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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의 완벽한 전형 Alma Gluck (알마 글룩)

정준극 2008. 2. 26. 16:07
 

▒ 소프라노의 완벽한 전형 Alma Gluck (알마 글룩)


 

유명한 평론가 사무엘 코치노프는 알마 글룩의 노래에 대하여 ‘완벽함 그 자체이다. 이 세상 모든 소프라노의 가장 모범되는 전형이다’라고 말했다. 누구든지 노래 부르는데 있어서 이런 저런 부족함이 있을수 있다. 완벽이란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고음에서 플랫이 되고, 어떤 사람은 바이브레이션이 심하며 또는 저음에서 음이 안정되지 않는 상태를 보여주는가 하면 소리가 튀어난다는 등등의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알마 글룩의 노래는 마치 티한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과 같다. 슈만의 리트, 바흐의 칸타타, 모차르트의 아리아, 대중적인 발라드 기타 어떤 노래를 부르든지 알마 글룩은 가장 완벽하고 가장 확실한 노래를 선사하였다. 1882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아버지 레온(Leon)으로부터 음악에 대한 사랑을 물려받았고 어머니 자라(Zara)로부터는 아름다운 음성을 전하여 받았다. 알마의 어릴때 이름은 레바(Reba)였다. 루마니아에서 이민온 이들 가족은 뉴욕의 이스트사이드 빈민가에 살았다. 어려운 생활 중에서도 어린 레바(알마)의 노래는 어려운 이민생활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이었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던 레바는 결혼하기 전에 직업을 가져 결혼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업전문대학에 진학하여 속기와 타자를 배웠다. 다행히 맨해튼의 어떤 법률사무소 직원으로 취직할수 있었다. 얼마후 그는 사무실에 드나드는 12세 연상인 베르나드 글릭(Bernard Glick)과 좋아하게 되어 결혼하였다. 레바가 24세 때였다. 남편 글릭은 보험회사 사원이었다. 남편 글릭은 레바(알마)의 재능을 지원해줄 능력이 부족하였다. 나중에 레바는 글릭과 결혼은 했지만 사랑의 감정은 없었다고 밝혔다. 아무튼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을 하나 두었다. 아비가일 마르시아(Abigail Marcia)이다. 나중에 아비가일 마르시아는 유명한 작가 마르시아 데이븐포트(Marcia Devenport)가 되었다. 딸을 낳은지 얼마후 레바는 자기의 갈 길은 메트로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가정주부로서의 역할과 아기 엄마로서의 역할에서 과감하게 탈출하였다. 그 계기는 이러했다.

 

 

 

결혼후 몇 년 지난 어느날 저녁, 남편 글릭은 몇명의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 중에는 오페라 애호가도 있었다. 이 오페라 애호가는 레바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무척 감동하여 당장 성악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바는 상당히 고무되었지만 남편의 벌이로는 성악 공부를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결심을 하지 못하였다. 이 오페라 애호가는 레바에게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뉴욕의 유명한 성악지도교사인 아르투로 부찌-페찌아(Arturo Buzzi-Peccia)에게 소개해 주었다. 레바는 부찌-페찌아의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되었다. 3년후인 1909년, 레바가 27세 때에 부찌-페찌아는 레바를 메트로의 매니저인 줄리오 가티-카사짜(Giulio Gatti-Casazza)와 새로 임명된 음악감독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에게 소해해 주었다. 개별 오디션에서 레바는 당장 주목을 받았다. 레바는 알마 글룩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메트로와 계약을 맺었다. 월 7백불의 임시계약이었다. 두달후 음악 전문지인 뮤지컬 쿠리어(Musical Courier)는 알마 글룩을 커버스토리로 크게 다루어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널리 알렸다. 물론 기사 내용중 어떤 부분은 약간 과장된 표현이었지만(예를 들어 금세기 최고의 소프라노라느니 또는 어릴때부터 음악적 천재성을 보여주었다느니 등의 표현) 아무튼 그로부터 알마 글룩의 인생은 음악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서너달후 글룩은 샬로테(베르테르)를 맡아 오페라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글룩은 이 역할을 메트로에서 리허설의 대역으로서 맡은 일은 있지만 본역을 맡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원래 샬로테를 맡았던 프랑스의 소프라노 크리스틴 엘리앙(Christine Heliane)이 사정상 출연하지 못하게 되어 대역으로 급히 무대에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2막이 끝나자 글룩은 무대위의 지붕에서 비가 요란하게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글룩은 ‘날씨가 좋았는데 갑자기 웬 비가 이리도 심하게 오나?’라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잠시후 글룩은 그 소리가 자기를 향해 퍼붓는 박수갈채인 것을 알고 당황했다고 한다. 다음날 신문들은 글룩에 대하여 유례없는 찬사를 보냈다. 성공은 계속되었다. 토스카니니의 유명한 리바이벌인 글룩의 ‘오르페오와 유리디체’에서 옴브라 휄리체(Ombra Felice)를 맡았던 것이다. 그해 시즌이 끝날 무렵, 메트로는 비록 알마 글룩이 아직 경험도 부족하고 나이도 젊지만 정식 계약을 맺었다.

 


글룩은 메트로의 일요일저녁 콘서트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였으며 쿠바를 비롯한 외국 공연도 가지기 시작했다. 글룩은 이들 연주회를 통해서 분명하고도 귀중한 사실을 깨달았다. 청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쿠바에서는 원래 자기가 공부했던 프랑스 가곡을 부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쿠바 사람들에게 프랑스의 예술 가곡이 어필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한 글룩은 스페인의 하바네라로 레퍼토리를 바꾸었다. 대환영을 받았다. 그러던 얼마후 글룩은 메트로에서 자기의 경력이 너무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잠시 공백을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메트로를 떠나 미국의 지방 도시, 또는 유럽의 소도시 오페라 극장에서 틈틈이 공부하면서 지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메트로가 허락하지 않았다. 더 공부할 필요가 없으니 그대로 있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글룩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과감히 메트로를 떠나 지방도시의 오페라단에서 작은 역할을 맡아 하며 자기 자신의 역량 개발을 위해 노력하였다. 예를 들면 팔리아치에서 네다(Nedda)와 같은 역할이었다.


얼마후 글룩은 오페라 무대보다는 콘서트가 자기에게 적합하다고 확신하여 연주회에 전념하였고 아울러 레코드 취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글룩의 레코드는 놀라운 환영을 받으며 팔리기 시작했다. RCA 빅터는 글룩의 레코드를 한달에 한번씩 발매할 정도였다. 이 기간동안 글룩은 엔리코 카루소, 폴 레이머스(Paul Reimers), 루이스 호머(Louise Homer),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에프렘 짐발리스트(Efrem Zimbalist) 등과 함께 취입하였다. 당시 레코드 취입으로 인한 글룩의 수입은 엄청났다. 예를 들어 1914년부터 1919년 사이에 글룩은 60만불이 넘는 로열티를 받았다. 그가 부른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오’(Carry Me Back to Old Virginia)는 백만장 이상이 팔리는 RCA빅터의 레드 씰(Red Seal)이 되었다. 글룩은 콘서트, 오라토리오, 리사이틀에 대한 출연 요청이 쇄도하자 자기의 역할은 오페라가 아니라 콘서트임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무대를 영원히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12년, 30세 때에 메트로의 무대를 떠났다.


그러한 때에 글룩은 오랜 이혼소송의 진통 끝에 마침내 남편 베르나드 글릭과 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혼자만의 외로운 생활은 아니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에르펨 짐발리스트와 사랑하게 되었으나 당장 결혼하지는 않았다. 글룩은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가곡을 다시 공부하였고 나아가 자기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거의 1년동안 당대의 프리마돈나였던 마르첼라 젬브리히(Marcella Sembrich)로부터 스위스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함께 기거하며 성악예술의 모든 것을 공부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과연!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모자란다는 말이 실감나는 행동이었다. 1914년 글룩의 뉴욕 리사이틀은 대단한 성공이었다. 신문들은 앞을 다투어 글룩을 찬양하였다. 이에 힘입은 글룩은 전국 순회 연주회를 갖기로 결심했다. 레퍼토리는 예술가곡 이외에도 각국의 민요를 포함하였다. 발라드풍의 고향민요는 미국에 와 있는 이민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런던 공연(미국에 있는 도시 이름)은 대성공이었다. 글룩이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런던에서 아일랜드 민요를 부르자 장내는 온통 눈물바다였다. 런던 공연이후 글룩과 짐발리스트는 결혼하였다. 글룩은 유럽의 다른 도시를 순방하며 리사이틀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1차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미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미국이 세계대전에 휩쓸리려는 것을 반대하였고 일반대중들도 글룩에게 많은 동조를 보냈다. 그러나 일단 미국이 연합국으로서 참전하게 되자 글룩은 정부를 위해 자유채권 판매에 앞장섰으며 전쟁터로 떠나는 장병들을 위문하는데 온갖 힘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이 적십자에 2만5천불이라는 당시로서는 거금을 기부하였다. 그는 ‘우리 이민자들은 미국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갚을 때입니다’라면서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글룩은 전쟁으로 당분가 연주회는 가질수가 없었으며 게다가 결혼 이듬해에 딸 마리(Marie)를, 3년후에는 아들 에프람 2세를 낳게 되어 연주활동이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의 목소리가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쟁이 끝나고 글룩에 대한 연주회 요청이 쇄도하였지만 1921년, 글룩은 마지못해 은퇴를 결심하고 가정생활과 아이들에게서 진정한 행복을 찾으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자선단체나 음악단체를 통한 활동은 꾸준히 계속하였다. 얼마후 글룩은 간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되어 그나마 모든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고 병마와의 싸움에 이기지 못하여 1938년 10월 27일, 54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고인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나왔다. 그 중에서 아마 가장 솔직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어떤 것이 더 사랑스러운지는 말하기 어렵다. 알마 글룩인가? 또는 그의 음성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