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역사상 최고의 콜로라투라 Amelita Galli-Curci (아멜리타 갈리-쿠르치)

정준극 2008. 2. 26. 16:11
 

▒ 역사상 최고의 콜로라투라 Amelita Galli-Curci (아멜리타 갈리-쿠르치)

 


1910년대와 20년대에 세계 최고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찬사를 받았던 아멜리타 갈리-쿠르치(1882-1963)는 무대에서 은퇴한후 캘리포니아주의  란쵸 산타페(Rancho Santa Fe)와 라 욜라(La Jolla)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나무나 가축들과 얘기를 나누며 지냈다고 한다. 그만큼 자연과 벗하며 살았다는 뜻이다. 갈라-구프치가 비록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는 하였지만 남가주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신문들의 계속되는 스토리가 되었다. 갈리-쿠르치의 음악적 경력은 그의 인생경력만큼 다양했다. 1906년 이탈리

아의 작은 도시 트라니(Trani)에서 첫 오페라 무대에 등장한 이래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였으나 1930년대 유럽순회 연주에서 하락세를 보였다가 1935년 시카고 오페라에서 불행한 마지막 공연을 기록한 것이 그 예이다.

 


갈리-쿠르치는 1882년 11월 18일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부유한 카디즈(Cadiz)의 루나 백작부인(Countess de Luna)의 조카였으며 아버지는 사업가였다. 갈리의 성악적 영감과 재능은 아마 그의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외할머니는 오페라 소프라노였다. 갈리는 어린 시절,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부유하게 살았다. 그는 16세 때에 이미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정도로 어학적 재능이 많았다. 원래 그는 밀라노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1903년에는 밀라노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그는 음악원을 졸업한후 피아노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절대로 직업적 피아니스트가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과감하게 방향전환을 생각했다. 1905년 마스카니가 우연한 기회에 갈리를 만나 피아노연주와 노래를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 갈리가 23세 때였다. 마스카니는 갈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다. 정말 특별한 재능을 받은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음성을 20년후에도 금방 알아 들을수 있을 것이다. 그런 천부적인 선물을 받았다면 그걸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줄수 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라! 세상에는 재능있는 피아니스트가 수없이 많지만 재능있는 성악가는 많지 않다.’

 

리골레토의 질다

 

갈리가 마스카니를 만난 바로 그 해에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되자 아버지는 사업의 재기를 위해 아르헨티나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갈리와 어머니는 함께 가지 않고 밀라노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갈리는 성악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피아노 교사를 하여 아쉬운 대로 안정된 생활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성악에 대한 갈리의 집념을 꺽을수는 없었다. 갈리는 레슨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서 마누엘 가르시아(Manueal Garcia)의 성악 교본을 가지고 혼자서 발성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마누엘 가르시아는 제니 린드, 릴리 레만과 같은 훌륭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를 키워낸 인물이었다. 그런 갈리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은 역시 소프라노 경력의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갈리에게 가벼운 소프라노가 맞을 테니 그쪽으로 집중하라고 조언해주었다. 나중에 갈리는 자기가 아르페지오(arpeggio: 화음을 이루는 음을 연속해서 급히 내는 테크닉)와 룰라드(roulade; 급하게 소리를 이끌어 가는 테크닉), 또는 트릴(장식음을 붙이는 테크닉)에 능숙했던 것은 그때 제니 린드나 릴리 레만과 같은 나이팅게일들이 연습했던 것을 그대로 공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할머니의 지도가 큰 힘이 되었다고 털어 놓았다.


갈리의 첫 오페라 데뷔는 1906년 리골레토에서 질다를 맡은 것이었다. 데뷔 공연에서 질다의 아리아 Caro nome(그리운 이름)는 글자 그대로 통열한 간절함이 배어있는 것이었다. 질다의 상처 받을 것 같이 연약한 순수함이 슬픔과 비통함에 섞여 신비스러운 아리아를 만들어 냈다. 이날의 공연을 본 사람들은 지금까지 수백명의 찬란한 질다가 있었지만 갈리-쿠르치가 가장 뛰어난 질다였다고 입을 모았다. 얼마흐 갈리는 귀족 부호인 카를로 쿠르치(Carlo Curci)와 결혼하였다. 그래서 이름에 쿠르치가 더 붙게 되었다. 1908년이었다.

 

 비올레타

트리에스테로부터 카타니아(Catania)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갈리-쿠르치에게 환호를 보냈다. 원래 이탈리아 사람들은 감정 표현이 심한 편이어서 조금이라도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야유를 보내고 토마도와 같은 채소를 무대위로 던지기가 일쑤였다. 아마 그런 모욕적인 행동을 겪어 보지 않은 성악가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갈리-쿠르치에게는 어느 곳을 가든지 단 한번도 그런 야유를 보낸 일이 없었다. 이들은 홍당무나 배추대신에 무대 위로 꽃을 던졌다. 갈리-쿠르치는 단 한번도 프라 마돈나로서 건방지게 구는등 티를 낸 일이 없다. 그러나 단 한번, 라 스칼라에서 감독 민가르디(Mingardi)가 몽유병자에서 아미나를 부를수 없다고 통보하자 갈리-쿠르치는 ‘민가르디씨, 이점은 잊지 마세요. 나는 앞으로 이 극장에 절대로 다시는 발을 들여 놓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꾸했다. 갈리-쿠르치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 이후 갈리-쿠르치는 유럽의 여러 곳에서 초청을 받아 빛나는 공연을 계속하였다. 1915년 스페인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6주간이나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갈리-쿠르치는 마드리드의 왕립오페라극장(Teatro Real)에서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출연키로 되어 있었다. 그는 병마와 싸우고 있으면서도 약속을 지켰다. 아직 몸이 아프고 일어서서 걷기도 어려웠지만 그는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휠체어에 앉은채 로지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엘 문도(El Mundo)지는 "갈리-쿠르치가 Una voce poco fa를 말할수없이 완벽하고 노련하게 불렀다. 아리아를 마쳤을 때 장내에서는 천둥과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 박수가 무려 5분 이상이나 계속되는 바람에 오페라의 공연이 그만큼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고 보도했다. 갈리-쿠르치는 1916년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 데뷔하였고 이듬해 장기 계약을 맺었다. 계약금은 공연당 1천불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높은 출연료였다. 시카고데일리저널은 신문에 이렇게 썼다. ‘음성이 맑고 투명하며 순수한 성악가들은 여럿 있다. 갈리-쿠르치는 이들보다 더 음성이 맑고 투명하며 더 순수하다. 빈틈없이 능란한 기교의 성악가들이 더러 있다. 갈리-쿠르치는 이들보다 더 빈틈없이 능란한 기교를 가지고 있다. 무대에서 자기의 역할을 돋보이게 하려고 특성있게 보이려고 하는 성악가들이 더러 있다. 갈리-쿠르치는 이 모든 것을 타고났다. 어떤 오페라 성악가들은 노래와 연기에 있어서 모든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다. 갈리-쿠르치는 좀 더 갖추고 있다.’

 


1917년부터 1920년의 시즌에 갈라-쿠르치는 시카고와 공연당 2천5백불, 뉴욕과는 공연당 3천불의 계약을 맺었다. 카루소보다 많은 출연료였다. 그만큼 그에 대한 인기는 대단했다. 그의 뉴욕 데뷔는 1918년 렉싱톤(Lexington) 오페라하우스에서였다. 마이에르베르의 디노라(Dinorah)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것이었다. 61회의 기록적인 커튼콜을 받았다. 그의 부드러운 레가토, 정확한 스타카토, 유연한 장식음(트릴)은 도저히 필설로 형언할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투명한 것이었다. 당시 가장 맑고 투명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제랄딘 화라(Geraldine Farrar) 조차 갈리-쿠르치의 연주를 보고 ‘세련됨의 극치’(Heart of a pansy)라고 말하며 찬사를 보냈다. 이듬해인 1919년, 갈리-쿠르치는 드디어 메트로에 데뷔하였다. 갈리-쿠르치는 루치아로서 메트로를 정복하였다. 아마 메트로의 역사상 갈리-쿠르치만큼 열광적인 갈채를 받은 디바도 없을 것이다. 1921년 그는 호머 사무엘스(Homer Samuels)와 결혼할때 이탈리아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시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원로음악가를 위한 베르디양로원, 카루소기념재단, 뉴욕재활병원, 일리노이고아원 등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당시 그의 한달 정기수입(출연료 및 레코딩 로열티)은 당시 미국 대통령보다 다섯배나 많았다. 그러나 그는 화려함을 몰랐다. 검소하였다. 의상이나 보석류는 거의 가지지 않았다. 자선활동을 위해서는 많은 돈을 사용했지만 자기의 치장을 위해서는 절약하였다. 그가 다만 돈을 사용한 곳은 남가주의 산디에고 인근 란쵸 산타페(Rancho Santa Fe)에 188 에이커나 되는 거대한 장원을 구입한 것이다. 이 장원에는 밭과 목장과 양계장등이 있었다. 그는 기르고 있는 소마다 화보리타, 토스카, 자자(Zaza), 미미, 루이제 등의 이름을 붙이고 보살펴 주었다. 무대에서 은퇴한 후에는 장원에서 풍경화와 정물화를 그리며 조용하게 지냈다.

 

 루치아


1935년 그는 갑상선에 이상이 생겨 큰 수술을 받았다. 목에서 상당한 크기의 갑상선종양을 제거하였다. 사실 이 종양은 과거 15년동안 갈리-쿠르치의 후두를 압박했던 것이었다. 수술후 갈리-쿠르치의 음성은 전과 같지 못하였다. 종전의 목소리를 되찾으려고 호흡법도 개선해보고 발성법도 달리 하여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예전처럼 노래 부를수 있다는 자신이 없어졌다. 한때 그는 콜로라투라 대신 드라마틱으로 변경하여 아이다나 토스카를 부를수 있다고 믿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쇠퇴해갔다. 그의 마지막 공연은 수술을 받은지 1년후인 1936년 11월이었다. 시카고오페라에서 미미를 불렀다. 공연후 시카고 신문에는 어떠한 논평도 없었다. 다만 한 신문만 ‘컴백’이라는 짧은 기사를 썼을 뿐이었다. 시카고에서의 미미를 마지막으로 무대를 떠난 갈리-쿠르치는 산디에고의 장원에서 27년을 보냈다. 1963년 11월 26일 아멜리타 갈리-쿠르치는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산디에고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던 그는 수많은 역할을 맡아 했지만 ‘밤의 여왕’만은 부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