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메조소프라노

뉴욕의 그리스인 Tatiana Troyanos (타티아나 트로야노스)

정준극 2008. 2. 28. 13:19
 

▒ 뉴욕의 그리스인 Tatiana Troyanos (타티아나 트로야노스)

 


타티아나 트로야노스의 무대 공연은 전설적이라고 할만큼 뛰어난 것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수집은 성격이며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 타입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신경질적이고 흥분하기를 잘했다. 하지만 일단 무대에 나서면 완전히 다른 성격이 되었다. 뜨겁도록 열정적이며 혼신을 다하여 집중했다. 열정으로 뭉친 메조소프라노 소리는 무대를 초월하여 찬란하게 빛났으며 그의 정성을 다한 자세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의 심연으로 이끌어 주었다. 뉴욕의 그리스 가정에서 태어난 트로야노스는 음악과 함께 자라났다. 그리스계 아버지는 테너였으며 독일계 어머니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 트로야노스는 천부적인 음악적 소질을 타고 났지만 어떤 일인지 상당기간 동안 그 재능이 감추어져 있었다. 다만 브로드웨이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등 뮤지컬에 출연하여 노래를 부른 정도였다. 트로야노스의 재능은 줄리아드에서 한스 하인츠(Hans Hainz)로부터 본격적인 성악 공부를 하고부터 폭발한다. 하인츠는 트로야노스가 경험을 쌓도록 하기 위해 루이빌에서 카르멘에 출연토록 한다. 1960년대 중반, 트로야노스는 메트로로부터 출연계약을 맺자는 제안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트로야노스는 아직은 주역을 맡을 정도의 실력이 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렇다고 단역이나 조역만 맡는다면 그것은 자기의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트로야노스는 어머니가 독일인이어서 독일어에도 상당한 자신이 있었다. 트로야노스는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의 오디션에 참가하여 합격한다. 이곳에서 그는 오페라에 대한 실제 경험을 쌓기 시작한다. 트로야노스는 오페라에 대하여 거의 광적이었다. 거의 매일밤 오페라 공연을 지켜보며 배우고 연습하기를 계속하였다. 박자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트로야노스는 원래 성미가 조급한 편이었다.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면 초조해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의 타고난 음악성으로 서서히 극복되었다. 그는 오페라 세계에서 서로 경쟁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경쟁에 유리하기 위해서 남을 험담하거나 비방하는 것은 극히 싫어했다. 아무튼 그는 음악을 통하여 자기의 불같고 모난 성격을 진정시키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그가 등장한 무대를 더욱 감칠맛 있게 완성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비록 무대 위에서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것이다. 


유럽에서 귀중한 경험을 쌓은 트로야노스는 정상급 아티스트가 되어 뉴욕으로 돌아온다. 지휘자 제임스 르바인(James Levine)은 트로야노스가 메트로로 돌아 올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 이후의 얘기는....역사 그 자체였다. 트로야노스는 음악을 생활 그 자체로 간주했다. 첫 번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실력을 증진하기 위해 언제나 쉬지않고 노력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나의 삶의 가장 중요한 파트이다. 음악은 나를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이를 무척 감사히 생각한다. 나는 내가 노래를 잘 부르면 기분이 좋다. 마치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타티아나 트로야노스는 1993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많은 활동을 할수있는 55세였다. 뉴욕의 그리스 타운은 트로야노스를 추모하기 위해 사무실과 상점의 문을 닫았다. 그는 마리아 칼라스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그리스인들에게 희망을 준 전설적인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