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30년 전쟁 집중조명

[보헤미아의 봉기] 1618-1625

정준극 2008. 2. 26. 09:54

[보헤미아의 봉기] 1618-1625


[흐라드카니 궁전 창밖 던지기 사건]

슈티리아(Styria)의 페르디난트 대공은 보헤미아의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을 때부터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이 자기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보헤미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개신교 나라들은 팔라틴 선거후(選擧候)인 프레데릭5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고 나아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면 개신교의 자유가 최대한으로 보장될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프레데릭5세는 몇 년전 복음주의연맹의 리더로 활약하다가 세상을 떠난 프레데릭4세의 아들이었다. 보헤미아의 개신교도(주로 종교개혁자 Jan Huss파)들은 몇 년전 루돌프2세 황제가 약속한 종교자유권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죽음으로 투쟁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보헤미아의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계승 영순위인 페르디난트는 그런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의 개신교 리더들을 미리 제압하기 위해 두명의 최측근을 보헤미아에 보내어 국왕으로 대관식을 가질 때까지 인수위원회를 운영하여 말썽을 부릴만한 인물들은 미리 축출토록 하였다. 두명의 측근 이름을 굳이 나열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역사적인 사항이므로 언급해보면 빌렘 슬라바타(Vilem Slavata)와 야로슬라브 보르치타(Jaroslav Borzita)이었다. 페르디난트의 지시를 받은 이들은 마치 점령군 사령관처럼 어깨에 힘을 주고 프라하의 흐라드카니(Hradcany: 명료하다는 뜻) 궁전으로 들이닥쳤다. 미리부터 궁전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후쓰파 보헤미아 귀족들은 ‘오라! 네 놈들이 바로 그놈들이구나!’라면서 이들을 붙잡아 갑자기 자기들 편의대로의 재판을 거친후 두 사람을 창문을 통해 10여미터 아래의 바닥으로 내던졌다. 1618년 5월 23일의 일이었다. 이를 펜스터슈투르츠(Fenstersturz)라고 부른다.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는 뜻이다. 신의 은총 때문이었는지, 또는 잘 먹고 잘 지내서 비대했기 때문이었는지 하여튼 두 사람은 땅바닥에 떨어졌지만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가톨릭은 한술 더떠서 천사들이 나타나 두 사람을 안전하게 내려놓았다고 적어 놓았다. 반면, 개신교 기록에는 이들이 비록 냄새는 나지만 창문 아래에 있는 거름더미에 떨어져서 상처를 입지않고 목숨을 걸질수 있었다고 적혀 있다.

 

프라하의 흐라드카니궁전. 30년 전쟁의 첫 단계인 '창문 밖으로 던지기'가 일어난 곳.
 

[북유럽 개신교 국가들의 간여]

‘프하라 창 밖 던지기 사건’(Fenstersturz von Prag)은 보헤미아의 봉기에 불을 당겨준 것이었다. 자기들의 실력을 한껏 과시한 보헤미아의 개신교 귀족들은 곧이어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는 거의 폭동적인 봉기를 주도하였다. 시위자들은 가톨릭교회를 공격하고 가톨릭 성직자들을 핍박하였으며 가톨릭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재산을 이제는 개신교가 된 교회에게 돌려 줄것을 요구하였다. 종교자유를 위한 이같은 보헤미아의 봉기는 인근 실레지아(Silesia), 루사티아(Lusatia), 모라비아(Moravia)까지 확대되었다. 모라비아에서는 이미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분규가 시작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라하에서의 후원에 힘입어 더욱 열심히 가톨릭을 핍박하였다. 그런데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규는 보헤미아와 인근 지역에서의 종교 분규로 국한될줄 알았는데 갑자기 프랑스와 스웨덴 등이 무슨 의협심이 그리도 많다고 보헤미아 등지의 분규에 참여하자 이들 지역에서의 분규는 정신없이 확산되었다. 만일 개신교와 가톨릭간의 분규가 보헤미아에 한정되었다면 30년이 아니라 30일 만에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 개신교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유럽 개신교 지도자들은 신성로마제국의 마티아스 황제가 죽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보다 대담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독일에서까지 개신교들이 가톨릭에 반기를 들자 바야흐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페르디난트3세는 같은 합스부르크 일가인 스페인의 필립4세에게 SOS를 쳤다. 한편, 보헤미아 개신교들은 신임 보헤미아 왕 페르디난트에 대한 반대운동이 생각대로 진전되지 않자 괴로운 지경이 되었다. 보헤미아의 개신교 주도자들은 비록 보헤미아가 서유럽에 속하지는 않지만 서 유럽개신교 연합(Protestant Union)에 합류하여 도움을 받게 되기를 원했다. 서유럽의 개신교연합은 보헤미아 왕위 후보로 올랐던 칼빈파인 팔라틴 선거후 프레데릭5세가 리더로 있는 기구이다. 보헤미아의 개신교 대표들은 팔라틴 선거후 프레데릭5세에게 보헤미아의 왕으로 옹립하겠으니 개신교연맹에 들어가도록 해주고 보헤미아의 개신교를 보호해 달라는 제안을 하였다. 그런데 보헤미아의 다른쪽 개신교들이 똑같은 제안을 작소니 선거후인 사보이공작과 트란실바니아 공자에게도 하였다. 첩보활동에 있어서는 한마당하는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에서 외부로 나가는 서한들을 가로채어 보헤미아가 양다리, 세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합스부르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이들 나라들은 보헤미아에 대한 관심을 접어두지지 않을수 없었다.

 

 프라하 흐라드카니궁전에서 페르디난트 측근들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장면


[사블라트 전투]

동유럽 보헤미아의 인접국들은 기본적으로 보헤미아의 봉기에 호의적이었다. 주로 루터파 또는 칼빈파인 상부 오스트리아의 제후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자 하부 오스트리아의 제후들도 동참하였다. 열성파인 투른(Thurn) 백작은 군대를 이끌고 비엔나 성벽까지 진군하여 페르디난트 신임 보헤미아 왕의 항복을 받아낼 요량이었다. 동부에서는 개신교인 트란실바니아 공자가 정예군대를 이끌고 오토만 술탄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로 진격하였다. 큰일 났다고 생각한 페르디난트 황제(신성로마제국 황제 겸직)는 부코이(Buquoy)백작을 사령관으로 삼아 보헤미아의 공격에 대비토록 했다. 부코이 백작은 용맹을 떨쳐 1619년 6월 사블라트(Sablat)전투에서 만스펠트(Ernst von Mansfeld: 1580-1626)백작이 이끄는 개신교연합군을 격파했다. 이렇게 되자 남부 오스트리아의 투른 백작은 프라하와의 연락이 끊어져 어쩔수 없이 비엔나 공성을 풀고 퇴각하였다. 개신교연맹은 사블라트 전투로 인하여 중요한 동맹이던 사보이를 잃는 손해를 보았다. 사보이는 오래동안 합스부르크의 팽창에 거부반응을 보였었다. 사보이는 개신교에게 이미 상당량의 군자금을 지원하였고 라인란트(Rhineland) 수비요새에 비밀리에 군대까지 파견한바 있다. 그러나 어느날 가톨릭 군대가 운좋게도 개신교 사령관인 만스펠트의 측근들을 체포하게 되었고 이들을 통해 사보이가 개신교를 은밀히 지원한다는 사실이 발각되자 아직도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인 사보이는 전쟁에서 손을 떼지 않을수 없었다.

 

비엔나주재 프랑스대사 드 라 게바라

 

[팔라틴의 프레데릭5세]

투린백작의 군대는 비록 개신교 군대가 사블라트 전투에서 패전하여 그 여파로 비엔나를 공성(攻城)을 풀고 군대를 철수하였지만 병력은 언제라도 동원할수 있었다. 한편, 사블라트 전투에서 패전한 만스펠트백작은 보헤미아 북부에 재집결하여 군대를 정비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아직도 봉기가 가라앉지 않은 상부 오스트리아(Upper Austria)와 하부 오스트리아(Lower Austria)가 보헤미아와 동맹을 맺고 가톨릭에 본격 항거할 것을 약속하였다. 기세를 얻은 보헤미아의 개신교 귀족들은 1619년 8월 보헤미아 의회를 열어 공식적으로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왕에서 해임하고 대신 팔라틴 선거후인 프레데릭5세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하였다. 한편, 헝가리에서는 트란실바니아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군대와 열심히 싸워서 연전연승을 기록하였고 결국 1620년 헝가리에서 제국의 군대를 몰아 내는데 성공하였다.

 

팔라틴선거후 프레데릭5세 

 

[빌라 호라 전투]

스페인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황제를 지원하기 위해 암브로시오 스피놀라(Ambrosio Spinola)를 사령관으로 하여 브뤼셀에 있는 군대를 오스트리아로 파견하였다. 그러는 한편, 비엔나주재 스페인 대사 이니고 벨레즈 데 게바라(Inigo Velez de Guevara: 1566-1644)는 개신교인 작소니 공국을 설득하여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위치한 루사티아(Lusatia: Lausitz)의 통치권을 주겠으니 보헤미아에 대한 제재를 부탁하였다. 솔깃한 작소니가 보헤미아를 침공하였고 이를 스페인 군대가 측면 지원하여 개신교연맹군의 공격을 차단하였다. 나아가 스페인대사는 바바리아 공작에게 팔라틴이 보유하고 있는 선거후 타이틀을 주겠다고 하고 가톨릭연맹에 합세할 것을 제안하였다. 틸리(Tilly)백작 요한 체르클래스(Johann Tserclaes)가 이끄는 가톨릭연맹군은 상부 오스트리아를 진압했고 황제의 군대는 하부 오스트리아를 진정시켰다. 틸리 장군의 가톨릭연맹군에 르네 데카르트(Rene Decartes)가 참모로 참전한 것은 특기사항이었다. 틸리 장군의 가톨릭연맹군과 페르디난트 황제의 군대는 연합하여 보헤미아로 진군하였다. 1620년 11월, 페르디난트2세의 군대는 프라하부근 빌라 호라 전투(Bila hora: Battle of While Mountain: 화이트 마운틴 전투)에서 새로 보헤미아 왕에 옹립된 프레데릭5세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로부터 보헤미아는 그동안 잘못했다고 빌고 원래대로 가톨릭국가로 남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3백년동안 합스부르크의 발아래에서 굽실거리게 되었다. 화이트 마운틴 전투에서의 패배는 결과적으로 복음주의연맹의 와해를 가져왔고 이와 함께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던 프레데릭5세를 몰아내는 것이 되었다. 프레데릭5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 버림을 받아 라인강 연안의 팔라틴 영토를 잃게 되었고 다만 가톨릭 귀족으로서 남아 쓸쓸하게 지냈다. 프레데릭5세가 가지고 있던 팔라틴 선거후라는 타이틀은 스페인의 약속대로 프레데릭5세의 먼 사촌인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주어졌다. 영지를 잃고 추방자 신세가 된 프레데릭5세는 와신상담을 외치며 은밀하게 개신교인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빌라 호라전투의 여러 장면

 

[트란실바니아 공자]

아무튼 보헤미아에서 개신교들이 패배하였음은 서유럽 개신교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보헤미아에서는 개신교들의 봉기가 와해되자 개신교 재산의 몰수와 함께 보헤미아 귀족들에 대한 탄압이 잇따랐다.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앞으로 가톨릭편에 설 것이며 후쓰파와 같은 개신교에는 절대로 동조하지 않겠다는 굴욕적인 서약을 해야 했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프레데릭5세가 통치했던 라인강 연안 팔라틴 영토는 스페인이 차지했다. 그리하여 동유럽에서 솟아올랐던 30년전쟁의 제1단계는 1621년 12월 트란실바니나 공자(Gabriel Bethlen: 1580-1629)와 페르디난트3세 황제가 모라비아의 니콜스부르크(Nikolsburg)에서 평화조약에 서명함으로서 막을 내렸다. 보헤미아는 빌라 호라(화이트 마운틴) 전투에서의 돌이킬수 없는 패배와 트란실바니아 공자의 퇴장으로 원위치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라틴에서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팔라틴에서는 비록 소규모 전투에 지나지 않았지만 프레데릭5세를 추종하는 지역들이 스페인에 저항하여 스페인의 공성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만하임(Mannheim)과 하이델베르크(Heidelberg)가 1622에 함락되고 프랑켄탈(Frankenthal)이 1644년에 함락됨으로서 팔라틴의 저항도 평정되어 결국 팔라틴은 스페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1621-26년의 기간을 30년 전쟁으로부터 별개로 보고 이를 ‘팔라틴 단계’(Palatinate Phase)라고 불렀다.

 

트란실바니아 군주 가브리엘 베틀렌 


[만스펠트 장군]

만스펠트 장군과 브룬스위크의 크리스티안(Christian)은 개신교연맹의 잔여병력을 이끌고 홀란드(Dutch)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더치(Dutch)는 이들에게 영원한 피난처를 제공할수 없었다. 만스펠트는 홀란드에 남아있게 되었지만 크리스티안은 만스펠트가 자기를 지원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홀란드를 떠나 작소니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톨릭연맹군의 틸리 장군이 크리스티안 군대의 작소니행을 알고 이를 추격하였다. 크리스티안의 군대가 무사히 더치 국경에 이르렀을 때 이미 기다리고 있던 틸리의 정예병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전투를 1623년의 슈타트론(Stadtlohn)전투라고 부른다. 틸리 백작의 정예병들은 힘없는 크리스티안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크리스티안 군대의 5분의 4에 해당하는 약 1만5천명이 전멸 당했다. 한편, 팔라틴의 프레데릭5세는 흘러 흘러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머물게 되었다. 프레데릭5세의 장인이 되는 영국의 제임스1세는 사위인 그에게 ‘자넨 맨날 밥만 먹고 전쟁 생각만 하는가? 이제 제발 전쟁을 끝내라!’고 종용하는 바람에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희망을 포기했다. 이로써 개신교 봉기는 완전히 분쇄되었다.

 

에른스트 폰 만스펠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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