을 반대했었다. 아무튼 1799년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그후 왕실 가족들은 영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버킹햄셔어(Buckinghamshire)에 정착하였다. 1814년 나폴레옹1세가 몰락하여 퇴위하자 마리-테레스의 오랜 추방생활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군주제가 부활되었다. 루이18세가 왕위에 올랐다.

 

[생 드니 성당의 마리 앙뚜아네트]

루이18세는 자유주의와 극렬왕당파의 중도노선을 걷기 위해 무한 노력을 하였다. 극렬왕당파는 동생인 다루트아(d'Artois)백작이 주도하는 세력이었다. 루이18세가 해결해야할 또 하나의 문제는 루이17세라고 주장하며 나서는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루이17세가 템플 감옥에서 죽지 않고 도피하여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의외로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어 혼을 내주어야 했다. 잘못하면 왕위 계승 서열이 달라질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도 그들중 누가 진짜로 루이17세라고 한다면 재산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한편, 마리-테레스는 루이17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오면 나올수록 옛날 일을 생각나서 비탄에 젖어 있기가 일수였다. 결국 슬하에 자녀조차 없는 마리-테레스는 점점 우울증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마리-테레스는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비참하게 죽인 혁명주의자들이 미웠다. 미울뿐 아니라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여 불신했다. 파리에 돌아온 마리-테레스는 동생인 루이17세가 죽었다고 하는 감방을 찾아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아버지, 어머니, 동생 루이17세, 숙모 엘리사베스가 죽임을 당하고 아무렇게나 묻혔다는 곳을 찾아가 유해를 확인하는 일을 주선했다. 비참하게 죽은 사람들의 유해는 관례에 따라 생 드니 성당의 왕실납골당에 다시 안치되었다. 특히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의 유해는 훌륭한 기념상과 함께 정중히 안치되었다. 생 드니 성당에 있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기념상에서 가슴 부분은 사람들이 너무 만져 반질반질해졌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가슴을 만지면 왕비처럼 부귀를 누릴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생드니 성당에 있는 마리 앙뚜아네트. 가슴이 반질반질해졌다.


1815년 3월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돌아왔다. 나폴레옹은 지지자들을 모으고 군대를 일으켰다. 루이18세는 프랑스를 떠나 도피하였으나 당시 보르도(Bordeaux)에 있던 마리-테레스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보르도에서 마리-테레스는 여러 지방의 군대를 규합하여 나폴레옹의 군대와 싸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보르도의 군대는 마리-테레스를 보호하는 일은 하겠지만 나폴레옹의 군대와는 전투를 할 생각이 없었다. 무고한 사람들만 희생될것 같아서였다. 얼마후 나폴레옹의 군대가 마리-테레스를 체포하기 위해 보르도로 진군하여 왔다. 결국 마리-테레스는 자기로 인하여 보르도가 아무 의미 없이 파괴되고 유린되는 것을 염려하여 외국으로 도피키로 결정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왕실 사람들 중에서 마리-테레스만이 유일한 남자’라고 말했다.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쟁에서 패배하자 잠시동안이지만 부르봉 왕조가 다시 일어섰다.


[20분간의 왕비]

러시아에 망명중이던 프로방스공작이 루이18세로서 당당하게 파리로 돌아왔다. 마리-테레스도 남편 루이-안투안, 시아버지 겸 삼촌인 샤를르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왔다. 1824년 9월 16일, 루이18세(프로방스공작)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생 샤를르가 샤를르10세로서 국왕이 되었다. 마리-테레스의 남편인 루이-안투안은 자동적으로 다음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가 되었다. 마리-테레스는 왕세자비가 되었다. 그러나 왕정반대운동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샤를르10세는 극렬 왕정주의자였다. 자연히 노동자 및 농민계층과 거리를 두었으며 심지어는 정부에서 그들을 추방하기까지 했다. 몇 년후인 1830년 뜻하지 아니한 쿠테타가 일어났다. 왕실 가족중의 한 사람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립(Louis-Philippe)이 샤를르10세를 비롯한 왕실 사람들을 배반하고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과 재력을 지닌 루이-필립(오를레앙 공작)은 샤를르10세와 다음번 계승자인 루이-안투안의 퇴위를 강요했다. 샤를르10세가 양위서에 서명한후 이어 루이-안투안이 양위서에 서명하였다. 그 시간이 약20분 걸렸다. 그러므로 샤를르10세의 양위 이후 루이-안투안이 퇴위 서명을 할 때까지 20분간은 공식적으로 루이-안투안이 프랑스의 국왕이었다. 그 20분동안 마리-테레스는 루이-안투안의 부인으로서 프랑스 왕비의 자리에 있었다. 마리-테레스는 루이-필립이 통치하는 프랑스에 남아 있기 보다는 삼촌 겸 시아버지인 샤를르10세, 그리고 남편 루이-안투안과 함께 프랑스를 떠나 추방의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1830년 영국으로 향했다. 한편, 새로 국왕에 오른 루이-필립은 얼마후 나폴레옹3세가 집권하는 바람에 왕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이로서 부르봉 왕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프랑스에는 나폴레옹3세의 새로운 제국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1848년이었다. 루이-필립은 또 다른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사족: 원래 샤를르10세는 큰아들 루이-안투안과 마리-테레스 사이에 아이가 없자 다른 아들인 샤를르-페르낭(Charles-Fernand: duc de Berry: 베리공작)을 루이-안투안의 뒤를 이을 왕세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1820년 2월, 어떤 공화주의 테러분자가 샤를르-페르낭을 암살하였다. 샤를르-페르낭은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후사가 없었다. 샤를르10세의 낙담은 컸다. 누구를 큰아들 루이-안투안의 후계자로 삼아야 할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때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암살 당한 샤를르-페르낭의 부인으로 시실리왕가의 카롤린(Caroline)이 임신중이었다는 것이다. 얼마후 아들이 태어났다. 앙리 뒤돈느 다르투아(Henri Dieudonne d'Artois)로서 보르도 공작이란 지위를 주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 아이를 ‘기적의 아이’(Miracle Child)라고 불렀다. 역사에서는 샴보르백작(comte de Chambord)로 더 잘 알려지게 된 인물이었다.

     

여기서 잠시 다시한번 루이16세 이후의 왕위 계승 문제를 간략히 상고해보자. 도무지 누가 누구인지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쯤해서 정리를 해보는 것도 관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이다.


- 루이16세의 아들 루이-샤를르가 비록 10세의 어린 나이로 감옥에서 죽었지만 추종자들이 루이17세로 추앙함.

- 루이 16세의 뒤를 이을 루이-샤를르가 어린 나이에 죽자 루이 16세의 동생인 프로방스백작이 러시아에 망명중 루이18세라고 칭함. 그러나 그에게도 후사가 없어서 동생인 샤를르(아르투아백작)가 다음 왕위를 계승함.

- 그리하여 루이16세의 다른 동생인 샤를르(아르투아백작)가 샤를르10세로 왕위에 오름.

- 샤를르10세의 뒤를 이어 그의 큰아들 루이-안투안(당굴렝 공작)이 명목상 왕위에 오름. 루이-안투안은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의 딸인 마리-테레스와 결혼하였으나 후사가 없음. 훗날 루이-안투안을 루이19세로 부름.

- 샤를르10세의 큰아들 루이-안투안에게 후사가 없자 다른 아들인 샤를르 페르낭(베리공작)을 다음 왕위 계승자로 정함. 그러나 반왕당파에 의해 살해됨. 유복자로 태어난 사람이 앙리 뒤돈느(보르도공작)로 ‘기적의 아이’(Miracle Child)라고 부름.

- 샤를르10세의 사촌이 되는 루이-필립이 샤를르10세와 루이19세(루이-안투안)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국왕이 됨. 나폴레옹혁명으로 퇴위. 이로써 부르봉 왕조가 종식을 고하고 나폴레옹3세가 국왕으로 즉위함.


[멀고도 먼 추방생활]

영국에 도착한 마리-테레스등 왕실 일가는 3년동안 에든버러에 살았다. 우중충하고 거친 기후의 스코틀랜드 생활은 힘든 것이었다. 마리-테레스는 비엔나의 프란시스2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도움을 청했다. 프란시스2세는 마리-테레스와 사촌 간이었다. 다시 말하여 마리-테레스의 어머니인 마리 앙뚜아네트와 프란시스2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와는 남매간이다. 마리-테레스로서는 아무리 사촌간이지만 프란시스2세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1795년 마리-테레스는 템플 감옥에서 석방되어 비엔나로 추방된 일이 있다. 그때 비엔나에 온 마리-테레스는 비록 잠시 동안이지만 사촌인 프란시스2세의 감독아래 추방생활을 했었다. 프란시스2세가 누구인가? 자기의 딸 마리 루이스(Marie Louise)를 나폴레옹에게 어쩔수 없이 시집보낸 사람이다. 나폴레옹(나폴레옹1세)과 마리 루이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나폴레옹2세이다. 마리-테레스는 전에 비엔나에서 지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비엔나가 아닌 프라하에서 지내고자 희망했다. 이들은 프라하의 화려한 건물인 흐라드시친(Hradschin)궁전에 들어갈수 있었다. 이곳에서 마리-테레스는 병약한 삼촌 겸 시아버지인 샤를르10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다. 말년의 샤를르10세는 콜레라까지 걸려 끝내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마리-테레스와 가족들은 왕정주의자인 코로니니(Coronini)백작의 호의를 받아들여 프라하를 떠나 그의 영지가 있는 슬로베니아의 고리카(Gorica: 현재의 이탈리아 고리지아)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마리-테레스는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지냈다. 마리-테레스는 매우 독실한 로마 가톨릭이었다.


마리-테레스의 부군인 루이-안투안은 1844년 세상을 떠났다. 루이-안투안은 슬로베니아의 코스타녜비카(Kostanjevica)에 있는 프란시스코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아버지 샤를르10세의 묘소 바로 옆이었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살펴보면, 슬로베니아의 코스타녜비카 수도원에는 샤를르10세, 루이19세(루이-안투안), 피살당한 샤를르10세의 아들 샤를르-페르낭의 딸인 루이스(Louise), 샤를르-페르낭의 유복자 앙리 등이 함께 안치되어 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후 혼자 몸이 된 마리-테레스는 비엔나 근교의 프로스도르프(Frohsdorf)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마리-테레스는 독서를 하고 산책을 하며 자수도 놓으며 시간을 보냈으나 그 외의 시간에는 오로지 기도하는 생활을 하였다. 피살당한 사촌 샤를르-페르낭의 아이들도 함께 와서 지냈다. 1848년 프랑스는 루이-필립의 통치를 끝내고 새로운 공화국으로 되었다. 그로부터 3년후 마리-테레스는 한많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1851년 10월 19일이었다. 어머니 마리 앙뚜아네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지 58년 후였다. 마리-테레스도 역시 슬로베니아의 코스타녜비카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남편 루이-안뚜안의 바로 옆에! 마리-테레스의 묘비에는 ‘프랑스의 태후(국왕인 남편을 잃은 왕비: Queen Dowager of France)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냥 왕비 또는 공주라고 표시하지 않고 Dowager라고 표시한 것은 비록 20여분에 불과했지만 프랑스의 왕비로 지냈음을 표시코자 그랬다는 설과 부르봉 왕조의 사람들이 마리-테레스를 왕비로서 인정하지 않아서 이에 대한 반발로 그렇게 표현 했다는 설이 있다.

 

[스크린속의 마리-테레스]

마리-테레스는 영화속에 자주 등장하였다. 주로 어머니 마리 앙뚜아네트와 관련한 영화에 등장하였다.

- 1938년 영화 ‘마리 앙뚜아네트’에서는 노르마 쉬어러(Norma Shearer: 왕비 역)의 상대역으로 마릴린 노울든(Marilyn Knowlden)이 마리-테레스 역을 맡았다.

- 1975년 프랑스 TV 영화 ‘마리 앙뚜아네트’에 등장. 마리 앙뚜아네트역은 안느-로라 므리(Anne-Laura Meury)였다.

- 1989년 영화 ‘프랑스 혁명’(The French Revolution)에서는 캐서린 플린(Katherine Flynn)이 마리-테레스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마리 앙뚜아네트 역은 캐서린 플린의 어머니인 제인 세이무어(Jane Seymour)가 맡아 화제를 뿌렸다.

- 2001년 영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The Affair of the Necklace)에도 아역으로 등장했다. 라 모트부인 역은 조일리 리챠드슨(Joely Richardson)이 맡아 열연한 영화였다.

- 2006년 영화 ‘마리 앙뚜아네트’에서는 2세와 6세때의 마리-테레스가 각각 등장한다. 마리 앙뚜아네트역은 커스튼 던스트(Kirsten Dunst)였다. 


- 최근 북아이랜드에서 루이17세에 대한 연극이 무대에 올려진 일이 있다. 루이17세, 샤를르10세, 마리-테레스, 가정교사인 드 투르젤(de Tourzel) 후작부인 등이 등장한다. 연극의 타이틀은 ‘고통받은 자들’(All Those Who Suffered)이었다.

-  마리-테레스의 삶은 엘레나 마리아 비달(Elena Maria Vidal)이 쓴 ‘공주마마’(Madame Royale)에 집중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비달의 소설인 ‘트리아농’(Trianon)의 후편이다. ‘트리아농’은 혁명 전의 베르사이유 생활을 그린 것이다.

- 최근 샤론 스튜어트(Sharon Stewart)여사가 마리-테레스가 남긴 비망록을 기반으로 하여 ‘공주마마의 일화’(The Journal of Madame Royale)라는 책을 발간했다. 처음에는 제목을 ‘어두운 탑’(The Dark Tower)이라고 하려했다. 공주를 비롯하여 왕실 가족들이 템플 타워에 갇혀 있던 때의 얘기가 상당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샤론 스튜어트는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스토리를 ‘왕관의 아래에서’(Beneath the Crown)라는 연작으로 만들었다. 템플 감옥에서의 스토리는 ‘탑속의 공주’(The Princess in the Tower) 편에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