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과 같은 인생 Blanche Arral (블랑셰 아랄)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벨기에에서 클라라 라르디누아(Clara Lardinois)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블랑셰 아랄의 인생은 소설보다 더 파란만장했다. 클라라는 1864년 장 그레고와 라르디누아(Jean Gregoire Lardinois)백작의 17 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10세때에 가족들과 함께 브뤼셀로 옮긴 그는 아버지의 친구인 카라망 카라망-쉬마리(Caraman Caraman-Chimary) 공자가 ‘야, 클라라! 노래 참 잘한다!’라면서 음악공부를 하라고 권하는 바람에 13세 때인 1877년 브뤼셀음악원에 최연소 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카라망 공자는 브뤼셀음악원의 원장이었다. 3년동안 이 음악원에 다닌 그는 곧이어 파리로 가서 유명한 마르케시의 문하로 들어갔다. 마르케시는 클라라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곧이어 오페라 데뷔를 주선해주었다. 클라라는 18세때인 1882년 오페라 코미크에서 니콜라 메울(Nicolas Méhul)의 ‘요셉’ 중 이스라엘 처녀의 한 사람으로서 오페라 무대에 처음으로 데뷔하였다. 그로부터 그는 오페라 코미크에서 6년 이상을 지내면서 주연급으로 활동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은 클라라 라르드누아였다.
1891년, 클라라가 27세때에 그는 러시아의 초청을 받았다. 클라라는 생 페테르부르크의 여름극장에서 아르카디아(Arcadia)로 러시아 데뷔를 하였다. 이듬해 그는 러시아의 귀족인 세르게이 페슈코프(Sergei Peshkov)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페슈코프는 2년후 터키를 방문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고국인 벨기에로 돌아온 클라라는 3년동안 조용히 지내다가 자기에게 역마살이 있다고 생각하여 세상을 여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우선 코스타리카를 방문한 그는 산호세 극장의 개관기념인 파우스트(구노)에서 마르게리트를 맡아 갈채를 받았다. 그는 코스타리카 공연에서 처음으로 블랑셰 아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몇 년후에는 이집트에 등장했다. 이집트에서는 아다 넬슨(Ada Nelson)이란 예명을 사용했다. 아마 아이다와 비슷한 이름을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것 같았다. 이집트에서 2년동안 지낸 그는 터키를 방문한후 다음번 행선지로 아시아를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사이곤, 하노이, 홍콩, 샹하이, 싱가폴, 자바 등지를 순방하였다. 한편 터키에서는 술탄 아브둘하미드 2세와 각별한 친분을 유지했다. 아시아 방문 후에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찾아간 그는 2년동안 지내면서 여러 차례의 콘서트를 가졌다. 그리고 1908년에는 드디어 미국에 발을 디뎠다.
블랑셰 아랄은 이토록 오랜기간동안 여행을 하면서 실로 여러 사람들과 교분을 쌓았다. 그 중에는 유명한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 여간첩으로 이름을 떨쳤던 마타 하리, 미국의 곡예사 해리 후디니, 프랑스의 문호 빅톨 위고,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 프랑스의 작곡가 카미유 생-생, 그리고 미국의 소설가인 잭 런던과도 가깝게 지냈다. 잭 런던은 1908년 그가 미국으로 가는 도중 휘지섬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잭 런던은 그의 소설 Smoke Bellew에 블랑셰 아랄의 스토리를 모델로 썼다고 처음으로 얘기해 주었다. 아랄은 자기의 얘기도 듣지 않고 그런 소설을 쓴 잭 런던을 미워하였으나 자꾸 사과하는 바람에 좋다고 말해주었다. 미국에 도착한 아랄은 처음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뉴저지의 어떤 아파트에 겨우 기숙하고 있었다. 블랑셰 아랄이란 이름도 점차 잊혀졌다. 그때 작가로서 오페라 극성팬인 아이라 글래큰스(Ira Glackens)라는 사람이 우연히 뉴저지에서 아랄을 발견하고 그의 흥미진진 및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를 기록으로 남겨 놓으라고 간절히 당부하였다. 그후 아이라 글래큰스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유명한 아랄이 뉴저지에 살고 있다고 선전하는 바람에 아랄은 사람들의 관심을 되찾게 되었다. 에디슨은 그의 축음기 첫 취입에 아랄을 초청하였으며 메트로에서도 아랄을 초청하였다.
당시 메트로에는 멜바가 디바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멜바로서 온 세상을 돌아다니기만 했던 아랄이 메트로의 무대에 서게 된다고 하니까 신경질이 나서 아랄과 여러번 언쟁을 벌였다. 두 사람 모두 마르케시의 문하생이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져서 멜바는 세계 최고의 디바가 되었고 아랄은 뛰어난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2선에서 있어야 했으므로 두 사람의 관계가 서먹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아랄이 60세가 훨씬 넘은 나이에 25세 연하의 조지 휠러(George Wheeler)라는 학교 선생님과 결혼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은 아랄은 1945년, 2차대전이 종전을 선포할때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1세. 뉴저지의 팰리세이드 파크(Palisades Park)에 있는 아랄의 묘비에는 클라라 휠러(Clara Wheeler)라고 적혀있다. 아랄이 세상을 떠난지 거의 60년후인 최근에 그의 비망록이 발견되었다. 일종의 일기책이었다. 음악전문지의 편집장인 윌렴 모란(William Moran)이라는 사람이 우연히 이 비망록을 발견하고 읽어보다가 흥미진진하여 도무지 손을 놓을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우선 ‘오페라 바이오그라피’란 잡지에 아랄의 비망록에서 발췌한 스토리를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후지어 타임스’는 아랄의 비망록 스토리가 ‘로맨스와 모험에 넘친 스토리이지만 전혀 소설이 아닌 실화여서 말할수없이 흥미롭다. 오페라 팬이 아니더라고 너무나 재미난 스토리이다’라고 보도했다.
블랑슈 아랄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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