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콘트랄토

가장 위대한 콘트랄토 Marian Anderson (마리안 앤더슨)

정준극 2008. 2. 28. 14:18
 

▒ 가장 위대한 콘트랄토 Marian Anderson (마리안 앤더슨)

 


세기적 콘트랄토인 마리안 앤더슨은 1897년 2월 27일 펜실바니아주 사우드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연합침례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콘트랄토로 분류한다. 그러나 그는 소프라노의 고음과 바리톤의 낮은 음까지 낼수있는 천부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다. 마리안은 어릴때 어려운 생활환경에서 자라났다. 마리안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어머니가 청소부, 세탁부로 일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맡아야 했다. 어머니의 신앙심과 생활력은 마리안의 일생을 통하여 깊은 영향을 준 것이었다.

 

1939년 링컨 메모리얼 센터에서

 

연합침례교회의 신도들은 마리안이 가난하여 성악 레슨조차 받을수 없다는 사정을 알고 모금 연주회를 열었다. 연주회의 광고 전단에는 ‘베이비 콘트랄토! 단 열 살! 와서 들으시오!’라고 적혀있었다. 그리하여 마리안은 교회의 도움을 받아 개인 레슨을 받을수 있었다. 마리안은 19세인 1925년부터는 성악가 쥬세페 보게티로부터 본격적인 레슨을 받았다. 보게티는 마리안을 루이손(Lewisohn) 스타디움 콘서트 경연대회에 나가도록 권유했다. 우승자에게는 뉴욕필과 공연하는 특전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모두 3백명이 응모하였다. 예상을 뒤엎고 흑인인 마리안이 우승을 차지하였고 그해 8월 뉴욕필의 연주회에 출연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그후 마리안은 로센발트(Rosenwald) 재단의 장학금을 받게 되어 영국과 독일에서 음악 공부를 할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독일 리트를 배웠다. 독일 리트는 나중에 마리안 연주회의 주요 레퍼토리가 된다. 1930년부터 35년까지 그는 20대의 젊은 나이로 유럽 각국에서 순회 연주회를 가져 대찬사를 받는다. 마리안은 유럽에서 116회의 리사이틀을 가졌다. 1935년 잘츠부르크에서의 연주회에는 마에스트로 토스카니니와 브루노 발터, 그리고 세기의 소프라노 로테 레만이 참석하였다. 연주회가 끝나자 토스카니니는 마리안을 만나 ‘당신과 같은 음성은 1백년에 한번 들을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연주회에 참석한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는 마리안이 아베 마리아를 부를때 너무나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도 있다. 

 


미국으로 돌아온 얼마후인 1939년, 마리안은 워싱턴의 콘스티튜션 홀(Constitution Hall)에서 연주회를 갖기로 계획했다. 이 회당의 소유자는 DAR(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이라고 하는 단체였다. DAR은 마리안이 흑인(African American)이란 이유로 공연을 거절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로는 마리안이 연주회를 갖고자 했던 날은 이미 다른 예약이 되어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통령 영부인인 엘레아노 루즈벨트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하여 당장 DAR의 회원을 탈퇴했다. 그리고 마리안이 부활절 주일 아침 링컨 기념관 야외에서 공연을 하도록 주선했다. 과연 위대한 대통령과 위대한 영부인이었다. 마리안 앤더슨은 아브라함 링컨이 내려다 보는중에 7만 5천의 관중을 앞에 두고 노래를 불렀다. 그는 첫 곡으로 America를 불렀다. 관중들은 열광했다. 이날의 연주회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의 연주회는 미국의 다른 흑인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이후로부터 마리안은 인종차별이 있는 어느 곳에서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1943년 워싱턴의 내무성 벽면에 거대한 벽화가 오픈되었다. 마리안 앤더슨의 부활절 연주회를 그린 것이다. 마리안은 그의 자서전에 이 사실을 ‘주님, 어찌 좋은 아침인지요!’라고 썼다. 그는 ‘세상에는 의로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음은 무엇이 의로운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저하고 망설입니다. 다른 누가 앞장을 서야 그때야 따라갑니다. 아마 바로 당신이 그 앞장을 서주기를 바라는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1941년 마리안은 필라델피아 시로부터 보크(Bok)상을 받았다. 가장 자랑스런 시민에게 주는 상이었다. 흑인으로서는 처음 받는 상이었다. 상금은 1만불이었다.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다. 마리안은 이 상금으로 피부의 색깔에 관계없이 모든 음악도에게 해당되는 마리안앤더슨장학재단을 만들었다. 1943년 마리안은 오르페우스 피셔(Orpheus Fisher)라는 건축가와 결혼하였다. 그는 코네티커트 댄버리(Danbury)에 자기가 직접 설계하여 집을 짓고는 마리아나 농장(Marianna Farm)이라고 이름 붙였다.

 


 

1955년 1월 7일, 마리안은 메트로에서 가면무도회의 울리카를 맡아 공연했다. 메트로에서 주역급을 맡아 공연한 두번째 흑인이었다(첫번째는 마티윌다 돕스). 소프라노 진카 밀라노프(Zinka Milanov), 테너 얀 피어스(Jan Peers), 바리톤 레오나드 워렌(Leonard Warren)이 함께 출연한 역사적인 공연이었다. 그 공연을 기념하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다시 레코딩이 이루어졌다. 이 음반은 마리안 앤더슨의 메트로 데뷔를 기념하는 역사적인 것일뿐만 아니라 진카 밀라노프가 2막의 트리오에서 박자를 맞추지 못하고 대실수를 한것을 다시 녹음하지 않고 그대로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1956년 마리안은 미국과 유럽에 고별 연주회를 갖는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비록 비공식적 은퇴를 했지만 미국무성의 요청으로 12개 아시아 국가에서 순회공연을 갖는다. 이 때에 한국도 방문했다. 워커힐에서 일반을 위한 공연을 가졌고 이어 용산에서 미군장병들을 위한 특별공연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흑인장병들이 감격어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한 장의 사진이었다. 루이 암스트롱이 덕수궁에서 연주회를 가졌을 때 보다 더 감동적이었던것 같았다. 1958년 마리안 앤더슨은 미국의 UN대표단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63년  대통령이 직접 주는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1991년 그는 흑인의 유전병인 혈구성 빈혈(Sickle-cell anemia) 어린이를 위한 성 크리스토퍼 병원 개관식에 참석하였다. 마리안 앤더슨을 기리기 위해 문을 연 병원이었다. 1993년 그는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콘트랄토가 사라진 것이었다.

 

 미국의 전설적인 콘트랄토 마리안 앤더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