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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카루소 Mario Lanza (마리오 란자)

정준극 2008. 3. 2. 17:24
 

▒ 제2의 카루소 Mario Lanza (마리오 란자)

 

 

1921년 ‘언젠가는 당신을 찾을수 있을 거야’(Someday I'll Find You)라는 노래가 전 미국을 휩쓰는 인기를 차지하고 있었다. 금주법은 그때까지만 해도 효력을 갖고 있었고 미국의 대통령은 워렌 하딩이었다. 그해 8월 2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테너인 엔리코 카루소가 세상을 떠났으며 같은해 1월 31일 필라델피아 남부 중심가에 있는 크리스찬 스트리트 636번지에서 알프레도 아놀드 코코짜(Alfredo Arnold Cocozza)가 태어났다. 그 집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있으며 펜실바니아  사적지라는 표지가 붙어있다. 그 곳으로부터 두 블록 떨어진 곳에는 마리오 란자 기념관이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텔로

 

집에서는 알프레도를 프레디(Freddie)라고 불렀다. 어린 프레디는 집안에 있는 커다란 빅터롤라 축음기에 매달려 살았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아리아가 담겨있는 78회전의 SP 레코드를 듣기를 좋아하였다. 엔리코 카루소의 음반이었다. 곧이어 프레디는 카루소의 아리아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그 아리아에 대한 스토리를 찾아서 읽기를 좋아하였다. 이렇게 하여 프레디는 비록 10대의 소년이었지만 다른 중견 음악가들과 오페라에 대하여 토론을 벌일 정도가 되었다. 프레디는 어릴때 바이올린을 배웠다. 하지만 프레디의 마음은 오페라에 남아 있었다. 아들 프레디가 성악에 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인식한 어머니 마리아 란자 코코짜(Maria Lanza Cocozza)는 아들의 성악 레슨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을 다녔다. 프레디는 당시 상당한 명성이 있는 이렌느 윌리암스에게서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팔리아치에서


1942년 7월 유명한 지휘자 세르게 쿠쎄비츠키(Serge Koussevitzky)가 필라델피라를 방문하였고 우연한 기회에 프레디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지휘자 쿠쎄비츠키는 프레디의 노래에 엄청난 감명을 받았다. 프레디가 21세의 청년때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카루소가 살아왔다’고 말하며 즉각적으로 프레디를 탱글우드에서의오페라에 출연토록 주선했다. 프레디는 니콜라이의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The Merry Wives of Windsor)에서 펜튼(Fenton)을 맡게 되었다. 프레디는 오페라 출연과 함께 어머니의 이름 Maria의 남성형인 Mario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Cocozza라는 성 대신에 어머니의 결혼전 이름인 Lanza를 성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마리오 란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캐스린 그레이슨과 함께 출연한 영화


유럽에서 2차 대전의 불길이 치솟자 미국도 참전하게 되었고 란자도 입대하게 되었다. 란자에게는 군복을 입은 새로운 관중이 생긴 것이다. 1945년 종전과 함께 제대하기 전, 그는 정훈용 영화 2편에 출연하였다. on the Beam 이라는 영화와 Winged Victory였다. 이즈음에 마리오의 앞에 군대 친구의 여동생인 매력적인 베티 힉스(Betty Hicks)가 등장하였고 두 사람은 곧이어 사랑에 빠져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4월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콜린, 엘리사, 데이몬, 마르크의 네 자녀를 두었다.


종전과 함께 제대한 마리오는 약 1년동안 유명한 엔리코 로사티 선생에게서 철저한 성악공부를 하였다. 로사티는 위대한 오페라 황금시대에 테너 베냐미노 질리를 키워낸 인물이었다. 이어 란자는 콜럼비아 아티스트회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벨칸토 트리오의 테너로서 소프라노 프란시스 옌드(Frances Yeend)와 바리톤 조지 런던(George London)과 함께 순회연주를 가졌다. 1947년 벨칸토 트리오는 헐리우드 보울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이때 MGM 영화사의 거장 제작자 루이스 마이어(Louis Mayer)가 란자를 주목하였고 이로부터 그의 인생은 일대 전환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MGM은 란자가 결코 거절하기 어려운 대우를 제안하였다. 게다가 RCA 빅터 레코드와의 음반 취입 계약도 주선해 주었다. 마리오가 영화 촬영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우연하게도 뉴 오를레앙스 오페라에서 라 보엠의 핀커튼을 맡아 달라는 청탁이 들어왔다. 1948년 4월이었다. 나비부인은 대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이듬해 MGM의 ‘그 밤의 키스’(That Midnight Kiss)라는 영화가 완성되었고 개봉되자마자 전국적인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란자는 하루밤 사이에 은막의 스타가 되었다. 그 다음해인 1950년 두 번째 영화가 나왔다. ‘뉴오를레앙스의 축배’(Toast of New Orleans)였다. 다음해에 마리오는 참으로 뜻밖에도 어릴때부터의 우상인 엔리코 카루소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위대한 카루소’(The Great Caruso)라는 영화에서 카루소 역을 맡게된 것이다. 이 영화는 음악영화로서 사상 최대의 히트를 거두었으며 이로서 란자는 세계 최정상의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어 1952년은 ‘그대는 나의 것이기 때문에’(Because You're Mine)로 다시한번 세계적인 인물로 올라서게 된다.

 

나비부인에서 (캐스린 그레이슨과 함께)


1954년 란자는 ‘황태자의 첫사랑’이라는 영화에 출연키로 되어 있었으나 음악의 선곡 등 예술적 문제 때문에 MGM을 떠난다. ‘황태자의 첫 사랑’에서 란자가 맡을 역할은 미남배우 에드먼드 파돔이 맡았으나 사운드 트랙은 란자의 노래를 사용하였다. RCA 빅터는 이 사운드 트랙을 LP 판으로 만들었고 이 음반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백만장 판매라는 기록을 세우는 히트를 하였다. 1956년 란자는 워너 브러스사 제작의 세레나데(Serenade)에 출연하여 세계의 팬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듬해 란자는 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에 가서 살기로 결정하여 미국을 떠났지만 계속 연주활동을 하여 팬들을 열광케 했다. 이탈리아에 정착한지 얼마후 란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연주를 하여 대대적인 찬사를 받았으며 그후 생의 마지막 두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로마의 일곱 언덕’(The Seven Hills of Rome)과 ‘첫 사랑’(For The First Time)이었다. 미인 소프라노 배우인 캐트린 그레이슨(Kathryn Grayson)은 이 두편의 영화에서  마리오의 상대역으로 공연하였다. 두 사람은 가족과 같은 평생 친구였다. 란자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 가족과 함께 있었던 사람도 그레이슨이었다.

 

캐스린 그레이슨과 출연한 영화


1959년 10월의 어느날, 란자는 왼쪽 다리에 참을수 없는 통증을 느낀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정맥염이라는 병이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7일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온 세계는 마리오의 급작스런 죽음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약 다섯달후 사랑하는 아내 베티도 란자의 곁으로 떠났다. 약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마리오 란자가 남긴 음반과 영화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는 희망을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사랑과 추억을 남겨주었다.


란자의 소리가 뛰어난 이유는 다음 세가지이다. 첫째 그의 노래는 언제나 남성적이고 언제나 로맨틱하며 언제나 기분을 좋게 만든다. 두 번째 이유는 소리에 정확한 힘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란자는 하이 C를 넘어 D까지 올라갈수 있으며 그렇게 고음인데도 듣기에 아주 편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경이로운 것은 소리 그 자체이다. 바리톤 음성이면서도 높은 음을 낼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란자는 두 개의 페달, 즉 하나는 부드러우며 다른 하나는 굵은 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카루소 이후 최대의 테너라는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란자의 노래소리를 어떻게 평가할수 있을까? 1947년 시카고의 그랜드 파크에서 5천명 이상의 청중을 위해 노래를 부른적이 있다. 시카고 트리뷴지는 ‘제일 뒤에 서있는 사람들도 마치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노래를 들었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