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30년 전쟁 집중조명

[스웨덴의 관여] 1630-1635

정준극 2008. 2. 26. 10:01

[스웨덴의 관여] 1630-1635]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푸스 왕

                        

[구스타프 국왕]

발렌슈타인(Wallenstein)은 페르디난트 황제에게 큰 도움을 주었지만 페르디난트의 측근들은 발렌슈타인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발렌슈타인이 독일의 제후들과 연합하여 페르디난트에게 영향력을 행사코자 하기 때문이었다. 1630년,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을 해임하였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나중에 스웨덴의 구스타프2세 아돌프(Gustaf II Adolf: Gustavus Adolphus)가 신성로마제국을 침공하자 발렌슈타인을 다시 불러 스웨덴과의 전쟁을 치러달라고 요청했다. 그건 나중의 얘기이고,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푸스는 신성로마제국이 막강해지면 결국 개신교인 스웨덴도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가만두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구스타프 왕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국왕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루터파 제후들을 지원코자 남하하였다. 구스타프는  이와 함께 발트해 주변의 독일 국가들에게 경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프레데릭의 가톨릭 세력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더 절실하게 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과 마찬가지로 스웨덴의 구스타프 역시 프랑스 루이13세의 재무장관인 리슐르(Richelieu)추기경의 지원을 받았다. 같은 가톨릭국가이지만 프랑스는 독일국가들이 주축을 이룬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프랑스는 스웨덴이 프랑스의 라이벌인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해 주겠다고 하자 재정지원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스웨덴은 130년부터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을 벌여 4년동안 그동안 가톨릭 세력이 장악하였던 독일 북부 지역의 개신교 지역을 거의 모두 탈환하였다.

 

 스웨덴국왕 구스타프 아돌프스의 독일북부 브라이트펠트 전투에서의 승리


[틸리 백작]

발렌슈타인을 해임한후 얼마 되지 않아 스웨덴의 공격을 받은 페르디난트는 또 다시 가톨릭연맹에 의지하지 않을수 없었다. 프랑스와 바바리아는 폰텐블러(Fontainebleau)조약을 비밀리에 맺어 서로 평화를 합의했지만 스웨덴의 바바리아 공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조약이었다. 구스타프의 스웨덴 군대는 틸리(Tilly) 백작이 이끄는 가톨릭연맹군을 격파하였다. 얼마후 구스타프와 틸리는 다시 전장에서 만났다. 그 전투에서 틸리 장군은 전사했다. 행운의 여신은 스웨덴을 주축으로한 개신교연맹의 손을 들어 주었다.1630년, 처음 전쟁이 시작될 때에 스웨덴은 4만2천명 군대를 위해 약 2백40만 달러(daler)를 지불했다. 하지만 1632년에는 병력이 15만명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은 1630년 군비의 5분의 1인 약 47만 달러만을 지불했다. 나머지는 프랑스의 재정지원으로 충당했다. 스웨덴은 북부 독일의 브라이텐펠트(Breitenfeld)를 해방시키고 이곳에 있던 죄수들을 군대로 편입하여 병력을 크게 증강하였다. 구스타프는 2만에서 3만명의 용병을 스코틀랜드에서 데려오기도 했다.

 

틸리 백작 


[프라하 평화조약]

다급해진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을 다시 부르지 않을수 없었다. 발렌슈타인의 막강한 군대는 독일 남부로부터 북부로 진격하며 구스타프의 보급로를 위협하였다. 구스타프와 발렌슈타인은 1632년 뤼첸(Lützen)전투에서 접전을 벌였다. 스웨덴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스웨덴은 구스타프 국왕이 전사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이듬해인 1633년, 발렌슈타인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재를 자청하여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으로 인하여 얻는 것 보다는 잃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중재가 진행되는 중에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이 개신교측을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받고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이 마음을 바꾸어 개신교측을 지지하게 된다면 큰일 이라고 생각했다. 페르디난트의 이방(吏房)들도 발렌슈타인 죽이기에 한몫을 했다. 페르디난트는 측근 이방들의 말을 들어 발렌슈타인을 체포하고 사령관에서 해임하였다. 1634년 2월 어느날, 발렌슈타인의 부하장교인 드브러(Devereux)대위는 발렌슈타인이 비밀리에 스웨덴 측과 연락하고 있다고 믿고 발렌슈타인을 살해했다. 에거(Eger)라는 도시의 시청에서였다. 한편, 발렌슈타인이 살해된 그 해에 개신교 군대는 유명한 뇌르드링겐(Nördlingen)에서 발렌슈타인 군대와 대접전을 벌였으나 두 군대 모두 지도자를 잃은 상태에서 서로 크게 피해만 보았다. 페르디난트는 스웨덴과의 평화협상을 추진하지 않을수 없었다. 1635년 프라하평화조약(Peace of Prague)이 체결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앞으로 40년간 ‘재산반환 칙령’(Edict of Restitution)의 효력을 중지한다. 개신교 군주들은 1627년 이전에 민간으로 이관된 교회재산을 계속 소유할수 있다. (이 조항으로 동북부 독일의 루터파 군주들은 그들이 획득한 영토를 보호 받을수 있게 되었지만 1627년 이전부터 영토를 신성로마제국이나 가톨릭연맹 군대에 점령당한 독일 남서부의 군주들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 

-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군대와 독일 제후들의 군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군대로 단일화한다. (그러나 작소니의 요한 게오르그 군대과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 군대는 명목상 황제의 군대에 예속되도록 하고 실제로는 예외로 인정하여 독립된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 독일의 제후들은 상호 연맹을 맺거나 외국과 동맹을 맺지 않도록 한다.

- 1630년 스웨덴이 침공한후 황제에 대항하여 전쟁에 참여한 군주들은 모두 사면한다.


프랑스는 이 조약에 대하여 불만이었다. 합스부르크만 강력하게 만드는 조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가 전쟁에 등장하지 않을수 없었다. 30년 전쟁의 마지막은 프랑스가 장식하였다.

 

역사적인 뇌르딩겐 전투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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