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경을 극복한 위대함 Elena Obraztsova (엘레나 오브라쪼바)
1939년은 나치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하여 레닌그라드(현재의 생 페테르부르그)를 점령하고 있던 해였다. 세계적 메조소프라노인 엘레나 오브라쪼바는 바로 그 해에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전쟁의 처참함속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죽어가고 있었다. 오브라쪼바의 집 앞에도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어린 엘레나 오브라쪼바는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아야 했다. 오브라쪼바의 식구들은 나치 점령하의 레닌그라드에서 지낼수 없어서 무작정 도시를 빠져 나가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오브라쪼바의 가족들은 어두운 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두 대의 트럭에 타고 얼어붙은 라도가(Ladoga)호수를 건너기 시작했다. 어린 엘레나 오브라쪼바는 첫 번째 트럭의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건너편 언덕에 거의 이르렀을 때 갑자기 얼음이 깨지면서 트럭이 호수로 빠져 들어갔다. 사람들은 가까스로 호수에서 빠져 나왔지만 어린이들 몇 명은 살아나지 못했다. 다행히 오브라쪼바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있었기에 죽음을 면할수 있었다. 하루 종일 눈 내리는 길을 독일군의 감시를 피해서 걷다보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결국 오브라쪼바의 사랑하는 할머니는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길거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어린 엘레나로서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오브라쪼바의 식구들은 다시 레닌그라드로 돌아왔다. 음악에 소질을 보인 어린 엘레나 오브라쪼바는 장래에 오페라 스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가 되는 것이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오브라쪼바의 아버지는 엔지니어였지만 몇가지 악기도 다룰줄 아는 음악애호가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브라쪼바가 성악을 전공하겠다고 하자 노래 솜씨가 신통치 않다는 이유를 들어 오브라쪼바를 타간로그(Taganrog)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도록 종용하였다. 오브라쪼바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고 레닌그라드음악원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안토니나 그리고리에바(Antonina Grigorieva)로부터 오페라를 배웠다. 1962년 그는 23세 때 헬싱키에서 열린 제8회 세계청소년 음악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당당히 금상을 차지했다. 지도교수도 생각지 못했던 쾌거였다. 이듬해 오브라쪼바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소련 글링카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1등을 차지했고 곧이어 볼쇼이 오페라단의 초청을 받았다.
'돈 카를로'의 에볼리
오브라쪼바는 1964-65년 의 볼쇼이 시즌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 버전인 무쏘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마리나(Marina)를 맡아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다음해에 그는 볼쇼이의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에 참가했고 라 스칼라에서 '스페이드의 여왕'(Pique Dame)에 출연하여 찬사를 받았다. 볼쇼이는 몬트리올로 떠나기 직전 라 스칼라에서 ‘전쟁과 평화’를 공연했고 여기에서 오브라쪼바는 마리아를 맡아 커다란 갈채를 받았다. 1975년, 볼쇼이는 미국 순회 연주를 가졌고 오브라쪼바도 당연히 이에 참가하였다. 그는 메트로에서 ‘보리스 고두노프’의 마리나를 맡아 공연 도중 다섯 차례나 커튼콜을 받는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그는 미국 순회공연 도중 ‘전쟁과 평화’, Pique Dame, 그리고 불과 몇 달전 모스크바의 세계초연에 출연했던 몰차노프(Molchanov)의 신작 오페라 ‘조용한 새벽’(The Dawns Are Quiet Here)에 출연하여 박수를 받았다.
1975년 오브라쪼바는 아주체나(일 트로바토레)로서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시즌 오픈에 초청을 받아 루치아노 파바로티, 조안 서더랜드와 함께 공연하였다. 이로서 엘레나는 세계 오페라계의 떠오르는 스타로 등장하게 되었다. 2년후 오브라쪼바는 칠레아의 아드리아나 르쿠브르에서 부이용 공주(Proncesse de Bouillon)를 맡아 레나타 스코토와 함께 공연하였다. 그 이후로 레나타 스코토와 오브라쪼바는 평생 친구로서 지낸다. 몇 년후인 1976년, 엘레나는 메트로의 정식멤버로서 암네리스(아이다)를 맡아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 때의 공연에 대하여 평론가들은 ‘메트로의 최근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데뷔’라고 입을 모았다. 이듬해인 1977년, 그는 역시 메트로에서 델릴라(삼손과 델릴라)로 마치 개선장군과 같은 환영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또 다른 델릴라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음악적으로 엘레나 오브라쪼바는 세 옥타브에 걸치는 높은 음과 낮은 음을 자유롭게 내었다. 하나의 허점도 없었고 옷감을 이어 댄것과 같은 솔기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오브라쪼바는 델릴라의 대명사가 되었다. 엘레나 오브라쪼바의 음색과 음량은 누구도 따라올수 없는 위대한 것이었다.
아이다의 암네리스
오브라쪼바는 그의 경력중 20편이 넘는 오페라 역할을 맡아하였다. 그는 놀라운 음성뿐만 아니라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아티스트였다. 메트로와 라 스칼라가 가장 선호하는 디바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오페라 출연 이외에도 오페라 제작을 직접 맡아 한 일이 있다. 볼쇼이에서 ‘베르테르’를 제작한 것은 아직까지도 얘기꺼리가 되고 있다. 이같은 오페라에 대한 그의 기여를 높이 치하하여서 소련 정부는 1973년 그를 인민예술가로 선정하였으며 1976년에는 레닌상을 받기도 했다. 오늘날 오브라쪼바는 볼쇼이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다. 최근에는 ‘엘레나 오브라쪼바 청소년 성악 경연대회’를 만들어 젊은 후진들을 격려하고 있다. 이 경연대회의 심사위원은 Carlo Bergonzi, Fedora Barbieri, Nicolo Chiuzelev, Victoria de Los Angeles, Renata Scotto 등이다. 오브라쪼바는 1983년 볼쇼이의 지휘자인 알지스 치우라이티스(Algis Ziuraitis)와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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