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메조소프라노

영원한 전설 Teresa Berganza (테레사 베르간자)

정준극 2008. 2. 28. 13:20
 

▒ 영원한 전설 Teresa Berganza (테레사 베르간자)


스페인의 테레사 베르간자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는 아름다운 스페인의 귀부인이다. 베르간자는 세기적 메조소프라노이다. 베르간자의 화려한 경력은 비록 모차르트와 로시니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뒤안길에는 스페인의 향기가 묻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오페라와 가곡뿐만 아니라 스페인 전통의 차르추엘라(스페인의 극장뮤지컬 장르)에도 즐겨 출연하여 갈채를 받았다. 베르간자의 대표적 역할은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와 ‘피가로의 결혼’에서 케루비노이다. 비록 스페인 사람이 아닌 로시니와 모차르트가 이들 작품을 만들었지만 스페인이 무대임을 생각할 때 베르간자는 바로 이들 오페라의 주인공으로서 적격자가 아닐수 없었다. 베르간자는 세빌리아를 무대로 하는 카르멘에 있어서도 최적이었다. 그는 베르간자 특유의 카르멘을 창조해 냈다. 이를 위해 그는 스페인의 집시 마을을 찾아가 이들의 생활과 문화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공부까지 했다. 베르간자는 음악에 있어서 진정으로 폭넓은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이며 오르가니스트이기도 했다. 지휘와 작곡도 공부했다. 무대연출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음성은 화려하며 부드럽게 감싸는 능력이 있다. 소프라노를 능가하는 고음은 대단히 인상적이며 저음에서도 완벽함을 들려준다. 그는 성악의 영역을 넘나들며 노래를 부를수 있는 몇명 안되는 프리마 돈나이다.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는 모든 소프라노의 염원이다. 1960년, 베르간자는 라 스칼라에서 메조소프라노로서 비올레타를 맡아 완벽한 음성과 아름다운 모습으로서 격찬을 받았다.

 


베르간자는 1935년 (어떤 자료에는1936년)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우연하게도 이탈리아의 모데나에서 파바로티와 미렐라 프레니가 태어난 해이다. 베르간자는 마드리드 음악원에서 엘리자베트 슈만의 제자인 롤라 로드리게즈 아라곤(Lola Rodruguez Aragon)으로부터 본격적인 성악 수업을 받는다. 아라곤은 훌륭한 선생이었다. 그는 베르간자의 원광석과 같은 소리를 세련되게 가다듬어 준다. 그리고 작품해석에 대한 기나긴 힘든 과정을 함께 견디며 완성해간다. 아라곤은 베르간자가 오페라에 데뷔하기 전에 우선 가곡을 충분히 익히도록 한다. 그리하여 1956년, 베르간자가 20세 때에 첫 가곡연주회를 갖는다. 슈만의 ‘여인의 사랑과 생애’였다. 베르간자는 슈만의 노래 사이클을 통하여 음악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생애는 음악과 끈이 매어져 있음을 확신한다. 이듬해 그는 프랑스 액상 프로방스(Aix-in-Provent) 페스티벌에서 도라벨라(여자는 다 그래)를 불러 주목을 받는다. 이어 1958년에는 글린드본 페스티벌에서 케루비노(피가로의 결혼)를 맡아 갈채를 받는다.

 

'우나 보체 포코 파'를 타이틀로 내건 베르간자의 데카 음반

 

같은 해에 베르간자는 미국으로 진출한다. 첫 공연은 달라스에서였다. 칠레아의 메데아에서 하녀 네리스(Neris)를 맡은 것이었다. 주인공인 메데아는 마리아 칼라스가 맡았다. 훗날 베르간자는 마리아 칼라스를 회상하면서 ‘나는 칼라스로부터 오페라 연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스테이지에서는 어떤 훈련을 쌓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지금까지 배우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라고 털어놓았다. 칼라스는 베르간자보다 10여년이나 위였다. 그래서 칼라스는 베르간자를 마치 친동생처럼 보살펴주었다. 케루비니의 메데아에서 네리스는 여주인공 메데아의 하녀이다. 네리스는 관례적으로 늙은 여인으로 분장된다. 칼라스는 하녀라고 해서 반드시 나이가 많게 분장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메데아가 젊은 여인이므로 함께 있는 네리스도 젊은 여인이어야 호흡이 맞는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베르간자를 젊은 하녀로 분장시켰다. 베르간자는 칼라스의 충고 덕분에 얼굴과 의상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 놓고 노래를 부를수 있었다. 같은 해에 베르간자는 코벤트 가든에서 로지나(세빌리아의 이발사)로 데뷔했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통하여 그는 주로 로시니와 모차르트를 노래했다.

 

 


카르멘을 처음 부른것은 1977년이었다. 베르간자로서는 음악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대단히 의미있는 출연이었다. 공연을 앞두고 베르간자는 세빌리아의 집시 여인들을 관찰하기 그곳을 방문하였던 것은 이미 설명한바 있다. 이와함께 원작인 프로스퍼 메리메의 소설을 몇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스코어를 아주 면밀하게 공부했다. 베르간자는 카르멘의 이미지를 자기의 연구를 바탕으로 새롭게 개발해냈다. 베르간자는 카르멘이 제한된 문화와 관습 속에서도 자유의 정신으로 살았던 여인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카르멘이 창녀나 요부와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다정하고 감미로운 면이 있는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공연이후 일부 평론은 그의 새로운 카르멘 해석에 갈채를 보냈지만 다른 일부는 카르멘으로서 피와 같은 뜨거운 열정과 배짱이 부족하며 지나치게 숙녀다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베르간자는 ‘모르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진짜 스페인의 집시라면 예의를 갖출줄 알며 아무리 빈곤하더라도 어느 정도 의상에 신경을 쓴줄 안다고 말했다. 그리고 카르멘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화려하거나 거만하며 정절에 둔감하여 문란하지는 않다고 말하였다. 베르간자는 돈 조반니의 체를리나에 대하여도 같은 생각을 가졌다. 돈 조반니를 영화로 만든 것이 있다. 베르간자가 체를리나를 맡았다. 그는 체를리나를 성숙하며 이지적인 여인의 이미지로서 노래를 불렀다. 일반적인 생각대로 단순하며 유혹에 빠져 눈이 머는 여인이라는 인식을 불식한 것이었다. 

 


독창자로서 베르간자는 1964년 카네기 홀에서 콘서트를 가져 화려한 갈채를 받는다. 그의 콘서트 레퍼토리는 스페인,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가곡과 민요에 이르는 폭 넓은 것이다. 베르간자는 피아니스트인 펠릭스 라빌라(Felix Lavilla)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레코딩도 여러번 함께 했으며 연주회도 정기적으로 가져왔다. 1992년, 베르간자는 세빌리아 엑스포 오프닝에 참석하여 축하 연주를 했다. 같은해 베르간자는 스페인이 낳은 유명 성악가 5명과 함께 1992년 바르셀로나 하계 올림픽에서 특별 공연을 가졌다. 호세 카레라스, 플라치도 도밍고, 몽세라 카바예, 쟈코모 아라갈, 후안 폰스가 함께한 역사적 공연이었다. 모두들 중후한 연배에 들어섰지만 젊은 날의 영광스러운 빛을 잃지 않고 훌륭한 노래를 불러 주어 세계를 환호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연주였다. 1994년 베르간자는 스페인 왕립 예술원의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여성으로서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베르간자는 거장으로서의 화려한 테크닉, 음악적 지성미, 무대를 현혹시키는 모습으로 사랑받았던 20세기 최고의 메조소프라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