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테너

하늘이 내린 재능 Giuseppe Anselmi (주세페 안셀미)

정준극 2008. 3. 1. 23:13
 

▒ 하늘이 내린 재능 Giuseppe Anselmi (주세페 안셀미)

 

 

                                                            데뷔 시절의 안셀미

 

20세기 초반을 화려하게 장식한 이탈리아의 테너 주세페 안셀미는 1876년 시실리의 카타니아(Catania)지방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10세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명문 나폴리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작곡, 피아노, 바이올린을 공부한후 12세 때에 이 음악원을 수료한 대단한 재능의 인물이었다. 안셀미가 어느때부터 성악에 전념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16세 때부터 순회 오페레단에 합류하여 지방공연에 참가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10대 초반부터 스스로 오페라 성악가로서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느날 유명한 음악출판가인 줄리오 리코르디(Giulio Ricordi)는 안셀미의 노래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아 만일 더 공부한다면 훌륭한 테너가 될것으로 확신했다. 그리하여 안셀미를 유명한 성악교사인 루이지 만치넬리(Luigi Mancinelli)에게 추천하여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몇 년 후인 1896년, 안셀미는 20세때에 아테네에서 투리두(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첫 오페라 데뷔를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자료가 없어서 확실하지는 않다. 오히려 1900년 제노아에서 로돌포(라 보엠), 만투아 공작(리골레토), 에드가르도(루치아)를 맡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1900년을 첫 오페라 데뷔의 해로 인정해야 할것이다. 같은 해에 그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에서 마스카니의 새로운 작품인 Le Maschere에 출연하였다. 상대역은 안젤리카 판돌휘니와 리나 자케티(Rina Giachetti)였다. 리나 자케티는 당시 카루소의 애인의 여동생이었다.

 

마농의 데 그류


이듬해인 1901년 코벤트 가든 데뷔는 리골레토에서 공작이었다. 당시 질다는 수잔느 아담스(Suzanne Adams)였다. 같은 해 여름, 안셀미는 코벤트 가든에서 넬리 멜바(미미)와 함께 라 보엠에서 로돌포를 맡아 갈채를 받았다. 그때 안셀미는 불과 25세의 신인이었을 뿐이었다. 뛰어난 미성과 준수한 용모를 지닌 그는 오페라의 영웅으로서 세계 어느 곳에서나 찬사를 받으며 무대를 수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들은 호의적이 아니었다. 코벤트 가든에서의 로돌포에 대하여는 ‘이탈리아 테너들의 좋지 않은 습성을 종합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라고 말하였으며 타임지는 한술 더 떠서 ‘앞으로 몇 년 안에 그의 음성은 영원히 망가질것’이라고 썼다. 예나 지금이나 평론의 내용이 정확치 않은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는 런던에도 자주 모습을 보였지만 생 페테르부르그, 부에노스아이레스, 밀라노(라 스칼라), 바르샤바, 마드리드, 베를린, 비엔나, 브뤼셀, 몬테 칼로, 파리 등 세계를 주름잡았으며 대표적인 역할은 카바라도씨(토스카), 로리스(훼도라), 마우리치오(아드리아나 르쿠브로), 오사카(이리스), 렌스키(유진 오네긴), 에드가르도(람메무어의 루치아), 나디르(진주잡이) 등 헤아릴수 없다. 파리에서는 1907년 장 드 레즈케(Jean de Reszke)가 세운 극장에서 알마비바(피가로의 결혼)을 맡은 것 뿐이었다. 상대역인 백작부인은 당대의 아델리나 패티(Adelina Patti)였으며 이 공연은 패티의 마지막 오페라 출연이었다.

 

 아드리아나 르쿠브러에서 마우리치오


안셀미는 1차 대전으로 거의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이와 함께 그의 음성도 예전같지는 않게 되었다. 결국 그는 은퇴를 결심하였다. 안셀미의 경력은 뛰어난 재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짧은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 성악가들이 은퇴후 그러했던 것처럼 안셀미도 성악 교수로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곡도 어느 정도 했다. 그의 마지막 무대 출연은 1926년, 그가 50세 때에 라팔로(Rapallo)라는 곳에서의 어떤 자선음악회였다. 그는 이 음악회에서 노래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제자들의 피아노 반주를 하는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3년후인 1929년, 그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창 활동할수 있는 시기였던 53세 때였다. 안셀미는 멋있는 배우였다. 키가 크고 핸섬하게 생겼다. 당시 그는 이른바 ‘마티네 아이돌’(Matinee Idol)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장 드 레즈케와 거의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잘 생겼다는 것은 단순히 보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의 아름다움은 노래에 있었다. 그는 사랑스럽고 지성적인 음성을 지녔다. 그의 개인생활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마치 미스터리와 같았다. 아마 너무나 폭로되는 생활을 달가워하지 않았던것 같았다. 반면 그는 예술에 대하여 진정으로 무한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언에서 자기의 심장을 마드리드에 보내 달라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마드리드는 음악혼의 고향이었다. 그의 심장은 마드리드의 국립극장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베르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