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검은 보석 Ruby Elzy (루비 엘지)

정준극 2008. 2. 27. 17:15
 

▒ 검은 보석 Ruby Elzy (루비 엘지)


1930년대를 장식한 ‘검은 디바’ 루비 엘지는 거슈인의 재즈 오페라 ‘포기와 베스’의 세계 초연에서 세레나(Serena)를 맡아 놀라운 찬사를 받았으며 이후 같은 역할만 8백회 이상 공연하여 ‘디바 세레나’라는 소리를 들은 흑인 성악가이다. 엘지는 ‘섬머 타임’의 대명사가 되었다. 엘지는 캐틀린 배틀, 제씨 노먼, 레온타인 프라이스와 같은 클래식 소프라노라고는 할수 없지만 만일 엘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그랜드 오페라에서도 커다란 기여를 했을 것이 틀림없다는 얘기이다. 루비 엘지는 35세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엘지의 진정한 기여는 차별받는 미국의 흑인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었으며 미국 재즈음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2000년에 미시시피주는 미시시피를 빛낸 음악가 명예의 전당을 완성하고 25명의 저명 음악가들의 이름을 기렸다. 루비 엘지는 레온타인 프라이스, 엘비스 프레슬리, B B 킹, 태미 위네트(Tammy Wynette) 등과 함께 제1차로 명예의 전당에 올라서게 되었다. 


엘지는 1908년 미시시피주의 폰타탁(Pontotoc)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4남매 중 첫째였다. 독실한 감리교 신자인 어머니 엠마는 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마을의 부유한 백인들 집에서 빨래와 청소, 목화 따는 일 등 닥치는 대로 일하였다. 엘지가 흑인영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폰타탁감리교회와 어머니의 영향이 컸었다. 엘지는 불과 네 살때에 폰타탁감리교회에서 예배중에 독창을 하여 온 교인들을 감동시켜 ‘할렐루야!’를 크게 소리치도록 했다. 이것이 엘지의 첫 대중공연이었다. 엘지는 항상 이 교회에서 백인과 흑인이 함께 예배보기를 희망하였다. 엘지의 희망은 그가 세상을 하직하고서야 이루어졌다. 그의 시신이 고향 폰타탁으로 돌아와 폰타탁감리교회에서 영결예배를 볼때 처음으로 백인들과 흑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세상 떠난 엘지를 추모하였다. 실로 엘지는 살아가면서 흑인이기 때문에 여러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어려운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서 인종문제를 어렵지않게 돌파할 수가 있었다. 엘지는 ‘I Know the Lord'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아 주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다음으로 어머니는 엘지의 음악성을 키워주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다른 집에서 빨래 일을 하거나 다림질을 할 때에 함께 따라간 엘지에게 흑인영가를 불러주면서 가르쳤다. 이로부터 엘지는 흑인영가에 대한 완벽한 느낌을 흡수하였으며 재즈 음악을 몸에 배게 하였다. 나중에 엘지는 ‘포기와 베쓰’에서 세레나의 아리아 ‘섬머 타임’을 부를 때마다 그 옛날 미시시피의 폰타탁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때를 회상하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엘지는 어머니의 지원으로 고향마을 폰타탁으로부터 거의 80km 떨어진 러스트(Rust)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이 학교는 원래 16세 이상이 되어야 입학할수 있으며 반드시 학비를 내야하지만 엘지는 11세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으로 특별 입학허가를 받았으며 수업료도 전액 면제를 받았다. 엘지는 이 학교에서 가장 인기있는 우등생이었다. 엘지는 러스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러스트 대학에 장학생으로 진학하였다. 1927년 5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의 챨스 맥크레큰(Charles McCracken)박사가 남부지방 흑인학교의 실태를 조사하는 위원회의 대표로 러스트 대학을 방문하였다. 학교에서 이 위원회의 회의가 열리는 중에 엘지는 연습실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맥크래큰 박사는 다른 방에서 들리는 엘지의 노래에 너무 감동하여 다음날 다시 정식으로 위원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탁하였다. 그리고 엘지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 특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가게되었다. 당시 미국에는 Jim Crow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남부에 살고 있는 흑인들은 북부로 갈수 없다는 법이었다. 엘지는 북부인 오하이로로 가기 위해 러스트 대학의 백인 여학장의 하녀로 신분을 감추고 역마차를 탈수 있었다. 몇 년후 엘지는 스타가 되어 고향마을을 찾아왔다.


1930년 맥크래큰박사는 엘지가 성악공부를 계속할수 있도록 젊은 흑인 예술가에게만 주는 로센월드(Rosenwald) 장학금을 마련해 주었다. 마리안 앤더슨도 이 장학금을 받아 독일에 유학간 일이 있다. 그러나 엘지는 독일 유학의 기회를 마다하고 줄리아드음악대학에 진학하였다. 줄리아드에 다니던 엘지는 젊은 음악도인 가드너 존스(Gardner Jones)와 결혼하였다. 엘지가 23세 때였다. 결혼한지 며칠 후 엘지는 브로드웨이에서 Fast and Furious 라는 뮤지컬에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흑인 학생으로서 대단한 진출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뮤지컬은 겨우 7회 공연후 막을 내렸고 결혼생활은 5년동안만 지속되었다. 1933년, 엘지는 롱 아일랜드에서 촬영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의 영화 ‘존스 황제’(The Emperor Jones)에서 주인공 존스의 여자친구 역할을 맡았다. 처음에는 합창단 보조였으나 엘지의 청순하고 명랑한 모습을 보고 극작가인 뒤보스 헤이워드(DuBose Heyward)가 느닷없이 주역급으로 발탁했던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엘지는 나중에 헐리우드로 진출하여 빙 크로스비 및 메리 마틴과 함께 파라마운트의 ‘블루스의 탄생’(Birth of the Blues)에 출연하였으며 이어 유명한 ‘세인트 루이스 블루스’(St Louis Blues)에도 주역으로 출연하여 전국적인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평론가들은 엘지의 ‘세인트 루이스 블루스’에 대하여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노래를 불렀다’ ‘루비 엘지의 노래로 이 영화는 통상적인 뮤지컬 코미디의 수준을 뛰어 넘는 찬란함을 보여주었다’ ‘세인트 루이스 블루스 노래가 존속하는 한 루비 엘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빙 크로스비는 엘지를 ‘진정으로 위대한 아티스트’라고 덧 붙여 말하였다. 아무튼 빙 크로스비는 자기 형이 제작자로 있는 영화사에 엘지를 소개하여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할수 있도록 해주었다.


1934년 6월 어느날, ‘존스 황제’의 극작가였던 뒤보스 헤이워드가 우연히 조지 거슈인을 만나 얘기를 하는중 ‘포기와 베쓰’를 무대에 올릴텐데 세레나를 맡을 사람을 선정하기가 어려워 고민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헤이워드는 당장 엘지를 추천하였다. 그렇게 하여 루비 엘지와 세레나의 기나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9월 30일, 거슈인의 ‘포기와 베쓰’는 보스턴에서 세계초연되었다. 베쓰역은 미모의 흑인 소프라노 앤느 위긴스 브라운(Anne Wiggins Brown)이 맡았으며 세레나는 루비 엘지가 맡았다. 엔느 위긴스 브라운도 물론 대단한 찬사를 받았지만 조역인 엘지가 더 커다란 갈채를 받았다. 엘지가 부른 ‘섬머 타임’과 ‘내 남자는 이제 떠났고’(My Man's Gone Now)는 실로 장내가 떠나 갈듯한 갈채를 받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8년후인 1943년, 엘지는 7백회 째의 세레나를 맡아한후 무대를 떠났다. 엘지는 아이다를 공연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아이다의 의상을 입고 홍보용 사진까지 찍었다. 그러나 몇 달전 검진때 처음으로 발견된 종양부터 치료키로 했다. 암이 아니고 양성 종양이기 때문에 그다지 어려운 수술이 아니라는 것이 의사들의 얘기였다. 수술날 아침, 엘지의 모습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명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고향으로부터 아버지 짹과 어머니 엠마가 급히 달려왔을 때에 엘지는 이미 차가운 몸이었다. 수술중에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던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엘지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고있다. 어머니 엠마는 엘지를 매장하기 위해 미시시피로 데려왔다. ‘폰타탁 프로그레스’지는 ‘루비 엘지가 다시 집에 돌아왔다’고 1면에 크게 보도하였다. 엘지가 31년전에 처음으로 독창을 했던 맥도날드감리교회에는 멀리 뉴욕과 보스턴으로부터 달려온 팬들, 그리고 고향사람들 모두 백인, 흑인을 가리지 않고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엘지가 세상을 떠난지 몇 년후 진정으로 위대한 미국의 아티스트인 루비 엘지의 일대기를 적은 ‘30대의 검은 디바, 루비 엘지의 삶’(Black Diva of the Thirties: The Life of Ruby Elzy)이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