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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스페인 왕자 돈 카를로스 (Don Carlos)

정준극 2008. 2. 20. 11:29

비운의 왕자 돈 카를로스 (Don Carlos)

1545-1568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돈 카를로’의 주인공은 스페인의  돈 카를로스 왕자(Infante)이다. 돈 카를로스의 아버지는 유명한 스페인의 철권 국왕 필립2세(가톨릭의 필립이라는 별명이 있음: 1527-1598)이며 어머니는 포르투갈 후안3세(Juan III)의 딸 마리아 마누엘라(Maria Manuela: 1527-1545) 공주이다. 필립2세는 생전에 네 번 결혼했다. 마리아 마누엘라는 필립2세의 첫 번째 부인이다. 그 첫번째 부인이 낳은 아들이 돈 카를로스 왕자이다. 카를로스 왕자는 스페인의 중북부인 발라돌리드(Valladolid)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 마누엘라 왕비는 카를로스를 출산한지 4일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마리아 마누엘라는 18세였다. 어린 카를로스는 약간 불구였으며 무슨 일에나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특이한 성격의 아이였다. 카를로스는 자라면서 자존심이 강하고 의지가 뚜렷한 성격을 보여주었지만 반면 나태한 면도 많음을 보여주었다. 카를로스는 소년시절에 이미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판단을 받았다. 육체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한 것은 아마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자주 나타난 근친교배의 후유증이 아니겠느냐는 설명이다. 이같은 현상은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실에서 특히 심했다. 카를로스의 어머니의 어머니(외할머니)와 아버지의 아버지(친할아버지)는 남매간이었다. 또한 외할아버지와 친할머니도 남매간이었다. 그리고 두명의 증조할머니는 서로 자매간이었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근친결혼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필립2세의 아들 돈 카를로스 왕자 


1559년 스페인 왕실은 카를로스와 프랑스 왕 앙리2세(Henri II)의 딸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Elisabeth de Valois)와의 결혼을 추진하였다. 카를로스와 엘리사베스는 똑같이 14세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엘리사베스는 몇 달후 카를로스의 아버지인 필립2세와 결혼하였다. 당시 필립2세는 첫 번째 부인인 마리아 마누엘라가 세상을 떠난후 왕비가 없이 혼자 지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시 왕비를 맞아 들이지 않을수 없는 사정이었다. 당시 신부인 엘리사베스는 14세였지만 신랑 필립2세는 32세였다. 상처(喪妻)한 필립2세에게는 몇 명의 신부 후보자가 있었다. 예를 들면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프랑스 국왕 앙리2세의 또 다른 딸: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의 여동생), 필립2세의 사촌인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딸 안네(안나)등이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오스트리아의 안네 공주는 결국 나중에 필립2세의 네 번째 부인이 되었다.

 

 돈 카를로스와 약혼하였으나 아버지 필립2세와 결혼한 프랑스의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


카를로스는 어릴 때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았지만 장성하면서는 정신이 온전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리하여 아버지 필립2세는 1560년(카를로스가 15세 때)에 카를로스를 카스티야(Castile)의 다음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였으며 3년후에는 아라곤(Aragon)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였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스페인의 중심되는 자치국이었다. 당시 스페인은 중북부 유럽 저지대는 물론 드넓은 중남미 지역, 그리고 동으로는 사르디니아와 시실리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거의 절반을 통치하는 거대왕국이었다. 그러한 스페인의 중심은 역시 카스티야와 아라곤이었다. 그러므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위 계승자로 임명된다는 것은 세계를 주름잡는 전체 스페인의 군주로 임명된다는 것과 같다. 그러던중 1562년 카를로스는 예기치 않은 심한 병마로부터 시달리게 되었다. 얼마후 카를로스는 중병에서 겨우 회복되었지만 이상하게도 매우 거칠고 제멋대로의 성격이 되었다. 카를로스는 폭력적인 사람이 되었고 게다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폭음을 했다. 카를로스는 아버지 필립2세에 대하여 대단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때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생각도 했었다. 아마 아버지 필립2세가 자기와 결혼키로 되어 있었던 프랑스의 아름다운 엘리사베스 공주와 정책결혼을 했기 때문인것 같다.

 

돈 카를로스가 태어난 발라돌리드의 오늘날 시청과 광장 

 

1568년, 카를로스는 스페인으로부터, 구체적으로는 아버지의 콘트롤로부터 도피코자 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가서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 알바 공작을 쫓아내고 총독이 되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일설에 의하면 카를로스의 친구인 포사(Posa) 후작이 필립2세에게 카를로스의 계획을 밀고하여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반역이 들어난 카를로스는 도피하기 직전에 부왕인 필립2세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쉴러의 드라마와 베르디의 오페라에서는 카를로스가 성당 신부의 도움으로 성당 납골당에 있는 할아버지 카를로스5세의 석관으로 들어갔다가 석관의 비밀통로를 통해 탈출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것은 픽션일 뿐이다. 어쨌든 카를로스는 감옥에 갇힌지 얼마후에 세상을 떠났다. 소문에 의하면 독살되었다고 하지만 근거는 희박하다. 너무 몸이 약해서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때 카를로스는 23세의 청년이었다.

 

돈 카를로스의 아버지 필립2세


필립2세가 자기의 아들인 카를로스를 살해하였다는 아이디어는 그후 반(反)스페인 ‘검은 전설’(Black Legend: Leyenda Negra)의 테마가 되었다. 16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검은 전설’은 스페인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죽일만큼 잔인하며 무슨 일에나 참을성이 없고 광란적이므로 이들을 경계하고 추방해야 한다는 일종의 경각심을 던져 주는 주장을 말한다. 필립2세와 카를로스간의 불화는 잘 아는대로 프리드리히 쉴러의 희곡에 등장하며 이를 기반으로 베르디가 오페라 Don Carlos를 작곡했다. 스페인의 극작가 페드로 칼데론(Pedro Calderon)의 작품인 '인생은 꿈‘(la vida es sueno)은 자기 아들을 감옥에 가둔 폴란드의 왕에 대한 얘기이지만 필립2세가 카를로스 왕자를 감옥에 가둔 역사적 사실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이다.


 페드로 칼데론으 드라마 '인생은 꿈'의 한 장면. 마드리드의 칼데론 기념비의 부조


 

돈 카를로스는 어떤 인물인가?

죽음을 자초하였는가? 아니면 죽임을 당하였는가?

[돈 카를로스의 실체 집중 조명]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를 보면 주인공 돈 카를로를 불우한 왕자로 그려 놓았다. 오페라에서 돈 카를로는 결혼하려 했던 엘리사베스가 아버지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는 바람에 진정으로 괴로워한다. 돈 카를로는 원망스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페인령 네덜란드(플란다스)의 독립을 지지하고 그곳으로 도피코자 한다. 게다가 돈 카를로는 아버지인 필립2세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것은 반역이었다. 돈 카를로가 국왕을 살해하고 플란더스로 도피하여 독립된 국가를 통치하겠다는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결국 돈 카를로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아무 곳으로도 도피할수 없는 돈 카를로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자 한다. 그러나 세상 떠난 할아버지 카를로스5세의 혼령이 나타나 돈 카를로를 위기에서 영원히 탈출토록 해준다. 이것이 오페라 ‘돈 카를로’(이탈리아에서는 돈 카를로스를 돈 카를로라고 부른다)의 기둥 줄거리이다. 돈 카를로스는 과연 사랑과 자유를 위해 번민하고 돌파구를 찾으려 했나? 그렇지 않으면 부정한 사랑을 추구하고 조국 스페인을 배반한 허황된 이상주의자였는가? 돈 카를로의 실체를 역사적 기록으로 집중 조명해 본다.

 

  

돈 카를로스의 사랑과 죽음을 오페라로 만든 주세페 베르디와 원작 드라마를 쓴 프리드리히 쉴러

 

[엄격한 아버지]

카를로스의 아버지는 스페인 국왕 필립2세이다. 당시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의 현재의 스페인뿐만 아니라 사르디니아에서 이탈리아 반도의 거의 절반, 북으로는 지금의 네덜란드, 저 멀리 남미의 대부분, 그리고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거느리고 있었다. 필리핀이라는 명칭은 필립2세가 왕세자일 때 식민지로 삼았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필립2세는 16세 때에 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와 결혼하였다. 마리아 마누엘라는 필립2세와 같은 나이였다. 이 때 필립2세의 아버지인 카를로스5세(샤를르5세)는 결혼하는 아들 필립에게 ‘왕자라는 본분을 지켜라. 누구에게나 지나치게 엄격하지 말라. 모든 일에 친절과 관용으로 대하라. 다른 사람을 존중하라. 섹스를 즐기기 위해 결혼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종사를 잇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라고 말해주었다. 무슨 아버지가 결혼하는 아들에게 그런 소리까지 하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매사에 지나치게 차갑고 지나치게 엄격한 필립의 성격을 생각하면 카를로스5세의 훈육에도 일리가 있다. 그후 아버지 카를로스2세는 물론, 장인이 되는 포르투갈의 후안3세(Juan III)왕은 필립2세가 마리아 마누엘라를 너무 차갑게 대한다고 여러번이나 질책하였다. 결혼한지 2년후, 마리아 마누엘라는 북부 스페인의 발라돌리드(Valladolid)에서 출산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위에는 경험 있는 산파가 한명도 없었다. 대단한 난산이었다. 아기는 살았지만 엄마는 출산후 4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마누엘라는 겨우 18세였다.

 

돈 카를로스의 어머니 마리아 마누엘라. 돈 카를로스를 낳은지 4일후에 세상을 떠났다.


카를로스는 태어날 때부터 기형이었다. 마치 꼽추처럼 등이 굽었으며(hunchbacked) 가슴은 새가슴(pigeon-breasted)이었다. 어깨는 한쪽이 비뚤어 졌으며 오른쪽 다리는 왼쪽보다 상당히 짧았다. 아기는 몸뿐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발육이 늦었다. 그는 자주 아팠다. 가끔 열이 높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목소리는 마치 여자아이와 같이 높았으며 더구나 심하게 더듬었다. 태어날 때 뇌에 손상을 입었던 것 같다. 결국 자라면서 아무에게나 분별없이 대들기만 했고 어떤 때는 충동적으로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다. 따지고 보면 미친듯한 행동은 어머니 계통을 닮은 것 같다. 포르투갈 왕족들 중에는 간혹 정신적으로 미친 사람들이 있었다. 더구나 카를로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친사촌간이었다. 그런 근친간의 결혼으로 인하여 카를로스는 일반적으로 친가쪽과 외가쪽을 합하여 8명의 증조부모가 있어야 하는데 4명뿐이었고 그 중에서 두명은 자매간이었다. 그 두명은 후아나(Juana)와 카스티야(Catile)였다. 그런데 후아나는 정신이상자여서 ‘매드 후아나’(Juana the Mad)라고 불린다. 후아나(1479-1555)는 평생 토르데실라스(Tordesillas)성에 연금되어 있었다.

 

매드 후아나


어머니는 얼굴도 모른채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밤낮으로 다른 나라로 출타 중이므로 어린 카를로스는 부모의 사랑 없이 혼자 지내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성격이 점차 부끄럼을 많이 타고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지내기를 좋아했다. 카를로스의 가정교사는 신앙심이 돈독한 레오노르 데 마스카레냐스(Leonor de Mascarenas)였다. 카를로스의 아버지 필립2세의 가정교사도 역임했던 훌륭한 부인이었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가정교사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였다. 카를로스의 짧은 생애 중에서 가장 가깝게 지낸 친척은 고모인 호안나(Joanna: 1537-1573)였다. 호안나는 필립2세의 여동생으로 카를로스보다 겨우 8세 위였다. 카를로스와 호안나는 나이 차이도 많지 않아서 서로 어울려 놀기도 했다. 그러다가 1552년, 호안나는 15세의 나이로 포르투갈의 황태자와 결혼하기 위해 정들었던 스페인의 궁전을 떠났다. 포르투갈에 간 호안나는 2년후 남편이 죽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호안나에게는 16세에 낳은 아들 세바스티안(Sebastian)이 있었지만 어린 아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맡아 기르겠다고 하여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16세에 과부가 된 호안나는 매력적이고 지성적인 여인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분별있게 처리하여 칭송을 받았다. 그래서 오빠 필립2세가 장기 출타중이면 호안나가 국왕의 섭정으로서 정사(政事)를 대신하였다. 호안나는 10대에 들어선 카를로스를 돌보면서 말 잘 들으라고 당부했지만 카를로스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카를로스를 보고 호안나는 속으로 ‘엄마 없이 자란 아이야! 불쌍해!’라고 생각했다. 호안나는 포르투갈에 두고온 아들 세바스티안을 생각하며 속으로 울었다.


필립2세는 부인이 세상을 저 세상으로 보낸후 9년을 홀로 지냈다. 이제는 재혼을 해야 했다. 나라에 국모가 없으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필립2세는 영국여왕 메리(Mary)와 결혼하였다. 메리여왕이 누구인가? ‘블라디 메리’의 바로 그 메리이다. 메리의 생모는 스페인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이었고 아버지는 저 유명한 헨리8세(Henry VIII)였다. 메리는 어머니 캐서린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다. 열렬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광신적이었다. 필립2세는 종교재판이라는 수단으로 수많은 가톨릭 반대파들을 화형에 처하였다. 메리는 가톨릭을 신봉하지 않는 개신교(성공회: Anglican Church)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러한 이력의 필립2세와 메리와 결혼하게 되었으나 대단하지도 않았다. 결혼식은 1554년 런던에서 있었다. 신랑 필립2세는 신부 메리 여왕보다 11세 연하였다. 메리 여왕은 젊은 신랑을 끔찍이도 환영하였다. 그리고 여자로서 아양도 있는 대로 다 떨었다. ‘가톨릭 만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립2세는 메리와 결혼을 하긴 했지만 ‘영 아니올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여자로서 매력이 없었다. 메리는 오랜 핍박과 모욕 속에서 살아 왔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성격이 비뚤어져 있었다. 게다가 무슨 향수인지 대단히 지독한 냄새가 나는 향수를 뿌려서 근처에만 가도 두통이 날 지경이었다. 필립2세는 ‘그놈의 냄새만 나지 않아도!’라면서 얼굴을 돌렸다. 얼마후 필립2세는 할 일이 많다면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남편 필립2세가 떠난후 메리 여왕은 일을 손에 잡지 못하고 그저 남편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렸지만 필립2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필립2세는 그로부터 2년후에야 런던을 다시 방문했다. 메리가 아프다고 하므로 그래도 명색이 남편이므로 들여다보지 않을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필립2세는 두어달 동안 머물면서 마음의 병 플러스 육신의 병까지 겹친 메리 여왕을 돌보는 척했다. 1558년 메리 여왕은 최후의 심판을 받으러 돌아 올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블라디 메리라고 불리는 영국여왕 메리1세. 돈 카를로스의 의붓 어머니였다.


이렇듯 아버지마저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으므로 어린 돈 카를로스는 글자그대로 제멋대로였다. 그 누가 감히 왕자에게 ‘이것을 하면 안되고 저것을 해도 안된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어린 카를로스는 유모의 젖가슴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어서 유모들마다 가슴에 상처를 입었고 그중 세명의 유모는 거의 죽을 지경까지 된 일이 있다. 카를로스는 말을 시작하는 것이 느렸다. 5세가 되어서야 겨우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통 알아 듣기가 어려웠다. 특히 R과 L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카를로스는 7세가 되어서야 겨우 유모로부터 떼어 놓을수 있었다. 아홉 살쯤 되어서 카를로스의 성격은 점점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며 좋아했다. 하인들도 괴롭혔고 동물들도 괴롭혔다. 어느 날에는 기르는 개의 생식기를 칼로 찔러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카를로스는 고통스러워 하는 동물들을 보고 좋아했다. 아버지 필립2세가 영국의 메리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 집을 떠나 있는 동안에는 더욱 성질이 나빠졌다.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였으며 고집이 보통 아니었다. 무엇을 하고 싶으면 반드시 해야 했다. 아무도 말릴수가 없었다. 성질은 말할수 없이 거칠어졌고 그나마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아무리 타이르고 부탁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카를로스를 잠잠하게 만드는 것은 맹수를 길들이는 것 보다 어려웠다. 어느날, 어린 카를로스는 왕실 마구간에 가서 그곳에 있는 모든 말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특히 숫말의 생식기를 잘라버리는 등 참혹한 짓을 저질러서 그중 20 마리는 도무지 살지 못할 것 같아 죽여야 했다. 카를로스는 작은 동물들을 잡아 산채로 불에 태우기를 좋아했다. 특히 왕궁에서 사냥용으로 기르는 토끼 여러 마리가 불에 타서 죽었다. 어떤 날은 뱀을 발견하고 뱀의 머리를 물어뜯기도 했다. 먹는 일은 카를로스의 또 하나 대단한 취미였다. 음식만 보면 아주 게걸스럽게 먹어 댔다. 그렇게 먹다가 보니 원래는 작고 갸날픈 몸매였지만 살이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너무 지나치게 먹어 댔다.


1555년 카를로스의 할아버지인 카를로스5세(샤를르5세)는 아들 필립2세에게 공식적으로 양위하였다. 심신이 지친 카를로스5세는 스페인의 어떤 수도원에 들어가 말년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카를로스는 할아버지를 찾아가 보고 싶어 했다. 아직 열 살 밖에 안된 어린 카를로스를 말에 태워 그 먼곳까지 갔다 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말려도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갔다 온 다음날, 안내를 맡았던 사람은 병에 걸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카를로스가 11세 때인 1556년, 카를로스에 대한 혼담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카를로스의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안나(Anna: 1549-1580)가 거론되었다. 다른 후보자로서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1세, 영국의 엘리자베트1세(헨리8세와 앤 볼레인의 딸) 등이 있었다. 엘리자베트1세 영국여왕은 따지고 보면 아버지 필립2세의 부인이었던 메리 여왕의 여동생이므로 촌수로는 이모가 된다. 후보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는 심지어 아버지의 여동생, 즉 고모가 되는 호안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호안나는 포르투갈 왕자와 결혼하였으나 결혼후 2년만에 남편이 죽자 16세의 청상과부로서 친정인 스페인에 돌아와 있었다. 더구나 호안나는 조카 카를로스와 어릴 때부터 함께 놀며 지내던 사이였다. 아무리 왕실의 존속을 위해 근친결혼을 권장한다고 해도 고모와의 결혼은 너무하다고 생각하여 후보자 명단에서 제외하였다. 대신 새로운 후보자가 등장했다. 프랑스의 엘리사베트 드 발루아(Elisabeth de Valois: 1545-1568)이었다. 카를로스와 나이가 같았다. 카를로스와 엘리사베트의 결혼의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몇 년후인 1560년 카를로스의 아버지인 필립2세가 18년 연하의 엘리사베트와 결혼하였다. 카를로스는 깊은 타격을 입었다. 왜냐하면 카를로스는 예쁜 엘리사베트를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필립2세와 엘리사베트가 결혼하자 느닷없이 카를로스는 엘리사베트의 아들(의붓아들)이 되었고 카를로스로 보면 엘리사베트가 어머니(의붓어머니)가 된 셈이었다. 엘리사베트가 필립2세와 결혼한 후, 엘리사베트가 의붓아들인 카를로스와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에 의하면 그런 일은 있을수 없다는 것이었다.

 

돈 카를로스의 할아버지인 카를로스5세 (스페인왕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의 가정교사는 필립2세 국왕에게 자기로서는 도저히 카를로스를 교육 할수 없으니 사직하겠다고 청원하였다. 왕실 사람들은 ‘원래 합스부르크 혈통의 아이들은 남들보다 늦게 깨우친다’는 변명을 하면서 가정교사에게 계속 남아 있기를 당부했지만 가정교사의 뜻은 확고했다. 실제로 몇 년 지니면 카를로스의 성품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는 전보다 더 음식에 탐욕을 부리고 더 많이 술을 마셨으며 더 많은 걸 헌팅 행각에만 몰두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개과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562년, 17세의 카를로스는 대학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 잠시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대학교에 다닌 일이 있다. 카를로스 이곳에서 어떤 하인의 딸에게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날 카를로스는 마침 그 아가씨가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것을 보고 잡으려고 뛰어가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계단 부근이 어두워서 헛발을 디뎠던 것이다. 카를로스는 머리를 계단 모퉁이에 찧어 큰 상처를 입었다. 사람들이 카를로스를 발견하였을 때 그는 의식불명이었다. 사람들은 카를로스를 침대에 눕혔다. 머리에는 커다란 단독(丹毒: Erysipelas)이 생겼으며 계속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쯤 해서는 눈으로 아무것도 볼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필립2세가 급히 연락을 받고 알칼라로 달려왔다. 필립2세는 며칠 밤과 낮을 카를로스의 옆에 지켜 앉아 ‘우리 아들을 제발 살려 주세요!’라고 기도만 올렸다. 그래도 아무런 진전이 없자 의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며 무조건 불러 치료토록 했지만 그 또한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카를로스는 정신착란증을 일으킨듯 헛소리만 질렀다. 왕자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어떤 프란시스코 수도승이 1백년 전에 죽은 성디에고(St Diego)의 유해를 부등켜 안고 가져왔다. 미이라처럼 바짝 마른 성디에고의 유해는 카를로스의 옆에 놓아두었다. 그날밤 카를로스는 성디에고의 환상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와 차츰 의식을 차렸다. 그로부터 두달후, 카를로스는 거의 완전히 회복되어 걸어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전에 비하여 무언가 확실히 달랐다. 좋은 쪽으로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달라졌다. 카를로스는 발광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계단에서 넘어진 후 처음 보인 증상은 침묵과 이상할 정도로 엄숙한 것이었다. 대신에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수 없는 이상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만 했다. 얼마후에는 무언가 실수만 저지르고 난폭해 졌으며 자학적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걸핏하면 울화증을 보였고 때로는 무턱대고 화를 냈다.

1564년 봄, 카를로스의 사촌들인 루돌프(Rudolf)와 에른스트(Ernst)가 오스트리아에서 마드리드를 찾아왔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아담 폰 디트리히슈타인(Adam von Dietrichstein)을 특사로 보냈다. 특사의 임무는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카를로스와 오스트리아의 안나와의 결혼문제를 재개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대표단은 우선 스페인 궁정의 예법이 종교재판소의 규율보다 더 엄격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만큼 결혼문제를 꺼낼 기회가 없었다. 필립2세는 언제나 혼자 식사했다. 왕비와 함께 식사하는 경우는 종교축제 때 뿐이었다. 왕실 가족들은 1564년 여름을 아랑후에즈(Aranjuez)에서 보냈다. 오스트리아의 결혼사절단도 가까스로 왕실 가족들과 함께 여름 휴가에 참여할수 있었다. 마침 필립2세는 심한 열병에 걸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의 결혼 사절단은 필립2세의 여동생인 후아나와 필립2세의 아름다운 왕비인 엘리사베트와 함께 사냥을 나가서 결혼얘기를 꺼낼수 있었다. 그해 8월 오스트리아에서 온 결혼사절단은 처음으로 카를로스를 만나 함께 마드리드로 돌아오는 기회를 가졌다. 결혼 얘기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싶었다. 


그로부터 몇 년동안 스페인 궁정에서는 카를로스의 성적 기능에 대한 얘기가 돌아다녔다. 카를로스의 여자에 대한 관심은 젊은 여자들을 쫓아다니며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 전부였다. 카를로스는 매맞은 여자들의 부모에게 위로금으로 돈을 주도록 했다. 왕실 경비를 관장하는 부서의 장부를 보면 ‘저하의 명에 의해 매맞은 여자들의 아버지에게 지불한 돈’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카를로스이므로 스페인 왕실은 오스트리아의 안나와의 결혼 얘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우선 카를로스의 성기능 장애부터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카를로스의 이른바 ‘치료’에 의사, 약사, 물리치료사 등 용하다는 치료진은 모두 동원되었다. 며칠후 카를로스는 오스트리아 특사인 디트리히슈타인을 만나 테스트에 합격했음을 설명했다. 그러나 의사들은 정확하게 판정한 것도 아닌데 카를로스 왕자가 신이 나서 합격했다고 떠들고 다니니 곤란한 일이라고 말했다. 언제나 본국에 보고하기를 좋아하는 마드리드주재 프랑스 대사는 ‘아마도 스페인 왕세자는 절대로 자녀를 가질수 없을 것같다’고 보고하고 덧붙여서 ‘카를로스 왕자는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곳의 사람들은 왕자와 결혼하여 함께 사는 여자가 무척 불행하게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카를로스의 광폭한 행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주로 시종들을 공격했고 심지어 궁정의 고관들도 폭행의 대상이 되었다. 어느때는 시종 한명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기 위해 애를 쓰다가 힘에 부치니까 포기한 일도 있었다. 제화공이 카를로스의 구두를 만들어 왔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제화공으로 하여금 구두를 칼로 조각내어 가죽을 먹도록 했다. 어느 날은 추기경을 보자 갑자기 달려들어 단검을 들고 목에 대고 죽이겠다고 했다. 추기경은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알바(Alba)공작인 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Fernando Alvarez de Toledo)를 칼로 위협한 일도 있다. 공작은 카를로스가 칼을 들이대자 카를로스의 팔을 비틀어 칼을 떨어트리도록 하여 겨우 목숨을 건진 일이 있다. 알바 공작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다. 카를로스는 전부터 스페인으로부터 탈피하여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이 되고자 했다. 그러므로 당시 총독이었던 알바 공작이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여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것 같았다. 이외에도 일일이 기록할수 없는 사건들이 많았다. 카를로스의 무모한 비행을 들은 아버지 필립2세가 카를로스를 질책하고 미워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악화되었다.

 

 돈 카를로스가 증오하였던 알바 공작


1560년대에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필립2세는 반도들을 진압키로 결심했다. 카를로스는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통치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자금을 빌려 플란더스(Flanders)로 몰래 떠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더치(Dutch) 지도자들과 모종의 계약을 맺었는지도 모른다. 필립2세는 네덜란드 반도들을 진압하려는 생각을 말하지 않고 카를로스와 함께 네덜란드로 여행이나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정작 카를로스가 배에 올라타고 보니 알바 공작이 이끄는 무장병사들이 잔뜩 탑승하여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 1567년 필립2세와 결혼한 엘리사베트 왕비는 아이를 낳았다. 엘리사베트는 의붓아들인 카를로스를 이해하려고 했고 친절하게 대하여 주었다. 그러나 공주를 생산한 후부터는 카를로스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 왕비뿐만 아니라 왕궁의 모든 사람들이 카를로스보다는 새로 태어난 공주에게 관심을 두었다. 카를로스는 더욱 고독해졌다. 아버지 필립2세에 대한 카를로스의 증오심은 심화되었다.


카를로스는 독실한 가톨릭이었다. 그는 관례에 따라 고해성사를 하는중 신부에게 어떤 남자를 죽이고 싶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러나 전후사정으로 보아 그 남자가 필립2세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568년 1월 17일, 필립2세는 마드리드로 돌아와 정치 자문관들과 종교 자문관들을 소집했다. 카를로스에 대하여 더 이상 참을수 없었던 필립2세는 무슨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날밤 무장한 병사들이 침대에 누워있는 카를로스를 둘러싸고 있었다. 갑지가 문이 열리고 횃불 든 사람들이 보였다. 그 가운데에는 필립2세가 자문관과 고해신부와 함께 서 있었다. 카를로스는 아버지 필립2세 앞에 무릎을 꿇고 제발 당장 죽여 달라고 애걸했다. 필립2세가 묵묵부답이자 카를로스는 몸을 날려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로 뛰어 들려고 했다. 필립2세는 ‘네가 스스로 죽는다면 그것은 미친자의 짓일뿐이다’라고 차갑게 말했다. 카를로스는 울면서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절망하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고모인 후아나 공주와 의붓어머니인 엘리사베트 왕비가 달려와 마치 카를로스를 변호라도 하듯 막아섰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카를로스는 아레발로(Arevalo)성탑에 감금되었다. 이곳은 그의 외조모인 포르투갈의 이사벨라가 마지막 생을 마감한 곳이었다. 컴컴한 방이었다. 유일한 빛은 높은 곳에 있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 빛 뿐이었다. 

 

마드리드 교외의 아레발로 성탑. 돈 카를로스가 갇혀 있던 곳. 

 

이후 궁정에서든지 어느 곳이든지 카를로스에 대한 얘기를 하거나 그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필립2세는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어 ‘카를로스 왕자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토록 심하고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카를로스는 장차 군주로서 국가를 통치할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그에게 왕위를 계승토록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필립2세가 숙모인 포르투갈의 캐서린 왕비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카를로스를 어쩔수 없이 감금할 수밖에 없었다. 카를로스가 아버지이며 군주인 나를 존경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를 광폭한 행동을 응징하고 질책하기 위해 감금한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과 백성에 대한 나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두운 감방에 갇힌 카를로스는 단식으로서 저항하였다. 필립2세는 그런 카를로스에게 강제로라도 음식을 먹이도록 했다. 그러자 카를로스는 주변에 있는 무엇이든지 입에 넣고 삼키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끼고 있던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삼켰다. 카를로스의 행동은 점점 더 종잡을수 없게 되었다. 얼마후 카를로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카를로스는 어떠한 변호도 하지 못하도록 했다. 1568년 7월 9일, 재판관들은 카를로스를 반역죄로 판결했다. 국왕인 필립2세를 살해하고 플란더스의 군주가 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이었다. 반역죄의 처벌은 사형이었다. 필립2세는 자기 손으로 아들을 처형하고 싶지 않았다. 필립2세는 카를로스가 신체적으로 쇠약해 있고 음식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얼마후에는 죽을 것이니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후 필립2세는 며칠 동안 방안에 홀로 앉아 아무 말도 없이 우울하게 보내며 깊은 번민에 싸여 있었다고 한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의 한 장면. 돈 카를로스의 친구인 로드리고가 엘리사베트(오른쪽)에게 카를로스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영국국립오페라 공연) 


한편, 감옥에 갇힌 카를로스는 고열에 시달리며 계속 구토만 하였다. 카를로스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카를로스는 너무나 견디기 어려워 차가운 물을 감옥 바닥에 붓고 그위에 옷을 벗은채 누으려고 했다. 간수들이 멀리 가서 눈을 구하여 큰 통에 담아 가져왔다. 열은 가까스로 내렸다. 카를로스는 며칠 동안 과일만 먹었다. 그런후에 그는 파스트리(pastry: 밀가루로 만든 구운 음식)를 달라고 했다. 엄청나게 큰 파이를 만들어 주었다. 카를로스는 파이를 게걸스럽게 먹고 물도 한 대접이나 마셨다. 음식을 먹고 나서부터는 또 다시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신부가 불려왔다. 마지막 병자성사(病者聖事)를 치루기 위해서였다. 카를로스는 신부에게 뱃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냈다. 마침내 1568년 7월 24일, 카를로스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일설에 의하면 아버지 필립2세가 카를로스를 더 이상 두고 볼수 없기 때문에 독약을 먹도록 했다고 한다. 카를로스의 시종장인 루이 고메즈(Ruy Gomez)가 수프에 독약을 섞어 먹도록 했다고 한다. 카를로스는 22세였다.

 

 오페라 돈 카를로의 한 장면. 돈 카를로스가 아버지 필립2세(오른쪽)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스페인 왕실은 왕세자인 돈 카를로스가 ‘무절제한 과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엘리사베트 왕비는 너무나 슬프고 비통하여 밤낮으로 음식을 들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이를 본 필립2세는 왕비에게 울지 말것을 지시했다. 그 때 엘리사베트 왕비는 임신 7개월이었다. 10월초, 엘리사베트 왕비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계속 하혈을 하였고 결국 미숙아를 출산하였다. 출산 직후 아기와 엄마(엘리사베트)는 거의 동시에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2년후, 필립2세는 종사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안나 공주(대공비)와 결혼하였다. 카를로스와 결혼설이 무르 익었던 그 안나였다. 필립2세는 안나의 삼촌이었다. 또 한번의 근친결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결과 거의 1백년이 지난후인 1661년, 제2의 돈 카를로스와 같은 괴물 왕세자가 나타났다. 카를로스2세(Carlos II)였다.

 

제2의 돈 카를로스라고 하는 카를로스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