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30년 전쟁 집중조명

30년 전쟁의 모든 것

정준극 2008. 2. 26. 09:45

30년 전쟁의 모든 것

The Thirty Years' War: 30 Jährige Krieg


[막대한 피해]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동안 오늘날 독일 영토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쟁이다. 처음에는 신성로마제국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분규로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종교와는 관계없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이럴 때 영토나 넓히자는 등 한 몫하자는 생각으로 군대를 동원한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규모는 유럽을 휩쓰는 전쟁으로 확산되었지만 결국은 라이발 관계에 있는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간의 해묵은 헤게모니 주도전쟁으로 집약되는 전쟁이었다. 결과는? 프랑스가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당연히 프랑스의 정치적 영향력이 대폭 강화되었고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30년 전쟁에는 용병들이 대폭 동원되었다. 용병들에게 급여를 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라마다그만큼 재정적으로 막대한 부담이 되는 전쟁이었다. 그런데 용병들이 그러면 안되는데 이들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러다보니 유럽의 많은 지역들이 용병들 때문에 거의 황폐되었으며 여기에 기근과 질병으로 수많은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었다. 특히 독일을 비롯한 저지대 국가들(네덜란드 등)과 이탈리아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아무튼 30년 전쟁으로 인하여 유럽 대륙의 여러 군소국가들은 국가재정이 파산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말이 30년 전쟁이지 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 동안 후유증 등등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돌이켜 보건대 공식적으로 보면 30년 전쟁은 프라하의 창문던지기(Fenstersturz von Prag: 1618. 5. 23)로 시작하여 베스트팔리아조약(Westphalia Treaty: Westfälischen Frieden: 1648. 10. 24)의 한 파트인 뮌스터조약(Treaty of Muenster)으로 막을 내렸다. 시작은 단순하였으나 끝은 복잡하였다.

 

30년 전쟁의 발단이 된 1618년 5월 프라하에서의 '창문 내던지기'.


30년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인구의 손실이었다. 독일의 경우에는 인구가 30%나 감소되었다. 남자만 본다면 독일에서는 전체 남자의 거의 절반이 죽었다. 발트해에 면한 북부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지역이 가장 심한 피해를 보았다. 전체 인구의 거의 절반이 사라졌다. 조그만 나라에서는 인구의 거의 3분의 2가 희생된 케이스도 적지 않았다. 독일 다음으로 많은 피해를 본 국가는 보헤미아(체코)였다. 전쟁에 동원된 용병들 중 스웨덴의 용병들이 가장 지독하여서 독일에서만 2천개의 성을 파괴했고 1만 8천개의 마을과 1천5백개의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전체 독일 마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스웨덴의 용병들은 실제로는 스웨덴이 모집한 스코틀랜드 병사들이었다. 

 

30년 전쟁의 한 장면

 

[개신교와 가톨릭의 분규가 발단]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가톨릭을 버리고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로마가톨릭이 개신교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이후 30년 전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도 개신교(루터주의)와 가톨릭의 분규는 20여년이나 지속되었던 것은 눈여겨 볼 사항이다. 이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로스5세(샤를르5세)는 독일에서 루터주의자들과 가톨릭간의 폭력적인 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Augusburg)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 225명에 이르는 독일 각국의 군주들은 각기 자기 영토에서 양심에 따라 종교를 선택할수 있다. [이를 Cuius regio, eius religio(政敎일체의 원칙)이라고 한다.]

- 루터주의자들은 비록 추기경이 관할하는 가톨릭 국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그들만의 신앙을 가질수 있다.

- 원래 가톨릭교회의 소유지였으나 루터주의자들이 투쟁으로  차지한 지역은 루터주의자들이 계속 차지할수 있다.

-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로서 나중에 개신교(루터주의)로 개종한 자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영토를 포기해야 한다.

- 가톨릭이든지 개신교든지 국가가 공식적으로 종교를 정하였으면 백성들은 국가가 정한 종교를 따라야 한다. 


비록 종교로 인한 반목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이 만들어졌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수 없었다. 한편, 스위스에서 시작한 칼빈주의(Calvinism)는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이 맺어지기 전부터 독일로 번지고 있었다. 실제로 칼빈주의는 유럽에서 가톨릭, 루터주의에 이어 제3의 종파가 되었다. 하지만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은 칼빈주의에 대하여 아무런 내용도 언급하지 않았고 오직 가톨릭과 루터주의만 언급되어 있었다.

 

30년 전쟁의 한 장면
                               

독일은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개신교로 방향을 바꾼 나라였다. 그러나 30년 전쟁의 원인이 종교개혁 때문이라고 보아 독일을 중심으로한 국가들의 종교문제로만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주변 국가들도 30년 전쟁이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스페인은 오래전부터 독일의 정세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독일의 서쪽 저지대에는 스페인령 더치(Spanish Dutch)가 있어서 껄끄러운 입장이었다. 스페인과 형제국가라고 할수 있는 이탈리아 북부에 대하여도 독일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북부지역은 이른바 스페인 로드(Spanish Road)가 통하는 요충지였다. 그러던 차에 1560년대에 스페인령 더치(Dutch)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스페인과 더치의 전쟁이 벌어졌고 휴전이 성립된 것은 30년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몇 년전이었다.

- 프랑스에게는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과 그 연결선상에 있는 스페인이 위협적인 대상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는 독일 국가중에서 비교적 약세의 국가들을 프랑스로 끌어들이려는 욕심이 있었다. 철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개신교와의 전쟁에 참여한 것은 영토를 둘러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 스웨덴과 덴마크는 발트 해(Baltic Sea)에 면하여 있는 북부 독일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였다.

 

30년 전쟁의 한 장면
                               

[신성로마제국의 실체]

신성로마제국은 여러 독립된 나라들의 연합이다. 그러므로 일견 허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구성원 중에는 막강한 세력을 지닌 존재들도 있어서 무시할수 없는 실정이다. 신성로마제국의 가장 핵심은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보헤미아 포함)였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합하여 8백만명이 넘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세력이었다. 바바리아, 작소니 선제후국, 브란덴부르크, 팔라틴(Palatinate), 헤쎄(Hesse), 트리어(Trier) 추기경국, 뷔르템부르크도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으로서 만만치 않은 세력들이었다. 이밖에도 신성로마제국에는 수많은 소공국들, 자유시들, 독립적인 운영을 하는 수도원들, 추기경의 관할로 되어 있는 영토들, 소영주들(대체로 작은 마을에 불과한 경우가 많음)이 있어서 신성로마제국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바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는 국가로서의 독자적인 외교정치를 할 여건이 되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 소공국들은 생존을 위해 결혼정책으로 서로 인척관계를 맺어 연합하였지만 영토를 아들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이 많아 영토가 계속 분할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30년 전쟁의 장본인인 페르디난트2세(1578-1637).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의 재위 기간은 1619-1637.

                           

[쾰른 전쟁]

16세기 중반에 들어서서 종교로 인한 긴장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톨릭 추기경들 중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원래 추기경으로서 가지고 있던 영지를 포기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긴장이 더했다. 스페인과 동유럽의 일부 가톨릭 군주들은 자기들의 영토에서 개신교가 활발해지자 위기감을 느끼고 가톨릭을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같은 사실은 쾰른전쟁(Cologne War: 1582-83)으로 분명해졌다. 쾰른전쟁은 쾰른을 통치하던 추기경이 칼빈주의로 개종하는 바람에 가톨릭과 분규가 일어나 벌어진 전쟁이었다. 쾰른 추기경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수 있는 선거후(選擧候)였다. 지금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후들은 가톨릭 일색이었다. 만일 쾰른의 추기경을 모델로하여 일부 선거후들이 개신교로 개종하면 신성로마제국의 앞날에 난관이 아닐수 없었다.


스페인은 쾰른전쟁에서 추기경을 몰아내고 로마 가톨릭인 바바리아의 에른스트(Ernst)를 추기경으로 앉혔다. 가톨릭은 쾰른에서 성공적으로 개신교를 억누르자 이제야 제대로의 페이스를 회복하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이후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에 의한 ‘정교일체의 원칙’은 바바리아, 뷔르츠부르크(W?rzburg) 등에서 더욱 철저하게 지켜졌다. 이렇게 되자 이 국가들의 루터주의자들은 가톨릭으로 다시 개종을 하든지 또는 추방당해야 했다. 루터주의자들에게는 칼빈주의자들도 대적할 상대였다. 루터주의자들은 가톨릭으로부터 루터주의로 개종했던 팔라틴(Palatinate), 나싸우(Nassau), 헤쎄-카쎌(Hesse-Kassel),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의 군주들이 이번에는 칼빈주의로 개종하는 것을 보고 더욱 의기소침해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17세기에 들어서서는 라인지역 국가들과 다뉴브 남부지역 국가들은 대체로 가톨릭이었고 북유럽에서는 루터주의가 활기를 띠고 있었으며 중서부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등지에서는 칼빈주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타 영주국이나 도시국가들에서는 칼빈파, 가톨릭, 루터파의 형세가 균등하였다.

 

30년 전쟁의 하일라이트 중의 하나였던 바우첸(Bautzen)의 공성과 파괴. 바우첸은 독일 동부, 체코와의 접경지대에 있는 성읍이다.

                                                            

[카를로스5세 이후]

합스부르크 왕실과 스페인 왕실은 말하자면 서로 사촌간이다. 두 왕실은 기본적으로 가톨릭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 국왕 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로스5세(샤를르5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1세를 위시해서 그 이후의 막시밀리안2세, 그리고 루돌프2세등 합스부르크의 군주들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는데 좋은게 좋은거 아니냐'면서 개신교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시 말하여 페르디난트1세 등은 제국의 영토에서 서로 다른 입장의 기독교가 전파되는 것을 강제로 막지 않았다. 그러자 정교일제(政敎一體)를 추구하던 일부 가톨릭 국가들은 분통을 터트리게 되었다. 특히 골수 가톨릭인 스페인으로서는 당황스런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강력한 루터파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나라에서 개신교를 추종할 의지가 있는 나라가 보이면 그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물론 스웨덴이나 덴마크로서는 개신교를 지원한다는 명목아래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루돌프2세 (1552-1612).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의 재위 기간은 1576-1612.

                             

[도나우뵈르트 폭동]

1606년 독일의 자유도시인 도나우뵈르트(Donauwoerth)에서 종교문제로 인한 폭동이 일어났다. 루터파들이 가톨릭의 가두 종교행진을 막았기 때문에 생긴 사건이었다. 폭동이 격심해지자 인접 바바리아의 가톨릭 군주인 막시밀리안 공작이 군대를 이끌고 나서서 폭동을 진정시켰다. 이렇듯 가톨릭이 강세로 나오자 아직 독일에서 소수에 불과한 칼빈파는 자기들에게도 핍박이 오지 않을까하여 걱정이 많았다. 1608년 독일의 칼빈파들은 ‘우리도 뭉치자!’라며 복음주의연맹(League of Evangelical Union)을 구성하였다. 리더는 팔라틴(Palatine) 선거후인 프레데릭4세(Frederick IV: 1583-1610)였다. 훗날 프레데릭4세의 아들인 프레데릭5세는 개신교인 영국 제임스1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Elizabeth Stuart)와 결혼하였다. 프레데릭4세는 라인연안 팔라틴(Rheinish Palatinate)도 통치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스페인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므로 스페인으로서는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 공작이 팔라틴을 진압한 것을 내심 기뻐하였다. 한편, 개신교인 칼빈파들이 연맹을 만들어 단합을 과시하자 가톨릭은 ‘어라? 논다, 놀아!’라면서 1609년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 공작을 리더로하여 가톨릭연맹(Catholic League)을 구성하였다.

 

30년 전쟁으로 인하여 무고한 농민들의 희생이 컸다.

                                                   

[페르디난트3세의 등장]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때에 1619년 신성로마제국의 마티아스(Matthias)황제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가장 가까운 친척인 사촌 페르디난트가 페르디난트3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 영토와 직위를 승계 받았다. 페르디난트는 오늘날 북부 오스트리아에 있었던 슈티리아(Styria)의 군주였다. 페르디난트3세는 마티아스의 뒤를 이어 보헤미아의 왕으로도 올랐다. 페르디난트는 예수회(Jesuits)에서 교육을 받은 골수 가톨릭이었다. 그는 자기의 영토, 즉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지역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모두 가톨릭이기를 원했다. 보헤미아의 개신교들이 거부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1617년 가톨릭인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의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를 반대해 왔었다. 보헤미아의 다음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페르디난트는 이듬해인 1618년 정식으로 보헤미아 왕에 오르기 전이지만 미리 보헤미아의 정무를 콘트롤하기 위해 두명의 최측근 귀족들을 프라하로 보냈다. 페르디난트를 반대하는 보헤미아의 개신교 귀족들은 이 두명의 페르디난트 측근들을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며 쫓아내기 위해 프라하의 궁전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이것이 유명한 ‘프라하 창문 밖 던지기 사건’(Defenestration in Prague)으로 유럽을 황폐화시킨 3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30년 전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4단계로 구분된다. (1) 보헤미아의 봉기 (2) 덴마크의 관여 (3) 스웨덴의 관여 (4) 프랑스의 관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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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을 마무리하는 뮌스터조약. 184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