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30년 전쟁 집중조명

30년 전쟁이 남긴 것

정준극 2008. 2. 26. 10:11

30년 전쟁이 남긴 것

 

[인명손실과 역병]

30년 전쟁으로 인한 국토의 황폐와 인명소실은 유례를 찾아 볼수 없는 심각한 것이었다. 독일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 전체 독일 주민의 30% 이상이 희생되었다. 병사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전사하기도 했지만 기아와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도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로 병사들보다 민간인들의 희생이 더 컸다. 민간인들은 잔인무도한 용병들 때문에 많은 희생을 보았다. 용병들의 살인, 강간, 약탈, 방화, 폭력은 이들이 과연 종교를 위해 전쟁을 하는 사람들일까 라는 의심을 갖게 해주는 것이었다. 용병들은 폭력을 일삼았지만 실제로 전쟁으로 치부를 하는 사람들은 장군들이었다. 장군들은 사리사욕을 위해 병사들을 이용했다. 심지어 약탈한 재물들을 자기들의 고향으로 보내기 위해 전쟁에 투입할 병사들을 운반꾼으로 빼돌리는 사령관들도 많았다. 전쟁은 경제와 인구의 심각한 불균형을 가져왔다. 부익부 빈익빈이었으며 농촌은 집을 버리고 떠나는 피난민들 때문에 농촌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졌다. 

 

30년 전쟁의 비참함. 전쟁터를 둘러보는 장군


30년 동안 독일과 주변 국가들은 여러 종류의 전염병으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은 전염병을 뿌리고 다니므로 어쩔수 없었다. 군대가 이동할 때, 외국 군대가 유입될 때, 그리고 전투가 끝난후에 인마의 시체 등으로 전염병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게다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피난민들이 도시에 몰려들면서 괴질을 전염시켰다. 물론 전염병이란 것이 전쟁기간중에만 발생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 전에도 괴질이 만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전염병의 발호는 예상 이상이었다. 1625-26년에 덴마크 군대와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작소니 및 투린기아(Thuringia)에서 조우한후 이 지역에 전염병이 크게 번진 일이 있다. 지역 교회에서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헝가리 병’ 또는 ‘머리 질병’이 번져 수많은 병사들과 주민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장질부사였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과 합스부르크군이 만투아 전쟁(Mantuan War)을 벌인후 북부 이탈리아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이른바 ‘이탈리아 역병’이라는 쥐에 의한 유행성출혈열이 만연했다. 1632년 스웨덴이 뉘른베르크(Nuremberg)를 공성하였을 때 양쪽 군대는 물론 뉘른베르크의 주민들 사이에 장질부사와 괴혈병이 퍼져 많은 사람이 전투에서 싸우지도 않고 사망했다. 2년후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스웨덴 군대를 추격하여 라인강을 따라 북상할 때에도 원인 모를 전염병이 순식간에 번져 수많은 병사들이 사망했다. 전염병 중에서도 쥐에 의한 유행성출혈열은 30년 전쟁을 계속 괴롭혔다. 1634년의 기록을 보면 드레스덴과 뮌헨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유행성출혈열과 같은 전염병이 번져 희생이 컸다고 되어 있다. 전쟁의 막바지에는 독일에서 장질부사와 이질, 그리고 풍토병이 기승을 부렸다.

 

전쟁터


[정치적 후유증]

30년 전쟁의 결과중 하나는 독일 국가들이 비록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으로 존속하고 있지만 각각 실질적인 주권을 가진 지역들로 분할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었고 독일국가들에 대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저해하는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이같은 분열이 훗날 독일 통일을 위한 국수주의의 원인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히틀러는 그런 사항을 교묘하게 이용했고!

 

영국의 여류사학자 C.V. Wedgewood가 쓴 '30년 전쟁사'. 무시무시한 표지.


30년 전쟁은 과거 유럽의 권력구조를 재편해 주는 것이었다. 스페인의 군사력과 정치력은 현저한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스페인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매달려 있을 때 과거 거의 60년 동안 스페인의 그늘 아래 있었던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수중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과거에는 스페인 왕이 포르투갈 왕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30년 전쟁 기간중 포르투갈은 브라간사(Braganza) 가문의 후안4세(Juan IV)를 국왕으로 옹립하고 이후 브라간사 왕조가 포르투갈을 통치하는 문을 열었다. 한편, 스페인은 1648년 마침내 더치공화국(오늘날의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함으로서 스페인과 더치(Dutch)간의 80년에 이르는 분규를 마무리하였다. 스페인이 약화되자 프랑스가 유럽의 맹주로 등장하였다. 프랑스의 득세는 프랑스-스페인간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함으로서 더욱 굳건해졌다. 스페인을 위시한 신성로마제국의 패배는 합스부르크 세력의 쇠퇴를 가져왔으며 나아가 프랑스 부르봉(Bourbon)왕조가 부상(浮上)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30년 전쟁의 후반기에 스웨덴과 덴마크는 별도의 토르스텐슨(Torstenson)전쟁을 치루었다. 이 전쟁에서 스웨덴이 승리하였고 더구나 베스트팔리아 조약에 의거하여 스웨덴의 위상이 올라가자 스웨덴은 30전쟁 이후 유럽의 강자로 자리를 잡았다. 

 

30년 전쟁의 현장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있었던 대규모 종교전쟁이었다. 이후로 유럽에서는 종교분규로 인한 대규모 전쟁이 없었다. 전쟁중 용병의 만행은 대단히 심각한 것이었다. 이후로 용병을 사용하는 일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대신 자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30년 전쟁을 요약해보자. 기간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 장소는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독일. 결과는 베스트팔리아조약이었다. 교전당사국은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가톨릭연맹, 오스트리아, 바바리아, 스페인이 한편이었고 다른 한편은 보헤미아,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더치공화국, 스코틀랜드(주로 용병 제공), 영국, 작소니였다. 전쟁에는 유명한 지휘관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신성로마제국 측에서는 틸리백작인 요한 체르크라에스(Johann Tscerclaes), 페르디난트2세, 페르디난트3세, 막시밀리안1세 등이 전쟁을 지휘했고 개신교측은 팔라틴의 프레데릭5세,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국왕, 프랑스의 리슐르 추기경, 부르봉의 루이2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4세 국왕, 봐이마르의 베른하르트, 작소니의 요한 게오르그1세 등이었다. 병력은? 신성로마제국 측은 스페인군 약 45만명과 독일 국가의 군대가 거의 65만명에 이르는 대군이었으며 개신교 측은 스웨덴군 약 15만명, 덴마크 군 2만명, 더치공화국 군 7만5천명, 독일군 약 10만명, 프랑스군 15만명 등 모두 50만명에 이르는 병력이었다.   

 

30년 전쟁의 병사들에 대한 사격훈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평화의 날'(Friedenstag)은 30년 전쟁의 마지막 날을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이 오페라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난 후인 1938년 7월,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오페라에서는 독일의 어떤 가톨릭 마을이 포위를 당했고 홀슈타인에서 온 개신교 군대가 공성을 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기는 1648년 10월 24일로 되어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평화의 날'의 무대. 현대적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