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가톨릭 국왕 필립2세 (Philippe II)
1527-1598 (1556-1598)
베르디의 오페라로 유명한 돈 카를로스(Don Carlos)의 아버지가 필립2세(펠리페2세)이다. 돈 카를로스는 필립2세의 첫째 부인인 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 공주에게서 태어났다. 마리아 마누엘라 공주는 포르투갈왕 후안3세의 딸이다. 필립2세는 독실하다 못해 거의 광적인 가톨릭 신봉자였다. 그래서 ‘가톨릭의 필립’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필립2세의 아버지 카를로스5세(샤를르5세)도 골수 가톨릭이었다. 유럽의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필립2세에게도 로마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거룩한 존재가 자기의 통치에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다. 필립2세는 이들의 위상을 높여주면서도 실속을 차리는 정책으로 스페인을 통치하였다. 필요하다면 교황청에게 순종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으며 특히 무소불능의 종교재판관을 이용하여 정적을 이단으로 몰아 억누르는 비상한 정책을 사용하였다. 필립2세는 철권 정치로 유명했다. 스페인 왕국의 복잡다단한 영토를 통치하자면 전제주의 정치가 불가피 했기 때문이었다. 필립2세는 스페인 영토 내에서 자치를 요구하는 저항이 있으면 무자비할 정도로 탄압하였다. 필립2세는 스페인의 국왕(1556년부터 세상 떠날 때까지)이라는 직위와 함께 나폴리 국왕(1554년부터 세상 떠날 때까지), 영국 섭정왕(메리여왕의 부군으로서 1554년부터 1558년까지), 포르투갈과 알가르베스(Algarves) 국왕(1580년부터 세상 떠날 때까지), 남미 칠레 국왕이라는 막강한 지위에 있었다. 필리핀은 스페인 이름으로 Las Islas Filipinas(필리핀 군도)라고 부른다. 필리핀은 과거 333년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필리핀이라는 이름은 필립2세가 왕자(Felipe)일 때 그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스페인의 영토는 광대무변했고 스페인의 국왕으로서 필립2세의 권세는 하늘처럼 높았었다.
마드리드에 있는 필립2세 기념상
[네번의 결혼]
필립2세는 네 번이나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앞에서 지적한대로 1543년, 16세 때의 왕자 시절에 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 공주와의 결혼이었다. 마리아 마누엘라는 왕자 돈 카를로스(1545-1568)를 낳은지 4일후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여인이었다. 필립의 부왕 카를로스5세는 영국과의 동맹을 추구했다. 카를로스5세는 그 방안으로 상처한 아들 필립과 영국여왕 메리와의 결혼을 추진하였다. 결국 필립은 1554년 가톨릭 여왕인 메리1세(Mary I)와 결혼하였다. 필립과 메리는 먼 사촌간이었다. 메리의 어머니는 헨리8세와 결혼한 아라곤의 캐서린으로서 필립에게는 대고모가 되기 때문이었다. 필립2세는 영국여왕 메리와 결혼하게 됨으로서 영국으로부터 나폴리 왕국을 선물로 받았으며 그와 함께 ‘예루살렘 왕’이라는 타이틀을 받았다. ‘예루살렘 왕’이라는 타이틀은 아서왕 이래 전통적으로 영국의 통치자에게 붙여진 타이틀이었다. 그러나 메리가 여왕이므로 남편인 필립이 ‘예루살렘 왕’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결혼조건은 메리 여왕이 생존하여 있는 동안 필립2세가 영국 여왕의 섭정왕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조건들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조신(朝臣)들은 필립과 메리 여왕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필립2세 자신도 메리와의 결혼이 사랑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정치적인 목적이었으므로 부인에 대한 감정이 유별할수 없었다. 더구나 메리는 필립2세보다 11세 연상이었고 생긴 것도 별로였다. 그러나 메리는 필립2세와의 결혼을 사랑으로 맺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메리여왕은 '블라디 메리'로 유명한 바로 그 메리이다.
필립2세의 두번째 부인 영국여왕 메리1세(블라디 메리)
필립이 메리와 결혼한지 2년후인 1556년 1월, 필립의 아버지 카를로스5세가 아들 필립에게 양위하는 바람에 필립은 필립2세로서 스페인 왕국의 군주가 되어 대관식을 가졌다. 아들에게 양위한 카를로스5세는 그후 2년동안 수도원에서 조용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필립은 비록 아버지 카를로스5세가 생존 중에 양위를 하여 스페인 왕국의 군주가 되었으나 뜻한바 있어서 카를로스5세가 세상 떠날 때까지 스페인에 살지 않았고 주로 영국에서 지냈다. 필립이 스페인의 국왕으로 즉위한지 2년후인 1558년, 메리 여왕이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필립2세는 메리의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1세 여왕에게 관심을 가지고 결혼코자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유명한 '천일의 앤'의 딸이다. 그러나 결혼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성사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1세 여왕은 이복언니 메리1세에 의한 가톨릭 일변도를 증오하였다. 그러므로 골수 가톨릭인 필립2세와 엮어지기 어려웠다.
필립2세와 결혼 얘기가 있었던 영국여왕 엘리사베트1세
1559년, 무려 60년을 끈 프랑스-스페인간의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 캬토-캄브레시(Cateau-Cambresis)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내용중 하나는 필립2세와 프랑스 앙리2세(Henri II)의 딸 엘리사베트 드 발루아(Elisabeth de Valois)의 결혼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앙리2세의 딸인 엘리사베트 공주는 원래 필립2세의 아들인 돈 카를로스와 결혼하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약서에는 프랑스의 엘리사베트 공주가 스페인의 국왕과 결혼한다고 되어 있으며 돈 카를로스라는 이름은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국왕인 필립2세와 결혼해야 한다는 유권적 해석에 따라 필립2세와 엘리사베트가 결혼하게 되었다. 부자간인 필립2세와 돈 카를로스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돈 카를로스가 플란더스(Flanders)로 도피하려 했으나 필립2세에게 체포되었고 감옥에 갇힌 돈 카를로스는 아버지 필립2세의 처사에 저항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필립2세를 적대하는 세력들은 필립2세가 돈 카를로스를 죽이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하며 필립2세를 비난했다. 엘리사베트 왕비는 왕자 아기씨를 생산하지 못했다. 대신에 두명의 딸을 낳았다. 이사벨라 클라라 유제니아(Isabella Clara Eugenia)와 카틸리나 미카엘라(Cataliina Micaela)였다. 필립2세의 네 번째 결혼은 조카인 막시밀리안 황제의 딸인 안나(Anna)였다. 안나는 1578년 필립2세에게 후계자인 필립3세를 제공하였다.
필립2세의 네번째 부인 안나. 필립3세의 어머니.
[영국의 가톨릭화를 희망한 필립]
필립2세가 집권하던 16세기 초반은 유럽에서 종교개혁의 물결이 이미 확산된 시기였다. 이에 대응하여 가톨릭 유지 운동과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스페인의 필립2세는 철저 가톨릭으로서 종교개혁을 타도하고 가톨릭을 옹호하는 반종교개혁에도 앞장 섰다. 필립2세의 이같은 반종교개혁운동은 그가 골수 가톨릭인 영국 여왕 메리1세와 결혼함으로서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초록은 동색! 필립2세의 두 번째 부인인 메리 여왕은 필립2세의 아버지인 카를로스5세의 친사촌이다. 그러므로 메리 여왕은 필립2세에게 있어서 숙모뻘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간의 평화를 위해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블라디 메리’로 더 잘 알려진 메리 여왕은 1558년 영국에서 가톨릭교회가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가톨릭교회는 헨리8세의 영국성공회 노선으로 무한 핍박을 받다가 헨리8세의 사후 메리가 여왕이 되자 성공회와 개신교를 누르고 일어서려 하였다.
필립2세
[엘리자베스1세의 등장]
‘블라디 메리’(메리1세)의 뒤를 이어 엘리자베스1세(헨리8세의 두 번째 부인인 앤 볼레인의 딸)가 여왕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성공회였다. 잘 아는대로 영국의 성공회는 헨리8세가 첫 번째 부인인 스페인의 캐서린(메리 여왕의 어머니)과 이혼하고 앤 볼레인(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과 결혼하기 위해 비롯된 교회이다. 그러므로 새로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가 가톨릭을 증오하는 개신교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앤 볼레인의 딸 엘리자베스1세가 여왕이 되자 영국의 가톨릭교회는 엘리자베스의 왕위 계승을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헨리8세가 첫 부인인 캐서린과 강제 이혼하고 앤 볼레인과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 이혼을 금지사항이었다. 영국의 가톨릭교회는 가톨릭인 헨리7세의 증손녀가 되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영국 여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엘리자베스로서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없애야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사촌간이지만 어떤 청년 귀족을 사이에 둔 연적(戀敵)이기도 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감금한후 1587년 처형했다. 도니제티의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엘리자베스와 메리와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처형은 영국에 가톨릭 왕권을 세우려던 필립2세의 희망을 좌절시켜주는 것이었다. 필립2세는 영국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무력으로 영국을 침공코자 했다. 마침 영국이 스페인령 더치(Dutch) 반도(反徒)들을 후원하자 필립2세는 이를 호기로 삼았다. 이듬해인 1588년 필립2세는 막강한 스페인의 아르마다(Armada) 함대를 이끌고 영국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대형 아르마다 전함들은 영국의 얕은 해변에 정박하여 군대를 상륙시킬 수 없었다. 스페인의 아르마다 함대는 영국의 소형 전함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전투는 마치 대량학살과 같았다. 필립2세의 아르마다 함대는 거의 전멸 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였다. 영국의 해적인 드레이크(Drake)의 활약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항이다. 와신상담! 필립2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르마다를 재건하고 병사들을 양성했다. 필립2세는 당시로서는 관례가 아니었지만 아르마다 함선에서 전투중 부상당한 병사들 모두에게 국가가 연금을 주도록 했다. 필립2세는 특히 스페인의 첩보 활동을 대단히 개선하였다. 그리하여 첫 침공이 실패로 돌아갔던 때로부터 거의 10년후인 1596년과 1597년에 필립2세는 세 척의 새로운 아르마다 함선을 구축하고 그중 2척의 아르마다 함선을 또 다시 영국에 보내어 침공코자 했으나 하늘도 무심하여 역시 대패하였다. 나머지 1척의 아르마다 함선은 아조레스(Azores) 및 카나리(Canary) 군도에서 해적들의 습격을 물리치기 위해 파견되었다. 1585년부터 시작된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Anglo-Spanish War)은 필립2세(1598년 사망)와 엘리자베스1세(1603년 사망)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1604년에야 겨우 휴전에 들어갔다. 골수 가톨릭인 필립2세의 무적 아르마다 함대가 영국에 대패 당한 것은 개신교를 지향하는 유럽 여러 나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 것이었다. 필립2세에게 적대적이던 유럽의 개신교 국가들은 아르마다가 불타는 모습을 보고 이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무적함대 아르마다. 그러나 영국에게 대패하였다.
영국은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마찬가지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무적함대를 격퇴한 전공을 바탕으로 대서양을 제패코자 해군력을 증강키로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재정의 핍박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스페인은 중남미의 식민지들로부터 황금과 각종 보화를 착취하여 본국으로 송환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었다. 영국은 이 황금노선을 장악하여 스페인의 보물을 가로채려했다. 그러나 카리브해에서 스페인 함선과의 전투는 영국의 패배로 끝났다. 스페인은 필립2세가 구축한 첩보망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영국 함선들을 궁지로 몰고 갔던 것이다. 스페인은 식민지 때문에 부를 축적하였으나 계속되는 전쟁으로 재정이 바닥나게 되었다. 영국과의 전쟁이 계속되던 1596년 이번에는 프랑스가 스페인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필립2세는 전쟁으로 거의 파산지경이 되었다. 중남미의 식민지로부터 더 많은 금과 은을 실어 날라야 했다. 이를 위해 스페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해군력을 강화하였으나 빈번한 전투로 여간 손실을 본것이 아니었다. 필립2세는 1598년 세상을 떠났다.
[픽션 속의 필립]
- 필립2세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희곡 Don Carlos(돈 카를로스)의 중심인물이다. 주세페 베르디는 쉴러의 희곡을 바탕으로 오페라 Don Carlo(프랑스 버전은 Don Carlos)를 작곡했다. 필립2세는 오페라에서보다 원작 희곡에서 보다 동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오페라 베이스 역할 중에서 ‘돈 카를로’의 필립 역할은 가장 위대한 역할 중 하나이다.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필립의 아리아 Ella giammai m'amo!는 위대한 아리아이다.
- 벨기에의 극작가 샤를르 드 코스터(Charles de Coster)가 1867년에 내놓은 The Legend of Thyl Ulenspiegel and Lamme Goedzak는 19세기 벨기에의 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것이다. 더치독립전쟁을 지극히 애국적인 견지에서 조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필립2세는 구원받을 수 있는 구석은 조금도 없는 사악한 인간으로 그려있다.
-필립2세는 셰카르 카푸르(Shekhar Kapur)의 2007년 영화인 ‘엘리자베스의 황금시대’(Elizabeth: The Golden Age)에 등장한다. 명우 조르디 몰라(Jordi Molla)가 필립2세의 역을 맡았다.
- 필립파 그레고리(Philippa Gregory)의 역사소설 ‘여왕의 어릿광대’(The Queen's Fool)는 영국여왕 메리1세의 궁정이 배경이다. 메리 여왕과 결혼한 필립2세는 메리보다는 처제인 엘리자베스(훗날 엘리자베스1세)의 매력에 빠져 갈등을 겪는다는 내용이다. 필립2세는 엘리자베스에 대한 연정이 정치적으로 유해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기의 감정을 삼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합스부르크 > 합스부르크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페인 필립2세의 네번째 부인 안나 (Anna of Austria) (0) | 2008.02.20 |
---|---|
스페인 필립2세의 세번째 부인 엘리사베트 (0) | 2008.02.20 |
막시밀리안2세와 결혼한 스페인의 마리아 (0) | 2008.02.20 |
개신교에 호의적인 막시밀리안2세 (Maximilian II) (0) | 2008.02.20 |
예술의 후원자 루돌프2세 (Rudolf II) (0) | 2008.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