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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필립2세의 세번째 부인 엘리사베트

정준극 2008. 2. 20. 11:27

스페인 필립2세 국왕의 세 번째 부인

프랑스의 엘리사베트 공주 1545-1568



프랑스의 엘리사베트 드 발루아(Elisabeth de Valois: 1545-1568) 공주는 프랑스 국왕 앙리2세(Henri II)와 왕비인 이탈리아 메디치가문의 카테리네(캐서린: Catherine)의 딸이다. 엘리사베트는 어려서부터 예쁘고 총명하였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Don Carlo)의 프리마 돈나인 엘리사베트 왕비가 바로 엘리사베트 드 발루아이다. 엘리사베트 공주는 ‘가톨릭의 필립’(Philip the Catholic)이라고 불리는 스페인 국왕 필립2세와 1559년 스페인의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서 결혼하였다. 당시 신부 엘리사베트는 14세였고 신랑 필립2세는 65세였다. 이 결혼은 1559년 스페인과 프랑스 간에 맺은 평화조약(Peace of Cateau Cambresis)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필립2세는 첫 부인인 포르투갈의 마누엘라 공주가 아들 돈 카를로스를 낳은지 사흘만에 세상을 떠난 이후 영국의 메리 여왕과 결혼하였으나 그마저도 사랑없는 결혼으로 막을 내려 우울하게 있던 참이었다.

 

필립2세의 세번째 부인이 된 프랑스 앙리2세의 딸 엘리사베트 공주


원래 엘리사베트 공주는 필립2세의 아들인 돈 카를로(Don Carlo) 왕자와 약혼했다. 그러나 정략적으로 스페인 국왕인 필립2세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돈 카를로 왕자와 엘리사베트 공주는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이지만 시아버지가 될뻔 했던 필립2세와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필립2세는 젊은 엘리사베트를 어느 누구보다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언제나 함께 있고 싶어했으며 심지어 엘리사베트가 천연두에 걸려 병마와 싸울 때에도 옆에 붙어서 간호하였다. 엘리사베트의 첫 번째 임신은 불행하게도 유산되었다. 그후 21세 때에 첫 딸 이사벨라 클라라 유제니아(Isabella Clara Eugenia) 공주를 낳았으며 이듬해에는 둘째 딸 카테리네 미카엘라(Catherine Micaela: Catherine Michelle)를 낳았다. 엘리사베트는 곧 임신하였으나 이듬해(1568)에 또 아들을 사산하였고 바로 그 날 세상을 떠났다.

 

 엘리사베트와 약혼했던 스페인의 돈 카를로스 왕자(어린시절)


큰 딸 이사벨라는 아버지 필립2세의 공연한 외교정책으로 번번히 희생당하였다. 문제의 발단은 필립2세가 영국의 왕위와 프랑스의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요구하고 나선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영국의 왕위를 요구한 것은 두 번째 부인이 영국의 유명한 메리여왕(블라디 메리)이어서 메리가 세상을 떠난후 전남편으로서 영국의 왕이 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었으며 프랑스 왕위를 요구한 것은 세 번째 부인인 엘리사베스가 프랑스 왕 앙리2세의 딸이므로 사위인 자기야 말로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영국이나 프랑스는 ‘씨도 안 먹히는 소리’라면서 필립2세의 주장을 일축했다. 그러자 연로한 필립2세는 영국 및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서 대타를 내세우기로 하고 바로 이사벨라 공주가 후보자라고 발표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는 '이사벨라 좋아하네!'라면서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사벨라 공주는 공연히 아버지 때문에 스타일만 구긴 입장이 되었다. 나중에 필립2세는 이사벨라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Albert: 1559-1621) 대공과 결혼토록 했다. 알베르트 대공은 장인 겸 삼촌인 필립2세를 도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섭정 역할을 했다. 필립2세와 알베르트 대공이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통치할 때가 네덜란드-합스부르크의 황금시기였다. 알베르트의 후손들이 비엔나의 유명한 미술관인 알베르티나의 원조였다. 이사벨라는 3명이 자녀를 생산하였으나 모두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대단히 높았었다. 이사벨라는 아버지 필립2세(1598년)와 남편 알베르트(1621년)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사촌인 필립3세가 스페인 국왕이 되자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섭정으로 12년을 통치했다. 엘리사베트의 둘째 딸인 카탈리나 공주는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1세(Carlo Emanuele I)와 결혼하여 빗토리오 아메데오(Vittorio Amedeo)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엘리사베트와 필립2세 사이에서 태어난 큰 딸 이사벨과 둘째 딸 카타리나 공주의 어린 시절


이탈리아 최초의 유명 여류화가인 소포니스바 앙귀쏠라(Sofonisba Anguissola)는 1559년부터 10년동안 엘리사베트의 시녀로 있으면서 에리사베트의 초상화를 그렸다. 독일의 문호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1759-1805)는 돈 카를로 왕자와 엘리사베트 왕비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Don Carlos of Spain을 썼으며 오페라의 황제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는 쉴러의 비극을 기본으로하여 불후의 오페라 Don Carlo(Don Carlos)를 작곡하였다. 베르디의 '돈 카를로'에 의하면 돈 카를로가 파리에 체류할 때에 엘리사베스 공주를 만나 장래를 굳게 약속하였는데 얼마후에 돈 카를로의 아버지인 펠리페2세와 결혼할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실망과 분노와 비탄에 젖은 생활을 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