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놀라운 영웅 소프라노 Meta Seinemeyer (메타 자이네마이어)

정준극 2008. 2. 27. 16:38
 

▒ 놀라운 영웅 소프라노 Meta Seinemeyer (메타 자이네마이어)


독일의 소프라노인 메타 자이네마이어(1895-1929)는 바그너와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당대에 두각을 나타낸 뛰어난 인물이다. 그의 데뷔작품은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아름다운 헬레나’였지만 차츰 영웅 소프라노로서의 재능을 보여 당대를 압도할 정도의 최고 소프라노가 되었다. 그의 음성은 당시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우며 부드럽고 표현력이 강한 것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낭만적 오페라 작품에서 정상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한창 시절이던 30대 초반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34세였다.


자이네마이어는 베를린 경찰서 형사반장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경찰이라고 해서 딸도 경찰이 되라는 법은 없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인 그는 당시 유명한 음악교사들로부터 레슨을 받은 1918년 베를린 샬로텐부르크 오페라단(도이치오퍼의 전신)의 오디션에 합격하여 곧이어 이 오페라단의 멤버가 되었다. 그러나 베를린음악대학에 다니기 전까지는 여자학교에서 가정경제학을 공부하였다. 그후 몇 년동안 리릭 소프라노로서 오페라 무대에 섰으며 차츰 경력이 두터워지면서 드라마틱 소프라노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독일의 다른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이네마이어도 미국에서 활동코자 하는 희망을 가졌다. 마침 1923년, 맨하탄오페라하우스가 주관이 되어 독일 성악가들로 오페라단을 구성하여 미국 각지를 순회공연하는 계획이 있었다. 자이네마이어는 프리드리히 쇼르, 알렉산더 키프니스, 자크 울루스(Jacques Urrlus), 오틸리에 메츠거, 테오도르 라터만, 로베르트 후트, 엘자 알젠 등과 함께 이 오페라단의 초청을 받아 미국과 캐나다의 주요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자이네마이어는 볼티모어를 시작으로 필라델피아, 뉴욕, 보스턴, 디트로이트, 피츠버그, 클리브랜드 등지에서 엘자(로엔그린), 에바(명가수), 엘리자베트(탄호이저), 젠타(화란인), 아가테(마탄의 사수)를 맡아 환영을 받았다. 당시 아무도 자이네마이어가 누군지 모르던 형편이었는데도 그는 대단한 호평을 받은 것이다. 더구나 이 독일 그랜드오페라단의 미국 순회공연에 대한 선전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아 어느 도시를 방문하던지 출연자들을 당혹케 만들었다. 자이네마이어는 탄호이저와 화란인에서 특별한 찬사를 받았다.


1년후 독일로 돌아온 그는 드레스덴에서 마르게리트(파우스트)를 맡아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이로서 그는 드레스덴의 주역 소프라노로 활동하게 되었고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예술적 고향으로 남아 있었다. 마침 1920년대에는 드레스덴에 ‘베르디 르네상스’라고 부를 정도로 베르디 열풍이 불었다. 그는 티노 파티에라(Tino Pattiera), 이바르 안드레센(Ivar Andresen) 등과 함께 베르디의 주요역할을 맡아 갈채를 받았다. 드레스덴에서 맡은 베르디 역할은 레오노레(운명의 힘), 아이다, 데스데모나(오텔로) 등이었다. 특히 레오노레는 그의 대명사처럼 될 정도였다. 이밖에도 푸치니 작품으로서 토스카, 미미, 나비부인을 맡았으며 안드레아 셰니에의 드레스덴 초연에서 맛달레나를 맡은 것은최고의 찬사를 받은 것이었다. 마침 드레스덴의 공연에 참석했던 작곡자 죠르나도가 자이네마이어의 맛달레나를 듣고 감격하여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이다.


1927년 6월, 자이네마이어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초청 성악가로서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토스카와 아이다였다. 비엔나의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쎄(Neue freie Presse)는 의외로 냉담한 비평을 하였다. 토스타의 해석이 미흡하다는 주장이었다. 아마 당시 마리아 예리차의 토스카가 비엔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기 때문에 자이네마이어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소홀히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실제로 자이네마이어는 무대에서 안정되지 않고 초조한 기색을 보였으며 마지막 파트에 가서는 목소리가 피곤해진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점들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로테 레만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관례는 만일 어떤 성악가와 계약을 맺고 싶으면 두 번의 초청 공연에 출연토록 하여 일종의 테스트를 한후 결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이네마이어가 비엔나 슈타츠오퍼와 계약을 맺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사실 그 당시부터 자이네마이어의 건강상태는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1929년 1월, 그는 드레스덴에서 마지막 무대에 섰다. 차이코브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이었다. 그는 드레스덴에서 6월에 베를리오즈의 벤베누토 첼리니의 테레사를 맡도록 되어 있었으나 너무 아퍼서 노래를 부를수 없었다. 대신 안젤라 콜리냐크(Angela Koliniak)로 급작히 대체되었다. 자이네마이어는 테레사 공연 한 달 전인 5월에 마지막 음반을 취입하였다. ‘방랑하는 화란인’이었다. 그러나 그 음반은 발매되지 않았다. 아마도 완벽주의자였던 그가 자기의 레코딩에 만족하지 못하여 제작하지 않도록 당부했던것 같다. 아무튼 그는 너무나 병이 깊어서 제대로 레코딩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1929년 역시 5월, 자이네마이어는 코벤트 가든의 초청을 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2회의 지글린데와 에바, 1회의 엘자를 맡았다. 더블 캐스트여서 로테 레만과 역할을 나누어 맡아하였다. 어느날, 로엔그린에서 로테 레만이 공연중 갑자기 몸이 불편하게 되자 자이네마이어가 어쩔수 없이 마지막 파트에 레만을 대신하여 무대에 투입되었다. 레만의 팬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분장을 레만처럼 했기 때문에) 레만의 음성이 갑자기 기운이 없어지고 힘들어 하는데 대하여 놀라고 실망하였던 일도있다. 하지만 자이네마이어는 자기의 백혈병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가족들과 친구 몇 명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런던에서 독감에 걸렸다. 그러나 백혈병 때문에 저항력이 없어져 독감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그는 스위스로 돌아와 바드 키씽겐(Bad Kissingen)에서 요양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였다. 그해 8월,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1929년 8월 19일, 자이네마이어는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스위스의 바드 키씽겐으로부터 특별 자동차를 타고 드레스덴에 돌아온지 14일 후였다. 그의 친구가 혹시라도 소생시켜보려고 자기의 피를 자이네마이어의 몸에 넣어주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임종에 앞서서 평소 그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지휘자 프리더 봐이쓰만(Frieder Weissmann)과 병상결혼을 했다. 자이네마이어와 봐이쓰만은 콘서트 연주뿐 아니라 레코드 취입도 여러차례 함께 한 일이 있다. 자이네마이어는 당시 가장 뛰어난 독일 스핀토 소프라노였다. 이졸데와 브륀힐데는 그에게 가장 이상적인 역할로 기억되고 있다.

 

 

 

 

마탄의 사수의 아가테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