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30년 전쟁 집중조명

[덴마크의 관여] 1625-1629

정준극 2008. 2. 26. 09:57

[덴마크의 관여] 1625-1629


[크리스티안 국왕]

신성로마제국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덴마크가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일어섰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발단은 덴마크의 루터파인 크리스티안4세(Christian IV)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신성로마제국의 압력을 받고 있는 인접 남부 작소니(Lower Saxony)를 지원해야 한다고 나섬으로서 시작되었다. 개신교 국가인 덴마크는 얼마전에 보헤미아의 봉기를 가톨릭이 성공적으로 분쇄한데 대하여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덴마크에도 가톨릭이 몰려와 개신교를 탄압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덴마크는 북부 독일에서 많은 혜택을 보고 있었다. 예를 들어 1621년에는 함부르크가 덴마크의 강요에 의해 덴마크의 주권을 받아들여 예속된 것이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4세는 브레멘(Bremen)에도 압력을 행사하여 자기의 둘째 아들이 브레멘의 추기경이 되도록 했다. 덴마크는 몇 년전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스웨덴으로부터는 막대한 전쟁 보상금을 받아 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크리스티안4세는 덴마크를 유럽에서도 보기드믄 안정되고 부유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한 크리스티안4세가 남부 작소니를 지원하기 위해 용병 2만, 자국 병력 1만5천을 구성하여 파견키로 한 것이다. 덴마크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전비(戰費)를 지원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4세 국왕 

                    

[발렌슈타인의 등장]

덴마크의 크리스티안4세가 남부 작소니의 개신교를 지원하고 나서자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황제는 보헤미아의 귀족으로 대단한 부를 축적한 알브레헤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von Wallenstein)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발렌슈타인은 자기가 동원할수 있는 3만-10만의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발렌슈타인은 그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부자였다. 발렌슈타인은 신성로마제국의 전쟁을 대행하는 대가로 점령하는 지역의 모든 재산을 자기 것으로 해 달라고 주장했다. 즉, 병사들이 약탈을 일삼아도 좋다고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은 발렌슈타인의 군대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고 섣불리 전선으로 진격했다가 발렌슈타인과 틸리 백작의 양면 공격을 받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기를 돕겠다고 말했던 동맹국들이 가톨릭 측이 우세하게 되자 ‘나 몰라라’하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실제로 영국은 내분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프랑스 역시 내전의 와중에 있었다. 스웨덴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동부 독일의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는 공연히 전쟁에 휩쓸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겨우 홀란드에 있던 만스펠트가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정예의 발렌슈타인 군대에 대패하였다. 이어 신성로마제국 측의 틸리 백작은 1626년 덴마크의 만스펠트 군대를 루터(Lutter)전투에서 패배시켰다. 전쟁에서 패배한 만스펠트는 몇 달후 한을 되새기며 세상을 떠났다.

 

알브레헤트 폰 발렌슈타인


[뤼베크 조약]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북으로 진군하여 여러 성을 함락하고 마침내 덴마크가 있는 유트란드(Jutland)반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은 질랜드(Zealand: Sjaelland) 섬의 한 쪽에 있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발렌슈타인에게는 해군이 부족했다. 더구나 발트해(Baltic Sea) 연안 도시들은 발렌슈타인이 함선을 건조하여 덴마크를 공격하겠다고 하자 ‘우리가 왜 가톨릭의 앞잡이인 당신을 도와야 해!’하면서 거부했다. 발렌슈타인은 대형 전함을 건조할수 있는 스트랄순드(Stralsund)를 겨우 점령하였으나 전함을 건조할 시설들이 모두 파괴되어서 아무 일도 할수 없었다. 그보다도 발렌슈타인은 전쟁 비용이 생각보다 너무 엄청나게 들자 ‘이게 아닌데’라며 공연히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발렌슈타인은 덴마크를 점령한다고 해도 빼앗는 재산보다는 전쟁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발렌슈타인은 휴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629년 뤼베크(Lübeck)조약이 체결되었다. 내용은 만일 크리스티안 덴마크 왕이 개신교 독일 국가들에 대한 지원을 포기한다면 덴마크를 계속 통치하도록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덴마크는 억울했지만 뤼베크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이후 몇해동안 가톨릭 세력들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며 기승을 부렸다. 그 시점에서 가톨릭연맹은 페르디난트 황제에게 루터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영토를 모두 거두어들이라고 종용했다. 아우구스부르크 평화조약에 의거, 현재 루터파들이 보유하고 있는 영토는 가톨릭교회가 정당하게 소유할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1629년, ‘반환 칙령’(Edict of Restitution)이 선포되었고 이에 따라 2곳의 대주교 교구, 16곳의 추기경 교구, 그리고 수백곳의 수도원이 강압적인 방법으로 가톨릭의 소유로 되돌아 왔다. 평화는 체결되었지만 덴마크 유트란트 반도의 스트랄순드(Stralsund)성만이 발렌슈타인에 대하여 계속 항거하고 있었다.

 

독일 북부 발트해에 면한 스트랄순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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