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궁전/슐로스 쇤브룬

프란츠 요셉1세와 엘리자베스의 아파트멘트

정준극 2008. 2. 19. 09:06

[프란츠 요셉의 부모가 살던 방들]

‘붉은 살론’과 연결하여서는 건물의 모퉁이 방인 ‘동쪽 테라스 방’(Terrassenkabinett Ost)이 있다. 장미꽃 화환을 기조로 한 여러 개의 벽화가 있다. 1775년 자겔만(J. Zagelmann)의 작품이다. 다음으로 있는 세 개의 방은 프란츠 요셉1세(씨씨의 남편)의 아버지인 프란시스 샤를르 대공과 어머니인 바바리아의 조피아(Sophia 또는 Sophie)가 지내던 곳이다. 프란츠 요셉1세의 어머니인 조피아는 프란츠 요셉1세와 결혼한 엘리자베트(씨씨)의 친이모이다. 첫째 방은 프란츠 요셉1세의 부모인 프란츠 샤를르 대공과 조피아 대공비의 침실로서 프란츠 요셉1세가 태어난 방(Geburtszimmer)이다. 두 번째 방과 세 번째 방에는 여러 초상화가 걸려 있다. 마리아 테레자, 그의 남편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시스 샤를르1세,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어린 시절 초상화들이 걸려 있다. 두 사람은 슬하에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세 번째 방은 프란츠 요셉1세의 아버지인 프란시스 샤를르가 서재 겸 거실(Schreibzimmer, Salon des Erzherzogs Franz Karl)로 사용했었다.

 

[우측관: 프란츠 요셉1세와 엘리자베스의 아파트멘트] 

쇤브룬 궁전의 역사에서 마지막 단계는 1848년, 젊은 황제 프란츠 요셉1세가 제국의 통치권을 넘겨받은 때부터 시작한다. 프란츠 요셉1세 황제로 인하여 쇤브룬 궁전은 다시한번 합스부르크의 권세를 상징하는 장소로 전환되었다. 1854년, 프란츠 요셉1세 황제와 엘리자베트(씨씨)가 결혼하게 되자 황제의 어머니인 조피(Sophie) 대공비는 신혼부부를 위해 쇤브룬 궁전의 오른쪽 채에 여러 방을 마련해 주었다. 황실 규범에 따르면 황제나 황태자, 또는 황제의 부모등  황족은 최소 5개의 방, 즉 거실 2개, 응접실 1개, 침실과 내실 각1개를 사용할수 있었다. 그런데 황제와 왕비는 각가 5개의 방을 사용할수 있었다. 그러므로 신혼부부인 프란츠 요셉1세와 엘리자베트(씨씨)는 쇤브룬 궁전 오른쪽 채의 거의 모든 방을 사용하였다.

 

 프란츠 요셉1세 황제의 침실 (한쪽 구석에 검소한 작은 침대가 있다)


프란츠 요셉1세의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는 쇤브룬을 네오 로코코 스타일로 재단장하였다. 조피 대공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시스2세(나중에 오스트리아제국의 프란시스1세) 시대의 제국 스타일의 가구와 비더마이어(Biedermeyer) 스타일의 가구를 들어내고 대신 네오-로코코 스타일의 가구로 바꾸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쇤브룬 궁전에서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가구는 하나도 찾아 볼수 없다. 다만 그나마 남아 있다면 당구대가 유일하다. 소피 대공비에 의해 궁전의 가구가 모두 화려한 스타일로 교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프란츠 요셉1세 황제는 야전침대와 같은 단순한 철제 침대를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프란츠 요셉1세 황제와 엘리자베트(씨씨) 왕비의 방들은 마치 이들의 성격을 반영이나 하듯 다른 방들에 비하여 단순하고 검소하다. 벽에는 금박의 장식이 하나도 없으며 천정에도 프레스코 그림이 없다. 방의 색감도 주로 적색과 백색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프란시스 요셉1세의 방들이다. 마리아 테레자 시대에 궁전을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에 만든 ‘푸른 계단’(Blaue Stiege)을 통해 올라갈수 있다. ‘푸른 계단’은 종전에 마리아 테레자의 큰 삼촌인 요셉1세가 식당으로 사용하던 방에 설치한 것이다. 천정 프레스코인 ‘왕자들의 덕목’을 다룬 비유화는 1702년, 당대의 세바스티아노 리치(Sebastiano Ricci)가 완성한 작품이다. 벽에는 얀 페터 브레다엘(Jan Peter Bredael)이 그린 벽화가 있다. 전쟁의 공포를 그린 벽화이다. 다음 방은 경호원들이 머물던 방이며 그 다음은 ‘당구의 방’(Billiard-Zimmer)이다. 원래 이 방은 황제를 개인적으로 알현코자 하는 사람들이 대기하던 곳이었다. 이 방에 있는 대형 그림은 마르틴 반 마이튼스(Martin van Meytens)가 완성한 대작으로 ‘1757년 로레인의 샤를르 공자와 다운(Daun) 원수(元帥)에게 마리아 테레자 최고훈장을 수여함’이다. 양쪽 도어 쪽에 있는 그림들은 ‘1858년 최초 특별 명예 백주년 기념’이라는 작품과 ‘프란츠 요셉 황제가 대공, 대공부인 및 장군들과 함께 비엔나 수비대를 위한 만찬을 베푼후 남쪽 계단을 통과하심’이라는 작품이다. 이 방에 있는 당구대는 프란츠 요셉1세 황제의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가 쇤브룬의 가구들을 로코코 스타일로 교체할 때에 살아남은 것으로 비엔나 스타일의 중후한 단순미를 느낄수 있는 것이다.

 

당구의 방

 

다음 방은 이른바 ‘호두나무 방’(Nussbaumzimmer)라고 불리는 접견실이다. 벽과 천정의 라이닝을 호두나무 목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1865년경의 가구들도 무도 호두나무로 목재로 만든 것이다. 의자와 같은 가구들은 능직(綾織: 다마스크)으로 장식했으며 여기에 금색 도장(塗裝)을 하여 품위를 높인 것들이다. 이 방은 아름다운 샹들리에로도 유명하다. 또한 프란시스 샤를르(마리아 테레자의 부군)와 프란츠 요셉(씨씨의 남편)의 대리석 흉상도 보관되어 있다. 프란츠 요셉은 황금 양털 기사의 복장을 입고 있다.


다음 방은 프란츠 요셉1세 황제의 집무실(Schreibzimmer)이다. 희색 바탕의 벽면에 갈색 라이닝을 댄 것이 눈을 끈다. 가구들은 초록색 단풍나무 잎이 장식된 갈색 천으로 씌어져 있다. 그러나 이 방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가구가 아니라 프란츠 루쓰(Franz Russ)가 그린 26세 때의 엘리자베트(씨씨) 왕비, 프란츠 폰 마츄(Franz von Matsch)가 그린 ‘호프부르크 집무실에서의 프란츠 요셉 황제’, 역시 프란츠 루쓰가 그린 30세 때의 ‘요셉1세 황제’ 초상화이다. 탁상위에는 프란츠 요셉1세와 엘리자베트(씨씨) 왕비의 초상화를 넣은 작은 액자가 놓여 있다. 프란츠 요셉1세 황제는 쇤브룬에 있을 때면 이 방에서 하루 18시간씩이나 정무를 보았다. 특히 격변의 제국말기에는 더욱 정사(政事)에만 열심을 기울였다. 그런 반면 외아들 루돌프를 잃은 여파로 더욱 허약해진 엘리자베트(씨씨) 왕비는 요양을 위해 궁전을 떠나 타국에서만 지냈다.

 

프란츠 요셉1세의 집무실 (엘리자베트 왕비의 전신 초상화가 걸려 있다)


황제의 집무실관 연결된 작은 방은 황제의 침실(Schlafzimmer)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시기를 장식한 위대한 노황제 프란츠 요셉1세가 침실로 이용한 소박한 방으로 이 방에서 노황제는 68년의 장기 통치를 마감하고 1916년 11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프란츠 폰 마츄(Franz von Matsch)가 그린 프란츠 요셉1세 황제의 임종 장면이다. 그의 외아들로서 황태자였던 루돌프(Rudolf)의 초상화도 함께 걸려 있다. 루돌프 황태자는 부인과 딸을 두고 젊은 아가씨 마리아 베체라(Maria Vetsera) 남작부인과 이루지 못할 사랑을 마감하기 위해 비엔나 근교의 마이엘링(Meyerling)에서 동반 자살했다. ‘성모상’(Jungfrau)은 1908년 프란츠 요셉1세의 60회 탄신일을 기념하여 독일 제후들이 증정한 것이다. 프란츠 요셉1세의 침대는 마치 군용 야전침대처럼 거칠고 소박한 것이어서 평소 근검한 황제의 면모를 느끼게 해준다.


 이어서 세 개의 작은 방들이 연결하여 있다. 코너에 있는 ‘테라스 방’(Terrassenkabinet), 아래층 작은 정원으로 내려갈수 있는 계단이 있는 ‘계단의 방’(Stiegenkabinet), 아름다운 무늬를 넣은 핑크색 수단(繡緞)으로 도배한 ‘욕실’(Toilettezimmer)이다. 이 방들을 지나면 마지막으로 ‘부부 침실’(Gemeinsames Schlafzimmer)에 다다른다. 1854년에 완성된 이 방은 파란색 비단으로 벽과 가구들을 장식했기 때문에 눈에 확 띤다. 심지어 커튼도 파란색 비단으로 만든 것이다.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는 마리아 테레자의 여동생인 마리아 안나(Maria Anna)이다. 마리아 안나는 사랑하는 샤를르 알렉산더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이듬해에 첫 아이를 출산하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 알렉산더는 그후 거의 30년 동안이나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면서 사랑하는 마리아 안나를 회상하며 살았다. 샤를르 알렉산더는 마리아 테레자의 남편인 프란시스 샤를르 스테픈(프란시스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남동생이다. 그러므로 자매가 형제와 결혼한 것이다. 원래는 마리아 테레자와 프란시스1세의 부부침실이었으며 나중에는 프란츠 요셉1세와 엘리자베트(씨씨) 왕비의 부부침실에 마리아 테레자의 여동생인 마리아 안나의 초상화가 홀로 걸려 있는 것도 특별하다. 당대의 황실 초상화의 거장인 마르틴 반 마이튼스(Martin van Meytens)의 작품이다. 침실 위와 기도대(prie-dieu) 위에는 각각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작은 그림이 걸려 있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왕비(씨씨)의 부부 침실 (침대 위에는 성모와 아기예수 그림) 


‘부부침실’을 거치면 ‘엘리자베트 왕비 거실’(Kaiserin Elizabeth-Zimmer)에 이른다. 벽면은 연회색 능직(綾織)으로 라이닝을 댔으며 가구들은 붉은 비단으로 씌었다. 이 방에는 여러 점의 그림이 걸려 있어서 눈길을 끈다. ‘포도수확’과 ‘추수’는 거장 하케르트(Hakert)의 작품이다. 그 외에는 합스부르크 왕실 전속 초상화가인 장-에티앙느 리오타르(Jean-Etienne Liotart)가 그린 대공부인(공주)들의 초상화이다. ‘사냥복을 입은 마리 앙뚜아네트’은 마리아 테레자가 프랑스로 시집간 막내딸 마리 앙뚜아네트를 생각하며 늘 곁에 두고 보던 그림이다. 마리아 테레자의 둘째 딸로 불구자였기에 불행한 삶을 살았던 마리아 안나(Maria Anna), 마리아 테레자의 큰 아들인 요셉2세의 젊은 시절 모습, 마리아 테레자가 가장 총애했던  넷째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hristina), 마리아 테레자의 다섯째 딸로서 어릴 때 천연두에 걸려 얼굴에 영향을 받아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산 마리아 엘리자베트(Maria Elisabeth)의 초상화는 모두 장-에티안느 리오타르의 작품이다. 스위스 출신의 화가 장-에티안느 리오타르는 마리아 테레자의 특별 배려로 1743년부터 쇤브룬에 머물면서 왕실 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처럼 장-에티안느 리오타르가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초상화에 전념하자 유럽의 다른 왕실들과 귀족 집안에서도 마치 유행처럼 너도나도 초상화가를 고용하여 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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