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아름다운 베쓰 Anne Wiggins Brown (앤느 위긴스 브라운)

정준극 2008. 2. 26. 17:00
 

▒ 아름다운 베쓰 Anne Wiggins Brown (앤느 위긴스 브라운)

 

 

소프라노 앤느 위긴스 브라운은 1912년 매리랜드주의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존경받는 의사였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는 아프리카 노예였다. 어머니는 아프리카-체로키 인디안-아일랜드가 혼합된 분이었다. 브라운은 어머니에게서 집중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당시에는 아프리카-아메리카 사람들(흑인)이 제대로 활동할 무대가 없었다. 메트로에는 흑인 성악가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형편에서 아무리 성악을 공부해서 성공한다고 해도 앞길은 분명치 않았다. 브라운의 부모는 딸을 가톨릭학교에 보내어 성악공부를 본격적으로 시키려고 했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 브라운은 피바디(Peabody)음악학교에서도 입학을 거절당하고 겨우 컬럼비아대학교 사범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이후 그는 다행스럽게도 줄리아드에서 성악을 공부할수 있었다.

 


줄리아드에 다닐때 브라운은 거슈인이 포기(Porgy)라는 새 오페라를 완성하고 주역 소프라노를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뮤지컬 코미디도 할수 있고 재즈도 할수 있는 소프라노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브라운은 생면부지의 거슈인에게 편지를 썼다. 며칠후 거슈인의 사무실에서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오디션에서 거슈인은 브라운에게 흑인 영가를 부르라고 주문했다. 브라운은 흑인이라고 무조건 흑인 영가만 부르는줄 아느냐면서 화를 내고 줄리아드에서는 흑인영가를 가르치지 않으니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겠다고 말했다. 거슈인은 ‘좋아요! 그럼 아리아를 부르세요!’라고 했지만 브라운은 일종의 오기로 그냥 흑인영가를 반주도 없이 불렀다. 브라운의 흑인영가에 무척 감동한 거슈인은 그 자리에서 ‘포기’(당시에는 타이틀이 ‘포기와 베쓰’가 아니었음)의 여주인공을 맡겼다. 이 날의 오디션에서 브라운이 부른 ‘천국이라고 부르는 도시’(City Called Heaven)는 그 이후 다른 모든 소프라노 콘서트의 인기 레퍼토리가 되었다. 얼마후 거슈인은 브라운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페라의 타이틀을 여주인공 베쓰의 이름을 넣어  ‘포기와 베쓰’라고 바꾸었다. ‘포기와 베쓰’의 세계초연 출연진은 모두 흑인으로서 신인과 중견의 혼합팀으로 구성되었다. 브라운의 상대역인 포기는 하바드대학교 음악교수로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알휘오(Alfio)를 맡아 명성을 떨쳤던 토드 던칸(Todd Duncan)이었다. 세레나는 브라운의 줄리아드 동창으로 브로드웨이의 뮤지컬과 ‘황제 존스’라는 영화에도 출연한 일이 있는 루비 엘지(Ruby Elzy)였다. 제이크(Jake)역은 에드워드 매튜스(Edward Mattews)였다.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카네기 홀에서 독창회를 가져 화제가 되었으며 버질 톰슨(Virgil Thompson)의 오페라 ‘3막의 성자’(Four Saints in Three Acts)의 초연에도 출연한 일이 있는 중견이었다. 그리고 클라라 역의 애비 미첼(Abbie Mitchell)은 거의 40년이나 브로드웨이 오페라와 보데빌에 출연한 경력의 베테란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브라운은 1935년 보스턴에서의 ‘포기와 베쓰’ 세계초연에서 23세의 젊은 성악도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그해 10월에는 뉴욕에서 공연되었다.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여 뉴욕에서 120회의 공연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포기와 베쓰’는 전국순회공연에 들어갔다. 워싱턴 공연에는 문제가 있었다. 워싱턴국립극장은 흑인의 공연을 규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규정이 바뀌기까지는 절대로 흑인들만의 ‘포기와 베쓰’를 무대에 올릴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제작진의 끈질긴 간청에 결국 극장측은 만일 무슨 문제가 생기면 흑인 출연진 전원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블랙리스트(요주의인물)를 만든 다음 1주일 후에야 겨우 승낙하였다. 브라운은 ‘포기와 베쓰’로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브라운은 헤이워드의 뮤지컬 ‘맘바의 딸’(Mnmba's Daughter), ‘아름다운 헬렌’(La Belle Hélène) 등에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그리고 1941년 세계대전휴전기념일에는 레오폴드 스토크브스키가 지휘하는 NBC교향악단과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에 솔리스트로 출연하였다. 이어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리사이틀을 가져 명성을 떨쳤다. 그는 브람스, 슈베르트와 같은 독일 가곡을 주로 불렀다. 브라운은 대단한 명성을 쌓았지만 그 역시 다른 동료 흑인성악가들이 겪고 있는 인종차별을 받은 일이 더러 있었다. 심지어 브라운은 고향인 볼티모어에서 연주회장 사용을 거부당했었다. 아이러니컬한것은 불과 몇 달전, 브라운은 볼티모어 조선소에서 2차대전중 미해군의 리버티 쉽(표준 수송함)인 프레데릭호의 최초 진수식에 초청받았다는 점이다.


1946년 브라운은 유럽 공연을 떠났다. 첫 공연은 코펜하겐 로열 오페라에서 ‘포기와 베쓰’였다. 상대역 포기는 내나 토드 던컨이었다. 브라운은 코벤트 가든에서 런던교향악단 협연으로 연주했으며 이를 기점으로하여 유럽 각지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브라운은 노르웨이에 대하여 특별히 호감을 가졌다. 노르웨이 사람들의 여유있는 생활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브라운은 노르웨이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1948년 브라운은 노르웨이 철학자 겸 저널리스트 겸 올림픽 스키 선수인 토르레이프 쇨더럽(Thorleif Schjelderup)과 결혼하였다. 브라운으로서는 세 번째 결혼이었다. 브라운은 오래전부터 바라던대로 노르웨이에 살게 되었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메노티의 ‘메디움’ ‘전화’ ‘영사’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그러던중 브라운에게 유전성 천식증이 생겼다. 무대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브라운은 1985년, 잠시 미국을 방문하였다. 메트로에서의 ‘포기와 베쓰’ 50주년 기념 공연을 위해서였다. 이어 그는 워싱턴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거슈인 탄생 1백주년 기념음악회에도 출연하였다. 그해에 브라운은 피바디(Peabody)재단으로부터 미국을 빛낸 뛰어난 음악인에게 주는 ‘조지 피바디메달’을 받았다. 브라운은 아직도 노르웨이에 살고 있다. 어느때 브라운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소프라노로서 고전적인 오페라에 출연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브라운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좋아하지 않으셨지요. 아버지는 흑인 성악가들이 오페라 무대에서 기껏 약장수라든지 창녀 역할을 맡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자기 딸이 무대에서 다리를 들어내 보인다든지 저속하게 보인다면 그건 절대로 안된다고 말씀하였지요. 거슈인과 뒤보스(극작가)선생님은 단순히 사우드 캐럴라이너 캣피쉬 로우(Catfish Row)에 살고 있는 흑인들의 생활을 무대로 옮기기만 하였지요.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