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전설을 창조한 Maria Malibran (마리아 말리브란)

정준극 2008. 2. 27. 15:41

전설을 창조한 Maria Malibran (마리아 말리브란)


28세의 젊은 나이로 아깝게도 세상을 떠난 마리아 말리브란은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 아티스트였다. 특히 그의 폭풍과 같은 성격, 드라마틱한 연기력은 그의 요절과 함께 잊을수 없는 전설로 남아 있게 되었다. 오늘날 그의 음성은 폭이 넓으며 힘이 있고 어느 장르던지 맡아할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가히 아주 특별한 성악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콘트랄토로서 노래를 부를수 있었으며 하이 소프라노로서도 노래를 부를수 있었다. 그는 대단히 폭넓은 음역을 가지고 있었다.

 

리라를 들고 있는 마리아 말리브란


말리브란은 스페인 계통으로 1808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마리아 프란체스카 가르시아 시트체스였다. 그의 아버지 마누엘 가르시아는 로시니가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 테너였다. 로시니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작곡할 때에 알마비바 백작역은 마누엘 가르시아를 염두에 두고 작곡하였다고 한다. 마누엘 가르시아는 1816년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로마 초연에서 알마비바 백작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가르시아는 작곡가 겸 훌륭한 음악교수이기도 했다. 마리아 말리브란의 첫 음악 선생은 바로 아버지인 마누엘 가르시아였다. 아버지는 고집이 센것이 마치 폭군과 같은 성격이어서 딸에게 성악을 가르칠 때에는 두 고집쟁이가 서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기 때문에 번번이 다투기만 하였다고 한다.

 


말리브란은 8세 때에 오페라에 처음으로 출연했다. 나폴리에서 아버지와 함께 파에르의 '아네세'(Agense)라는 오페라에서 아역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말리브란은 17세 때에 런던 왕립극장의 합창단원이 되었다. 그러나 기회는 우연과 친구임이 틀림없다. 프리마 돈나인 쥬디타 파스타(Giuditta Pasta)가 갑자기 병에 걸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 역을 맡지 못하게 되자 아버지 가르시아는 딸 마리아에게 그 역을 맡아보라고 권유했다. 관중들은 로지나를 맡은 청초하고 명랑한 마리아를 사랑했다. 마리아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로지나를 맡아 이름을 떨쳤다. 그 즈음에 아버지 가르시아는 오페라단을 만들어 문화생활을 못하고 있는 미국 사람들에게 오페라라는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일종의 거룩한 명분아래 미국 공연을 단행했다. 가르시아 오페라단의 멤버들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그의 동생 마누엘, 마리아의 어머니 호아키나 시트체스 등으로 구성되었다. 말하자면 가르시아 가족 오페라단이었다. 마리아의 여동생인 폴랭은 당시에 네살 밖에 되지 않아서 무대에 올라설 형편이 아니었지만 나중에 폴랭 비아르도(Pauline Viardot)라는 이름으로서 전유럽에서 이름을 떨친 소프라노가 되었다. 마누엘 가르시아의 오페라단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미국이라는 신대륙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 마리아는 미국에서 9개월을 지내면서 8개의 역할을 맡아하며 미국의 백성들을 열광케 만들었다. 그중 두 역할은 아버지 가르시아가 작곡한 오페라에서였다. 마리아는 뉴욕에서 은행가인 프랑수와 유제느 말리브란(Francois Eugene Malibran)이란 사람을 만나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말리브란은 마리아보다 28년 연상이었다. 얘기에 따르면 아버지 가르시아가 은행가인 말리브란으로부터 10만 프랑의 돈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딸 마리아와의 결혼을 은근히 강요했다고 한다. 한편, 마리아로서는 고집센 폭군과 같은 아버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결혼했다는 얘기도 있다. 결혼 몇 달후, 돈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던 말리브란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파산선고를 받을 정도였다. 그후 마리아는 가난한 남편을 대신하여 연주 활동을 통해 돈을 벌어 살림을 꾸려나갔다. 1년후 마리아는 결국 말리브란으로부터 벗어나서 유럽으로 돌아갔다.

 


유럽에서 마리아는 도니제티의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다. 1834년 나폴리에서였다. 프리드리히 쉴러의 Mary Stuart을 바탕으로한 이 오페라는 당시 유럽의 사정상 당국의 엄격한 검열을 받아야했다. 아니나 다를까 당국은 대사의 상당부분을 고쳐서 공연토록 지시했다. 고집센 마리아가 그런 지시를 안중에 둘리는 만무하였다. 고친 대사는 눈여겨 보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다. 결국 당국도 손을 들 수밖에 없었고 관중들은 마리아의 승리를 높이 찬양했다. 그 즈음에 마리아는 벨기에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샤를르 드 베리오(Charles de Beriot)와 로맨스를 가졌다. 불행하게도 베리오는 앞을 못보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신고를 하지 않고서도 가정생활을 할수 있다는 당시의 판례에 따라 함께 살기 시작하며 아이까지 갖게 된다. 그 아이가 훗날 유명한 피아노 교육가가 된 샤를르 윌프리드 드 베리오였다. 마리아가 베리오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동거를 한 것은 남편 말리브란과의 결혼이 무효라는 판결을 받지 못해서였다. 마리아와 베리오 두 사람은 행복한 생활을 했다. 멘델스존은 두 사람을 위해 솔로 바이올린이 반주하는 아리아를 작곡해 헌정하기도 했다. 마리아는 주로 파리 오페라에서 오페라에 출연했다. 마리아는 파리에서 영국의 마이클 윌리엄 발프(Michael William Balfe)를 만났다. 마리아는 1834년 영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런던에서 발프의 오페라에 출연하기 위해서였다. 마리아는 1836년 5월에 발프의 '아르투아의 처녀'(The Maid of Arois)에 출연했다. 발프가 마리아를 위해서 작곡한 오페라였다. 그러는 중에 마리아는 1836년 초에 밀라노에 가서 바카이(Vaccai)의 오페라 '조반나 그레이'(Giovanna Gray)의 초연에 출연하고 런던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런던에서 마리아 말리브란 환영인파

 

1836년, 마리아가 28세 때에 마리아는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어서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보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마리아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예정대로 계속 오페라에 출연했다. 어떤 때는 목발을 짚고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대에 나갔다고 한다. 그해 9월에 마리아는 만체스터 음악제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마리아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려운 중에도 만체스터에 갔다. 두번 연주회에 출연키로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왕립극장에서였고 두번째는 대학교회에서였다. 9월 22일, 왕립극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마리아는 관중들의 열화와 같은 앙코르 요청에 부응해서 다시 무대에 나왔다가 그만 그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마리아는 가까스로 호텔로 옮겨지면서 다음날 아침 대학교회에서는 하늘이 두쪽이 나더라도 노래를 부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마리아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를수 없게 되었다. 말에서 떨어져서 부상을 당한지 5개월후의 일이었다. 그때 마리아의 나이는 고작 28세였으니 참으로 아까운 청춘에 세상을 떠났다. 그날 만체스터 대학교회에서는 음악회 대신에 마리아에 대한 영결예배가 거행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석별의 눈물을 흘렸다. 마리아의 시신은 벨기에 브뤼셀 부근에 있는 라이켄(Laeken) 공동묘지의 영묘에 안치하기 위해 운구되었다.

 

마리아 말리브란. 루브르박물관 소장

 

마리아는 로시니의 오페라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그는 탄크레디, 오텔로, 이탈리아의 터키인, 라 체네렌톨라, 세미라미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음악 팬들을 열광시켰다.  오텔로에서는 소프라노로서 데스데모나도 맡았고 콘트랄토로서 오텔로도 맡아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밖에도 파리에서는 1825년에 마이에르베르의 Il Crociato in Egitto(이집트의 십자군)에도 주역으로 출연하여 갈채를 받았다. 마이에르베르는 마리아의 출연으로 비로소 유럽에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마리아는 특히 벨리니의 '몽유병자'와 ‘캬플레티가와 몬테키가’(로메오)에서 주역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감동한 벨리니는 이미 작곡한 ‘청교도’를 마리아의 음성에 맞게 다시 썼으며 마리아를 위해 새로운 오페라를 쓰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벨리니 역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바탕으로 만든 또 다른 두 오페라에도 주역으로 출연하여 박수를 받았다. 하나는 니콜로 안토니오 칭가렐리의 '줄리에타와 로메오'이며 다른 하나는 니콜라 바카이의 '줄리에타와 로메오'였다. 당시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타이틀만 가지고 공연해도 대인기를 끌던 시대였다. 따지고 보면 마리아의 음역은 대단히 폭이 넓어서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로시나의 '오텔로'에서는 데스데모나도 맡았고 오텔로도 맡는 대기염을 토하였다. 마리아는 저음에서 G3를 무난히 냈으며 고음에서는 E6까지 낼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저음 D3에서 고음 F6까지 내기도 했다. 그러므로 콘트랄토로부터 하이 소프라노까지 어려움 없이 역할들을 맡을수 있었다.

 

벨기에의 브뤼셀 근교에 있는 마리아 말리브란의 영묘

 

마리아가 활동하던 시대에 작품을 썼던 작곡가들은 대부분 마리아가 오페라 공연에서 보여준 감동적인 연기와 그의 당당하고도 아름다운 음성에 매료당했다.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쇼팽, 멘델스존, 리스트는 모두 마리아의 팬이었다. 그러나 유명한 화가 유제느 들라크로아(Eugene Delacriox)는 마리아가 ‘세련됨이 없이 저속하며 예술적 취향이 전무한 관중들에게 무조건 어필하려고 했다’고 비난한바 있다. 독일 영화제작자 베르너 슈뢰터(Werner Schröter)는 마리아 말리브란을 추모하기 위해 1971년 ‘마리아 말리브란의 죽음’(The Death of Maria Malibran)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다. 마리아 역할은 미국의 배우인 캔디 달링이 맡았다. 그보다 훨씬 전인 1943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마리아 말리브란'이라는 영화가 나왔었다. 오스트리아(정확히는 보헤미아)의 소프라노이며 여배우인 마리아 체보타리가 마리아의 역할을 맡았다. 이듬해에는 프랑스에서 '라 말리브란'(La Malibran)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소프라노인 게오리 부에(Geori Boue)가 마리아의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1982년에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는 이탈리아  순회연주회를 가진 일이 있다. 이때의 연주회 타이틀은 '말리브란'이었다. 말리브란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서 말리브란이 평소에 애창하던 노래만을 모아서 불렀다. 메조소프라노인 체칠리아 바르톨리는 2007년에 '마리아'라는 타이틀의 앨범을 내놓았다. 말리브란을 위해서 작곡된 곡들만을 모아서 취입한 앨범이었다. 2008년에 데카는 '몽유병자' 전곡을 내놓았는데 아미나는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불렀다. 바르톨리는 말리브란이 평소에 아미나를 부르면서 사용했던 카덴짜를 하이 메조소프라노의 음역으로서 그대로 따라서 사용하였다.


  

마리아 말리브란의 역할을 맡았던 프랑스의 소프라노 제오리 부에(Geori Boue), 보헤미아 출신의 소프라노 마리아 체보타리(Maria Cebotari), 미국의 여배우 캔디 달링(Candy Darl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