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메조소프라노

전설적인 로지나 Conchita Supervia (콘치타 수페르비아)

정준극 2008. 2. 28. 09:24
 

전설적인 로지나 Conchita Supervia (콘치타 수페르비아)


아름다운 스페인의 메조소프라노 콘치타 수페르비아는 로시니의 콜로라투라 메조 역할로 유명하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제3막에서 로지나의 아리아 Contro un cor che accende amore를 들어보면 알수있다. 메조가 어떻게 이 유명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역할을 할수 있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원래 로시니는 로지나를 메조 파트로 작곡하였다. 처음 의도는 로시나의 어두운 음색이 알마비바 백작의 갈대와 같이 가벼운 테너와 어울리며 여기에 휘가로의 찬란한 바리톤을 등장시켜 오묘한 조화를 이루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로지나의 파트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들이 맡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로지나의 오리지널 음조와 음정, 특히 고음은 소프라노에 따라 약간씩 변경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는 음악적 프로파일을 상실하는 것이다. 얘기가 좀 빗나갔지만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면 유명한 Una voce poco fa의 경우, 하이 소프라노가 부를 경우 오리지널 음정에 비하여 거의 반음 정도 올려서 부른다. 소프라노들은 온갖 기교를 다하여 부른다. 완벽하게 위장한 셈이다. 그러므로 로시니의 오리지널 음조(튠)을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로지나가 음악교사(백작)에게서 레슨을 받는 장면의 두엣에서 로지나 역할은 보통 하이 소프라노가 맡아 한다. 그러나 재강조하자면 콜로라투라 메조가 맡는 것이 최적이다. 콘치타 수페르비아는 바로 로지나를 위한 메조소프라노이다.


1895년 바르셀로나의 전통있는 안달루시아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세례명은 콘셉시온 수페르비아 파스쿠알이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가정이어서 그는 어릴때부터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음악에 대한 재능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리체오(Liceo)음악원에 들어가 성악을 공부했다. 첫 오페라 데뷔는 15세 때인 1910년 멀리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토마스 브레톤(Thomas Breton)의 Los amantes de Tereul이란 오페라에 출연한 것이었다. 그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이듬해인 1911년, 그는 로마의 Teatro Constanzi에서 있었던 ‘장미의 기사’의 첫 이탈리아 제작 공연에서 마샬린을 맡았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고향인 바르셀로나에서 카르멘의 타이틀 롤을 맡아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그로부터 카르멘은 수페르비아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미국 데뷔는 1915년, 그가 20세 때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였다. 마스네의 베르테르에서 샬로테를 맡은 것이었다. 시카고 리릭 오페라는 젊은 수페르비아의 놀라운 재능에 감탄하여 계속 남아 있기를 간청하였고 그는 이 간청을 받아들여 계속해서 미뇽과 카르멘을 공연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수페르비아는 유럽으로 돌아온다. 그는 로마의 초청을 받아 로시니의 오페라에 출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로지나(세빌리아의 이발사), 안젤리나(체네렌톨라), 이사벨라(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에 출연하여 로시니 디바로서 높은 명성을 얻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메조소프라노였지만 로시니의 오페라를 오리지날 키로 불렀다는 것이다. 수페르비아야 말로 로시니가 원했던 바로 그 소프라노였다. 힘찬 체스트 보이스(흉성)는 고음에서도 유연하게 연결되었고 때문에 물이 흐르는듯한 파사지에서도 아무런 어려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위대한 음악성과 세련된 음성, 한점의 흠도 없이 완벽한 딕션(가사의 발음)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저음에서는 상당한 비브라토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이 비브라토마저 ‘쟁반위에서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라고 평했다. 그리고 청중들은 그런 비브라토를 무척 사랑하였다. 수페르비아는 라 스칼라에서 헨젤로서 데뷔하였다. 그후 거의 매년 라 스칼라의 고정 출연자였으나 이상하게도 로시니의 대가로서 라 스칼라에서 단 한번도 로시니를 공연하지는 않았다.


1930년 그는 파리에서 카르멘을 공연은 레코딩되어 음반으로 나왔다. 그 음반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감탄케하는 유명한 것이다. 수페르비아는 수많은 레코딩을 하였다. 거의 2백회 이상이나 된다. 이에는 오페라뿐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의 가곡, 그리고 스페인의 차르추엘라가 포함되어있다. 1930년 그는 런던데뷔를 하였고 그 다음해에 런던의 벨 루벤슈타인이라는 기업인과 결혼하여 런던에 정착했다. 결혼후인 1934년 그는 코벤트 가든에서 체네렌톨라로 데뷔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임신으로 더 이상의 출연 요청을 승낙하지 못한다. 1935년 3월 29일 그는 출산을 위해 병원으로 옮겨졌고 다음날 아이를 사산했다. 몇 시간후 수페르비아도 아까운 재능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