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테너

오페라의 제왕 Placido Domingo (플라치도 도밍고)

정준극 2008. 3. 2. 17:36
 

▒ 오페라의 제왕 Placido Domingo (플라치도 도밍고)

 

 

플라치도 도밍고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스페인 출신의 테너이다. 그는 처음에 바리톤으로 시작하였으나 곧이어 테너의 훈련을 받아 폭넓은 음역에서 힘이 있고 밝게 울려퍼지는 뛰어난 테너가 되었다. 그의 레퍼토리도 음역만큼 폭이 넓다. 프랑스(파우스트, 베르테르), 독일(로엔그린, 파르지팔), 이탈리아(일 트로바토레, 돈 카를로, 오텔로) 등 어떠한 역할이든지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최근 그는 오페라 지휘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는 두 오페라단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워싱턴오페라단과 로스앤젤레스 오페라단이다.

 

돈 카를로


도밍고는 1941년 1월 21일 마드리드에서 태어났으나 여덟살때 자르추엘라 공연단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멕시코로 갔다. 그는 멕시코시티의 국립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했으나 성악에 뜻을 두고 학생시절 바리톤으로 여러차례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그러나 테너로서의 재능을 파악한 교수의 권유에 따라 테너로서의 훈련을 받았고 1959년 불과 18세 때에 알프레도(라 트라비아타)를 맡음으로서 이후 거의 30년에 걸친 오페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도밍고는 오페라 테너로서 거의 120여 역할을 맡아했다. 그리고 그만큼의 음반도 내놓았다. 주로 소니 클래식 라벨이었다. 대표적인 오페라는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 샤펜티어의 루이제, 푸치니의 ‘황금서부의 아가씨’, 나비부인, 제비(La Rondini), 르 빌리, 베르디의 아이다, 루이자 밀러, 일 트로바토레, 칠레아의 아드리아나 르쿠브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 마스카니의 이리스(Iris), 마스네의 르 시드(Le Cid),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안토니오 고메스의 일 과라니(Il Guarany) 등이다. 도밍고는 세계의 거의 모든 유명 오페라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특히 메트로에서는 18개 시즌의 오프닝을 장식하였다. 이것은 카루소 이후 최고로 많은 오프닝 출연이었다. 또한 여러편의 세계초연을 기록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볼프-페라리의 슬라이(Sly)등이다. 그의 레퍼토리는 대부분의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페라를 망라하는 것이다. 한편 그는 부단 없이 새로운 역할에도 도전하여 바그너의 파르지팔, 로엔그린, 지그문트(발퀴레)를 맡아 찬사를 받았다.

 

라 트라비아타에서 테레사 스트라타스와 함께


1981년 도밍고는 오페라 무대 이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포크송가수 겸 팝송가수인 존 덴버와 함께 Perhaps Love를 음반으로 내놓은 것이다. 1990년, 그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The Three Tenors 를 구성하여 로마 월드컵 오프닝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이 연주회는 원래 ‘카레라스재단’을 위한 모금목적의 1회성이었으나 대성공에 힘입어 그후 계속 연주회를 가져 세계에 기쁨을 주었다.

 


그의 레퍼토리는 모차르트로부터 베르디, 베를리오즈로부터 푸치니, 바그너로부터 지나스테라(Ginastera), 스페인과 나폴리 멜로디로부터 현대의 팝송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카버하는 것이다. 그는 이 모든 역량을 레코딩으로, 비디오와 필름으로 남겨 놓았다. 도밍고는 자선연주회를 통하여 수많은 불우이웃돕기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수백만 달러를 모금하여 1985년 멕시코지진피해자들을 도왔으며 이밖에도 아카풀코 토사사태, 아르메니아 지진을 위해서도 도움을 주었다. 그가 거의 매년 Christmas in Vienna 콘서트를 가지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2000년에는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크리스마스 비엔나 콘서트를 가졌으며 2001년에는 토니 베네트, 바네싸 윌리엄스, 샬로테 쳐치와 함께 가졌다. 도밍고는 아마 가장 많은 훈장, 표창, 공로패를 받은 성악가일 것이다. 가장 최근의 것은 케네디센터 명예공로상이었다. 그러한 표창에는 대부분 ‘오페라의 왕’(King of Opera)이라는 칭호가 붙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음악의 진정한 르네상스 맨’(A True Renaissance Man in Music)이라고 표현되었다.

 

오텔로


테너로서 첫 오페라 데뷔는 알프레도(라 트라비아타)였으며 그후 이스라엘국립오페라에서 2년반 동안 활동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12개의 서로 다른 역할로 280회의 공연을 가져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어 그는 1966년 뉴욕시립오페라에서 자니스테라의 돈 로드리고(Don Rodrigo)의 세계초연에 출연했으며 1968년에는 메트로에서 아드리아나 르쿠브로의 마우리치오(Maurizio)로서 데뷔하였다. 그는 메트로에서 30여 시즌동안 약 40 역할로서 4백여회의 공연을 하였다. 이것은 카루소 이후 가장 많은 공연을 가진 경우였다. 그러면서 라 스칼라, 코벤트 가든, 파리의 바스티유 오페라,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시카고 리릭 오페라, 로스앤젤레스 오페라음악센터, 비엔나 슈타츠오퍼,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도 계속 등장하였다. 오페라 지휘자로서 도밍고는 런던, 비엔나, 마드리드 등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워싱턴오페라단의 일본 공연때에는 오텔로의 타이틀 롤을 맡은것 이외에도 토스카를 지휘하여 갈채를 받았다.

 

라 보엠에서 로돌포

 

콘서트에 있어서는 그동안 몇회의 연주회를 가졌는지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남미로부터 극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미국의 전역을 순회하는 연주회를 가졌으며 유럽에서는 연주회를 가지지 않았던 나라가 없다. 도밍고는 사상 처음으로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독창회를 가진 성악가이다. 날씨가 나빴지만 40만명이라는 기록적인 숫자가 센트럴 파크에 몰려왔다. 2000년에 그는 동료인 카레라스 및 파바로티와 함께 세계 순회연주를 가졌다. 토쿄에서부터 시작하여 뉴욕, 런던, 비엔나, 스웨덴의 요테보리를 거쳐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끝난 연주회였다. 2007년에는 절친했던 동료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세상을 떠났다. 도밍고는 남은 생애를 오페라를 위해 더욱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2008년으로서 67세가 되었다.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