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30년 전쟁 집중조명

[프랑스의 관여] 1636-1648

정준극 2008. 2. 26. 10:06

[프랑스의 관여] 1636-1648


[리슐르 재상의 선택]

프랑스는 철저 가톨릭 국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신성로마제국 및 스페인과 한치도 양보할수 없는 라이벌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프랑스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개신교 측을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 들었다. 배경은 이러했다. 루이13세의 재상(宰相) 리슐르(Richelieu)추기경은 합스부르크가 아직도 너무 강력하다고 생각했다. 합스부르크가 프랑스로부터 동부에 있는 지역의 거의 모두를 차지하며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고 프랑스로부터 북부에 있는 저지대의 네덜란드까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재상 리슐르는 자신이 가톨릭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와 동맹을 맺어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에 대항키로 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는 더치(Dutch) 및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다.

 

 루이13세 시대의 재상 리슐르 추기경


[마자랭의 등장]

프랑스가 그렇게 나오자 위협을 느낀 스페인이 먼저 프랑스를 공략하였다. 1636년 신성로마제국의 요한 폰 베르트(Johann von Werth) 장군과 스페인의 페르디난트 합스부르크(Ferdinand Habsburg) 추기경이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여 샴파뉴(Champagne)와 버건디(Burgundy) 지방을 유린하고 내친김에 파리까지 위협하였다. 그러자 작센-봐이마르(Saxe-Weimar) 공국의 용감한 베른하르트(Bernhard: 베르나르: Bernard) 장군이 콩피에뉴(Compiegne) 전투에서 가톨릭 연합군을 프랑스 국경밖으로 몰아냈다. 이후 양측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전면전을 펼치며 승부를 가렸으나 양측에 피해만 주었을 뿐 승자는 없었다. 1642년, 전쟁을 물심양면에서 지원하던 리슐르 재상이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1년후에는 전쟁을 주도한 루이13세도 세상을 떠났다. 다섯 살의 루이14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루이14세의 재상인 마자랭(Mazarin) 추기경은 전쟁이 지겨워서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작센-봐이마르 공국의 베른하르트(베르나르) 공작 


[최후의 렌 전투]

한편에서는 평화협상이 추진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아직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645년, 스웨덴의 렌나르트 토르텐슨(Lennart Torstensson) 원수가 이끄는 군대가 프라하 부근의 얀카우(Jankau) 전투에서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부르봉 왕가의 루이2세(Louis II de Bourbon)는 제2차 뇌르딩겐 전투에서 바라리아 군대를 물리쳤다. 30년 전쟁의 마지막 가톨릭 사령관인 프란츠 폰 메르시(Franz von Mercy) 남작은 제2차 뇌르딩겐 전투에서 전사했다. 1647년 3월, 바바리아, 쾰른, 프랑스, 스웨덴의 4자는 울름(Ulm)에서 휴전조약에 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계속되었다. 이듬해인 1648년, 스웨덴과 프랑스 연합군은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를 추스마르스하우젠(Zusmarshausen)과 렌(Lens) 전투에서 대파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한 합스부르크의 지역에 한정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한편, 스페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스페인은 일찍이 1643년, 프랑스 부르봉의 루이2세 장군에게 대패하여 이후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도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었다. 

 

뮌스터에서의 베스트팔리아 조약(Westfalischer Friede in Munster)

                                     

[베스트팔리아 조약]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은 보헤미아 봉기 이후 덴마크 및 스웨덴의 군대를 제압했던 것과는 달리 프랑스와의 한판 승부에서 패배하여 평화협상을 추진하지 않을수 없었다. 전쟁 당사국들인 페르디난트3세의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스페인, 더치, 스위스, 스웨덴, 포르투갈, 그리고 교황청 대표가 협상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저 유명한 1648년의 베스트팔리아(Westphalia) 평화조약이다. 

 

승리 뒤에는 수많은 인명의 죽음이 있었다.


아우구스부르크 칙령에 의거, 모든 나라들은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3세는 이 규정을 위반하고 제국에 속하여 있는 나라에서 개신교 신봉을 반대하였다. 페르디난트3세는 베스트팔리아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 헌법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의 모든 권한이 박탈당했다. 이로써 독일 국가들은 자기들의 영토에서 종교를 다시한번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게 되었다. 이는 정교일체(政敎一體)의 원칙, 즉 cuius regio, eius religio에 따른 것이다. 베스트팔리아조약에 따라 개신교와 가톨릭은 동등한 위치를 갖는 것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칼빈주의도 법적인 인정을 받았다.   


[조약의 내용]

역사적인 베스트팔리아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의 정신에 따라 모든 군주들은 자기 영토에서 개신교이든, 가톨릭이든, 칼빈주의이든 종교를 선택할 권한을 갖는다. (All parties would now recognize the Peace of Augusburg of 1555, by which each prince would have the right to determine the religion of his own state, the options being Catholicism, Lutheranism, and now Calvinism : the principle of Cuius regio, eius religio(Whose realm, his religion). 이말은 '각 나라의 종교는 제국의 종교와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나라들은 제국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 비록 자기가 속하여 있는 나라가 이미 어떤 교파를 선택했다고 해도 자기의 교파가 다르다면 자기 의사에 따라 자기 교파의 신앙 활동을 제한된 시간내에 개인적으로 수행할수 있다. (Christians living in principalities where their denomination 교단 교파 was not the established church were guaranteed the right to practice their faith in public during allotted hours and in private at their will.)

 

폴란드의 쳄나(Czemna)에 있는 교회의 제단. 30년 전쟁의 전사자들 유골로 제단을 장식했다.

 

영토에 대한 조정도 이루어졌다. 협상은 프랑스의 마자랭 추기경이 주도했다.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14세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실질적은 국정은 마자랭 추기경이 맡았었다. 프랑스는 승전국으로서 다른 참전국들에 비하여 우선권이 있었다. 로레인 인근의 메츠(Metz), 툴(Toul), 베르뒨(Verdun) 추기경 교구의 영지, 알사스의 데카폴(Decapole)에 있는 도시들(스트라스부르 제외)이 프랑스의 관할도 들어갔다.  

- 스웨덴은 서부 포메라니아(Pomerania)와 브레멘 및 베르덴(Verden) 추기경 교구의 영지를 보장 받았다. 이렇게 하여 스웨덴은 사실상 오더(Oder)강, 엘베(Elbe)강, 베저(Weser)강 하구를 관할할수 있게 되었다. 스웨덴은 독일 제국의회의 제후위원회(Council of Princes)에서 3표의 투표권을 얻었다.

- 바바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제국선거후위원회(Imperial Council of Electors)에서 팔라틴의 표를 갖게 되었다. 바바리아는 1623년 팔라틴의 프레데릭5세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것을 반대한바 있다.

- 브란덴부르크-프러시아(Brandenburg-Prussia: 훗날 프러시아 제국)는 포메라니아의 일부와 마그데부르크(Bagdeburg), 할버슈타트(Halberstadt), 캄민(Kammin), 민덴(Minden) 추기경 교구의 영지들을 관할하게 되었다.

- 윌리히(Julich), 베르크(Berg), 라벤슈타인(Ravenstein)은 노이부르크(Neuburg)의 분봉제후에게 주어졌다. 클레브스(Cleves), 마르크(Mark), 라벤스베르크(Ravensberg)는 브란덴부르크에게 돌아갔다.

- 브레멘(Bremen)을 독립된 도시국가로 인정하였다.

- 팔라틴(Palatinate)은 둘로 나누어졌다. 개신교인 팔라틴 선거후 샤를르 루이(Charles Louis: 프레데릭5세의 아들)와 가톨릭인 바바리아의 선거후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분배되었다. 샤를르 루이는 라인 연안의 남부 팔라틴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막시밀리안은 바바리아 북쪽에 이르는 상부 팔라틴을 관할하게 되었다.

- 전쟁중 폐기되었던 무역에 대한 장벽이 거두어졌다. 누구나 라인강을 자유롭게 운항할수 있게 되었다.

 

30년 전쟁의 여파로 라인강에 대한 운항이 자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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