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은파와 같은 소프라노 Julia Culp (율리아 컬프)

정준극 2008. 2. 27. 14:11
 

▒ 은파와 같은 프라노 Julia Culp (율리아 컬프)


더치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출신의 율리아 컬프는 원래 오페라 아티스트가 아니었다. 콘서트 성악가였다. 그러나 20세기 초의 음악계에서 뛰어난 활동을 하였기에 누구에 못지않는 오페라 디바로 간주하여 소개코자 한다. 1932년 Twelve Interesting Women이라는 책자가 출판되었을 때 작가는 서문에서 원래 스웨덴의 세기적 영화배우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부터 소개하려 했으나 그가 거절하는 바람에 율리아 컬프부터 시작했다고 적었다. 당시 율리아 컬프는 소프라노로서 그레타 가르보에 버금하는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근년에 그는 메조소프라노로서 더욱 활약하고 있다. 컬프는 음역이 비교적 좁아서 중음에 치중하였던 소프라노였지만 그 시대 최고의 소프라노였다. 그는 음성의 강약법(Dynamics)과 톤(Tone)을 놀라울 정도로 조절하며 노래를 불렀으며 여기에 천부적인 예술적 효과를 가미하여 청중들에게 그의 예술혼을 각인시켜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한계를 넘는 도전은 스스로 삼갔다. 그는 오페라보다는 콘서트가 자기의 적성에 맞는 다는 것을 인식하고 아예 처음부터 오페라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음성을 최고의 과르네리우스(Guarnerius) 첼로처럼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 첼로와 같은 음성위에 호흡과 소절과 균형을 적절히 안배하여 노래를 불렀다.

 

 


율쩨(Juultje)라는 애칭의 율리아 베르타 컬프(Julia Bertha Culp)는 1880년 10월 6일, 북부 네덜란드에 있는 그로닝겐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음악가 겸 상인이었다. 컬프 집안은 유태인 음악가와 코메디언에 속하여 있었다. 그래서 줄리아의 아버지도 그로닝겐 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정규멤버였다. 율쩨는 인기의 최정상에 있을때 어느 잡지에 어머니에 대하여 “우리 어머니는 나의 아름다운 음성을 내가 두 살때 이미 발견하셨다. 내가 너무 심하게 우니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보셔요. 우리 아기는 장차 유명한 성악가가 될거예요. 저렇게 계속 우는 것을 보니 폐활량이 큰것이 분명하구요 아무리 달래도 듣지 않고 우는 것을 보니 기질이 대단하지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라고 쓴 일이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율쩨가 일곱 살 때에 바이올린을 배우라고 했고 동생 베티는 피아노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줄리아가 열 살때부터 놀라운 음성을 보여주기 시작하여 고향 그로닝겐은 물론 멀리 암스테르담까지 가서 콘서트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후 율리아는 암스테르담음악원을 들어갔으며 1900년, 그가 20세 때에 최고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암스테르담음악원을 졸업한 율리아는 당시 유럽에서 모든 예술생활의 중심지인 베를린으로 갔고 이듬해 소프라노로서 감격적인 첫 공식 데뷔를 하였다. 율리아는 즉각적으로 베를린 음악계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콘서트 출연 요청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 그러나 율리아는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콘서트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았던 빌헬름 버거(Wilhelm Berger)가 율리아의 마음을 알고 당시 유명한 소프라노이며 음악교사인 에텔카 게르스터(Etelka Gerster)에게 소개해 주었다. 게르스터는 율리아의 소리를 듣고 교육을 받으면 최고의 성악가가 될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게르스터는 레슨비는 아무 때나 내도되며 없으면 안내도 된다고 하면서 본격적인 레슨을 시작했다. 제자를 받지 않기로 이름난 게르스터는 율리아에 대하여 그만큼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우선 전반적으로 천천히 노래 부르려는 습관부터 고쳐 나갔다. 어느날 게르스터 선생은 젊은 율리아를 베를린 사교계의 저명한 예술가들이 모이는 티 파티에 데려가서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훗날 이 자리에 참석했던 롯테 레만(Lotte Lehmann)은 ‘율리아의 음성은 온 방안에 은빛 물결을 이루며 퍼져나갔다. 참으로 훌륭한 목소리였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2년후, 율리아는 이제 국제무대에 나서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율리아는 유럽 전역을 은빛 노래로서 누비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노르웨이의 그리그의 피아노 반주로, 프라하에서는 오토 클렘페르의 반주로,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동생 베티의 피아노 반주로 리사이틀을 가졌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 맞추어 콘서트를 가진 것도 특기할 일이었다.


1913년 율리아는 마침내 미국에 상륙하였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행은 풍랑 때문에 무척 힘든 것이어서 회복조차 못했지만 카네기 홀에서의 데뷔는 말할수 없는 갈채를 받은 것이었다. 평론가들의 특히 그의 호흡법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순간에 호흡을 했는지 구분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연한 호흡이어서 노래가 마치 물이 흐르는듯 너무나 자연스러워 경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율리아는 미국에서 4년 동안 머무르면서 미국의 주요 도시는 물론 캐나다와 남미에 이르기까지 순회공연을 가져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이때에 엔리코 카루소와 여러번 함께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1916년 율리아는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엔리크 그라나도스 등과 함께 백악관의 윌슨 대통령 앞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오페라 고예스카스 작곡) 엔리크 그라나도스는 백악관에서의 연주후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도중 영국 해협에서 그가 탄 여객선이 독일 해군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여 세상을 떠났다. 후에 율리아는 그라나도스의 자녀들을 위한 자선음악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19년 윌슨 대통령이 저 유명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해에 율리아는 25년 연상인 어느 체코인과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 결혼후 율리아는 점차 연주회를 줄여 나갔으며 1930년 마지막으로 대중앞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1934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율리아는 비엔나의 초청을 받아 성악교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음성을 마지막으로 들을수 있었던 것은 1935년 라디오 방송에서였다. 나치가 비엔나를 접수하자 유태계통이었던 율리아는 피아니스트인 동생 베티와 함께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으나 이곳에서도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아파트를 떠나 숨어서 지내야 했다. 마치 지휘자 푸르트뱅글러가 율리아의 딱한 사정을 안타깝게 여겨 나치에게 위대한 소프라노 율리아와 동생 베티만은 아파트에 돌아가 살수있도록 간곡히 청탁하였다. 그리하여 율리아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동생 베티와 함께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할수 있었다. 1958년 동생 베티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율리아는 마음에 큰 타격을 입어 그로부터 세상을 등지고 은둔의 생활을 하였다. 1970년 10월 13일, 줄리아는 90회 생일을 지낸지 1주일후 세상을 떠났다. 네덜란드의 위대한 성악가 율리아의 죽음은 다만 몇 사람만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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