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궁전/슐로스 쇤브룬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욕이 스며있는 쇤브룬 궁전

정준극 2008. 2. 19. 09:01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욕이 스며있는 쇤브룬 궁전

 


쇤브룬 궁전과 분수

                             

쇤브룬 궁전(슐로쓰 쇤브룬)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찬란했던 영광과 기억하기에도 민망한 오욕이 함께 담겨 있는 곳이다. 쇤브룬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흥망과 성쇠를 지켜본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쇤브룬 궁전은 세기의 여걸 마리아 테레지아의 삶이 배어있는 곳이며 비운의 엘리자베트(씨씨) 왕비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쇤브룬 궁전은 어린 모차르트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곳이며 마리 앙뚜아네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쇤브룬 궁전은 비엔나를 점령한 나폴레옹이 프랑스군의 사령부로 삼았던 곳이며 1차대전 직후 오스트리아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1세가 퇴위한 곳이다. 쇤브룬 궁전은 비엔나의 랜드마크이다. 쇤브룬 궁전은 당대의 거장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어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하여 건설한 바로크 궁전이다. 건설은 1696년부터 1713년까지 10여년이 걸렸으며 당초 설계보다는 규모를 축소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니콜라우스 파카씨(Nikolaus Pacassi)에게 대대적인 개축을 지시하였고 1744년부터 1749년까지 공사가 진행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쇤브룬 궁전을 설계한 건축가 피셔 폰 에어라흐의 기념상


쇤브룬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이었다. 드넓은 정원과 시원하게 트인 전망은 베르사이유에 비하여 결코 손색이 없는 훌륭한 궁전이다. 쇤브룬 궁전의 본격 건설은 17세기 말부터 시작되었지만 쇤브룬의 역사는 훨씬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 지금의 쇤브룬 위치에는 넓은 숲과 카텐베르크(Kattenberg)성이 있었다. 카텐부르크성은 1529년 오토만 터키의 비엔나 공성(攻城) 때에 파괴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2세(1527-1756) 황제는 1569년 이 지역을 황실 소유로 취득하고 폐허가 된 카텐부르크성을 재건하였다. 그는 이곳을 합스부르크의 사냥터로 삼고 간혹 사슴이나 멧돼지를 사냥하기 위해 들렸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루돌프2세(1552-1612)가 사냥별장을 확장하였으나 1605년 헝가리의 공격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루돌프2세의 동생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마티아스(1557-1619)가 폐허가 된 사냥별장을 재건하였다. 이때에 숲속에서 물의 품질이 좋은 아름다운 샘을 발견하였다. 쇤브룬(아름다운 샘)이란 명칭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쇤브룬이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페르디난트2세(1578-1637)의 부인 ‘곤자가의 레오노르’(Leodor de Gonzaga) 때문이었다. 페르디난트2세는 사촌형인 마티아스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사람이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왕을 겸하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의 군주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공(Archduke: Erzherzog)이라고 불렀다. 곤자가의 레오노르는 황실의 사냥별장을 여름 거처로 변경하고 대규모의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아마 이때부터 쇤브룬 궁전이라고 불렀던것 같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쇤브룬 궁전은 1683년 터키의 2차 비엔나 공성 때에 다시 한번 파괴되었다. 터키군이 패배하여 퇴각한후부터 합스부르크 제국은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페르디난트2세의 왕비 엘레오노레. 쇤브룬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다.


페르디난트2세와 3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오른 레오폴드1세(1640-1705)는 허물어진 쇤브룬 궁전을 제국의 위풍에 맞게 완전히 새로운 건물로 바꾸기로 했다. 레오폴드1세는 당대의 건축가인 오스트리아의 피셔 폰 에어라흐(Fischer von Erlach)에게 새로운 궁전의 건설을 위임했다. 폰 에어라흐는 황실 가족들을 위한 장엄한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왕실의 권위와 포부와 이상을 상징하는 넓은 궁전이었다. 폰 에어라흐는 베르사이유를 능가하는 웅장하고 화려한 유토피아 궁전을 짓고자 했다. 하지만 레오폴드1세가 이 제안을 거절했다. 전통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단순함과 경제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폰 에어라흐는 지나치게 위압적인 건물이 되지 않도록 설계를 축소하였다. 반면, 보다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궁전으로 설계했다.

 

쇤브룬 정원에서의 여름밤 연주회


공사는 1696년부터 시작되었다. 공사는 레오폴드1세의 큰아들인 요셉1세(1678-1711)까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본관 건물과 현재 오벨리스크와 분수가 위치하고 있는 ‘명예의 광장’(Courtyard of Honor)이 완성되었다. 한편 대규모 정원은 프랑스 조경사인 장 트레에(Jean Trehet)가 프랑스 스타일로 완성하였다. 요셉1세는 쇤브룬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쇤브룬 궁전의 내부 장식을 완성한 사람은 요셉1세의 부인인 아말리아 귈레르미나(Amalis Guilermina)였다. 그러나 원래의 목적대로 황실 가족들의 여름 거주지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비엔나 중심가에 있는 호프부르크가 생활하는데 더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쇤브룬의 글로리에트와 정원


1728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카를6세(샤를르6세)가 쇤브룬을 구매하였으나 간혹 사냥모임을 위한 별장으로 사용하였을 뿐이었다. 카를6세는 비엔나 서북쪽에 있는 클로스텐부르크(Klostenburg)수도원을 매입하여 마드리드 북쪽에 있는 에스코리알(Escorial) 궁전을 본 따서 ‘오스트리아의 에스코리알’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합스부르크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이라는 정치적 문제 때문에 혼돈기에 있어서 무산되었다. 쇤브룬이 비로소 합스부르크를 대표하는 영광의 전당으로 등단하게 된 것은 카를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부터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한 궁정 건축가인 니콜라우스 파카씨(Nkolaus Pacassi)에게 쇤브룬의 전면적인 개축을 의뢰했다. 재건축 공사는 1744년부터 시작하여 5년이 걸렸다. 파카씨는 오리지널 바로크 스타일의 궁전을 로코코 모습을 띠는 것으로 바꾸었지만 바로크의 기조는 손상하지 않았다. 대회랑(Great Gallery)과 소회랑(Small Gallery)은 그 때에 추가된 방들이다. 궁전극장은 오리지널 설계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음악과 연극을 애호하기 때문에 추가로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궁전과 정원이 완성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쇤브룬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황실 가족들의 상주 공관으로 만들었다. 쇤브룬 궁전은 장차 프랑스의 왕비가 된 마리 앙뚜아네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며 여섯 살의 모차르트가 천재적인 재능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경탄케 만든 곳이었다.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아버지 샤를르(카를)6세. 딸을 지극히 사랑하여 딸을 황제로 세우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으나 반대가 심해서 성사되지 못했다.


1805년과 1809년은 쇤브룬으로서 오욕의 해였다. 두 차례에 걸쳐 비엔나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쇤브룬 궁전에 프랑스군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나폴레옹의 몰락후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리기 위해 열린 ‘비엔나 회의’(The Congress of Vienne: 1814-1815)때에는 거의 매일 밤 연회와 무도회가 개최된 곳도 쇤브룬이었다. 나폴레옹의 유일한 아들인 라이히슈타트 공작(Duke of Reichstadt)은 이곳에서 살았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차대전의 와중에 있었던 프란츠 요셉 황제도 이곳에서 살았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쇤브룬 궁전은 오스트리아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1세가 1918년 퇴위문서에 서명한 곳이다. 쇤브룬 궁전은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은 종지부를 목격했으며 합스부르크 왕조의 종말을 지켜본 궁전이었다. 쇤브룬 궁전은 2차대전중 정확히 270발의 포탄을 맞아 상당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러시아군이 비엔나를 장악하였을 때에는 러시아군사령부로 사용되었고 종전후에는 3년동안 영국군 사령부였다. 전후의 오스트리아 정부는 쇤브룬 복구공사에 심혈을 기울여 1952년 드디어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이후 쇤브룬은 연방정부가 국빈을 위한 행사를 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쇤브룬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모차르트 연주회가 열리며 마리오네트 연극도 계속 공연되고 있다. 그러나 쇤브룬 극장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 쇤브룬궁전은 한문으로 美泉宮(미천궁)이라고 쓴다.

 

 보나프라트 나폴레옹(나폴레옹1세). 쇤브룬에서 잠시 체류한 일이 있다.

 

A. 궁전 정문 B. 히칭문 C. 마이들링문 D. 마리아 테레지아문(티볼리 문)

1. 궁전 광장 2. 궁정 극장 3. 뮤스 4. 궁정교회 베르글방 5. 궁전 식당 6. 카이저스퇴클 7. 히칭 교회 8. 나이아드 분수 9. 요제프 2세 기념상 10. 식물원 11. 로마 유적지 12. 쇤브룬 샘물 13. 오벨리스크 14. 황실 수영장 15. 소글로리에트 16. 샘 17. 조경 연구소 18. 삼림실험연구소 19. 팔각정

상단: 기술박물관 방향, 윗쪽: 오른쪽 황태자 정원(Kronprinzen-garten), 왼쪽 실내정원(Kammer-garten), 중간: 넵튠 분수(Neptune's Fountain), 그 아래에 글로리에트(Gloriette), 또 그아래는 꿩사육장(Pheasantry), 글로리에트 왼편은 티롤 정원(Tyrolean Garden), 그 윗쪽은 동물원(Zoo), 맨 왼쪽은 식물원(Botanic Garden), 하단은 마리아 테레지아 병영(Maria Theresa Barracks), 병영의 왼편으로는 히칭 공동묘지(Hietizng Cemet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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