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메조소프라노

전설속의 예술가 Pauline Viardot-Garcia (폴랭 비아르도-가르시아)

정준극 2008. 2. 28. 13:12
 

▒ 전설속의 예술가 Pauline Viardot-Garcia (폴랭 비아르도-가르시아)


프랑스의 폴랭 비아르도-가르시아는 19세기 초반 유럽을 풍미하였던 전설속의 예술가였다. 그를 메조소프라노가 아닌 예술가라고 부른 것은  폭넓은 지성과 새로운 세대를 동경하는 이상(理想), 그리고 놀라운 예술적 재능을 겸비한 뛰어난 여류였기 때문이다. 폴랭은 당시 파리 사교계의 위대한 주인공이었다. 폴랭은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의 중심에 있었다. 작곡가 카미유 생-생은 폴랭에게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를 헌정하였다. 베를리오즈는 폴랭에 대하여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위대한 예술가’라면서 찬사를 보냈다. 폴랭의 음악적, 극적 재능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한결같은 존경과 갈채를 받았다. 작가이며 극장 감독인 남편 루이 비아르도(Louis Viardot)가 당시 파리 문화계의 주도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폴랭의 활동영역이은 그만큼 넓었다.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폴랭의 진면목은 음악에 대한 한없는 열망에 있었다. 그의 음성은 당시로서 보존할 방법이 없어서 남아 있지 못하다. 하지만 당시 그의 연주 활동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성악가인지 능히 짐작할수 있다. 그의 메조소프라노 음성은 드라마틱한 내면세계의 감정을 순수하게 표현하는 아름다움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악은 어머니로부터 배웠다. 처음에는 아버지 마누엘 가르시아(Manuel Garcia)로부터 성악 레슨을 받았으나 10세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후로는 어머니로부터 성악 레슨을 받았다. 역시 어머니로부터 성악을 배운 여동생 마리아 말리브란도 당대를 풍미하였던 소프라노였다. 폴랭의 성악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찬란하게 빛을 발휘했다. 폴랭은 16세에 브뤼셀에서 콘서트로 데뷔하였고 18세 때인 1839년에는 런던에서 로시니의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를 맡아 오페라에 첫 데뷔하였다. 이듬해인 1840년 폴랭은 파리의 이탈리아극장 감독이며 작가인 루이 비아르도와 결혼하였다. 비아르도는 부인 폴랭의 매니저로서 평생동안 폴랭을 이해하며  살았다. 폴랭이 뚜르게네프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남편 비아르도는 폴랭의 예술적 생활을 이해하듯 이들의 애정어린 친분에 있어서도 놀랄만큼 이해하고 관용하였다. 폴랭은 완성된 음성의 성악가일뿐만 아니라 연기력에 있어서도 극도로 완성된 드라마틱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글룩의 ‘오르페오와 유리디체’에서 오르페오로서 거의 150회 이상을 출연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오르페오로서 역사상 가장 완벽한 비극적 경지를 표현한 성악가는 폴랭이 유일하다는 것이었다. 1862년 폴랭의 ‘오르페오’를 관람한 작가 챨스 디큰스(Charles Dickens)는 ‘말로 표현할수 없는 절정의 연기였다. 그의 음악과 연기는 실로 웅대하고 숭고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작곡은 안톤 헤이차(Anton Reicha)로부터 배웠다. 폴랭은 여러편의 성악곡과 기악곡 이외에도 오페레타를 4편이나 작곡하여 남겼다. 그 중에서 세편의 오페레타 대본은 이반 뚜르게네프(Ivan Turgenev)가 썼다. 러시아가 낳은 세기적 문호 뚜르게네프는 폴랭과 서로 연모하며 평생을 지냈다. 뚜르게네프는 폴랭에 대한 이룰수 없는 연모의 정으로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던 것은 누구나 아는 얘기이다. 뚜르게네프에 대한 폴랭의 사랑도 가히 매우 높았다. 독신으로 살았던 뚜르게네프에게는 자기 집 하녀와의 사이에 사생아 아들을 하나 두었다. 나중에 폴랭은 그 사생아를 자기 아들로 입양하였고 이름도 폴리네트(Paulinette)로 고쳐주었다.


폴랭은 훌륭한 피아니스트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사실 어릴때부터 그는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작정했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프란츠 리스트로부터 정식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기까지 했다. 폴랭은 언제나 파리 지식인들의 중심에 있었다. 그와 교분을 두텁게 하며 지낸 인물들은 여류시인 죠르즈 상드(George Sand), 피아노의 시인 쇼팽, 피아노의 거장 리스트, 작곡가 구노, 베를리오즈, 마이레르베르, 생-생, 이밖에 수많은 문인 예술가들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뚜르게네프를 빼놓을수 없다. 슈만은 폴랭을 위해 작품 24번을 헌정하였으며 마이에르베르는 오페라 ‘예언자’의 휘데(Fides)역할을 폴랭을 염두에 두고 작곡하였다. ‘예언자’의 초연에서 폴랭은 휘데를 맡아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생-생과의 인연은 특별하다. 폴랭을 존경하고 연모했던 생-생은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를 폴랭에게 헌정하기 위해 작곡했다. 이어 생-생은 이 오페라의 초연에 폴랭을 델릴라로서 출연토록 청탁하여 허락을 받았으나 파리 오페라가 공연하기 힘들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할수 없이 폴랭의 저택 마당에 임시로 무대를 가설하고 약식으로 프랑스 초연을 가졌다. 역사상 오페라 여주인공의 집마당에서 그 오페라가 초연된 것은 아마 ‘삼손과 델릴라’가 처음일 것이다. 아무튼 폴랭은 제2막에서 델릴라로 출연하여 생-생을 비롯한 모든 관중들을 감격케 했다.


폴랭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에 능통할 정도로 뛰어난 어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성악곡들은 여러 나라 말로 작곡되었다. 오페라 성악가로서 그는 유럽의 거의 모든 주요 오페라 극장의 무대를 장식했다. 1843년부터 3년동안 러시아의 생 페테르부르그 오페라 극장에 전속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폴랭에 대한 인기는 당대를 치솟았었다. 시인 죠르즈 상드는 1843년 그이 소설 콘수엘로(Consuelo)에서 폴랭을 여주인공의 모델로 삼을 정도였다. 

 

 


폴랭 비아르도-가르시아(어떤 자료에는 폴랭 가르시아-비아르도라고 기록되어 있음)는 1821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스페인 사람들로서 두 사람 모두 성악가였다. 어릴때부터 폴랭은 피아니스트로 교육을 받았으며 간혹 아버지로부터 성악 레슨을 받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성악 레슨을 맡았다. 여동생 마리아 말리브란(Maria Malibran)은 실제로 가족중에서 가장 성공한 성악가였다. 1863년 폴랭과 가족들은 프랑스를 떠나 독일의 바덴-바덴에 정착하였다. 남편이 비아르도가 나폴레옹 3세에 대하여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자 이들 가족은 파리로 돌아왔다. 폴랭은 파리음악원에서 후진들을 교육했다. 1883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생-제르망에 개인 음악살롱을 차리고 음악회를 개최하거나 신인들을 발굴하는 일을 했다.


1910년 폴랭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몽마르뜨 묘지에 안장되었다. 죠르즈 상드와 쇼팽의 묘소로부터 멀지 않은 곳이다. 폴랭 가족이 살던 파리 교외의 빌라 비아르도는 원래 1874년 뚜르게네프가 비아르도에게 선사한 것이었다. 이 곳에서 폴랭은 많은 문인, 예술가들과 새로운 이상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예술 활동을 하였다. 폴랭이 세상을 떠난후 한때 황폐해진 이 별장을 비제 후원회가 복구하였다. 이곳에서 명바리톤 죠르즈 샤미네(Jorge Chamine)가 간혹 마스터 클라스를 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