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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오텔로 Renato Zanelli (레나토 차넬리)

정준극 2008. 3. 2. 17:38
 

▒ 비운의 오텔로 Renato Zanelli (레나토 차넬리)

 


레나토 차넬리(원래 이름은 Renato Zanelli Morales)는 남미 칠리의 발파라이소(Valparaiso)에서 1892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탈리아인이었고 어머니는 칠리 여인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불과 2세때에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기숙학교에 보내져 교육을 받았다. 19세때에 군복무를 위해 칠리로 돌아온 그는 제대후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였다. 어느날 그의 집에서 열린 사교 파티에서 그는 손님들을 위해 노래 한곡조를 불렀다. 마침 이탈리아에서 온 테너 안젤로 퀘르제(Angelo Querzé)가 청년 차넬리의 노래를 듣고 ‘아니, 칠레의 발파라이소에도 이런 음성이 있다니!’라며 감격하여 칠레에 머물면서 3년 동안 차넬리에게 개인 성악 레슨을 해주었다. 차넬리의 음성은 금강석과 같이 연마되었고 이탈리아인 후예로서 오페라에 대한 감각적인 본능으로 연기를 터득하였다.

 

오텔로. 테너 타마뇨(Tamagno)의 진정한 후계자


1916년, 그는 바리톤으로서 칠레의 산티아고 오페라극장에 데뷔하였다. 구노의 파우스트에서 발렌티노(Valentino)를 맡은 것이었다. 이듬해에는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루나 백작(일 트로바토레)와 토니오(팔리아치)로서 모습을 보였다. 그로부터 2년후인 1918년 아마 퀘르제 선생의 적극적인 권유를 받아 뉴욕으로 떠나 유명한 스페인 출신의 베이스인 안드레스 페렐로 데 세구롤라(Andrés Perelló de Segurola)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세구롤라는 퀘르제 선생의 오랜 친구였다. 세구롤라는 차넬리와 함께 미국 순회연주회를 주선했다. 이들은 순회 연주는 메트로 음악총감독인 줄리오 가티-카사짜(Giulio Gatti-Casazza)로부터 오디션을 받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가티-카사짜는 차넬리의 노래를 단 한번 듣고서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 차넬리는 그 자리에서 메트로의 주연급 테너로 발탁되었다. 메트로 역사에 있어서 거의 유례가 없는 조치였다. 그리하여 차넬리는 당시 메트로를 압도하고 있던 파스쿠알레 아마토, 주세페 데 루카, 안토니오 스코티 등과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그의 메트로 공식 첫 데뷔는 1919년(우리나라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 아이다의 아모나스로(Amonasro)를 맡은 것이었다. 함께 출연한 성악가들은 클라우디오 무치오, 가브리엘라 베산초니, 죠반이 마르티넬리 등이었다. 그는 카루소와 팔리아치, ‘운명의 힘’에도 함께 출연하였다. 메트로에서 그의 대표적인 역할은 일 트로바토레, 파우스트, 황금 닭(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이었다. 한편 시카고에서는 카르멘, 루치아, 리골레토, 라 조콘다(엔조), 라 트라비아타(제르몽)를 맡아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트리스탄


차넬리의 바리톤 음성은 자못 가벼워서 듣기에 편안했다. 더구나 그는 고음을 아주 쉽게 낼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토스카니니는 바리톤보다는 테너가 적격이라고 힌트를 주기까지 했다. 차넬리는 이러한 주위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혼자서 상당히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메트로와 바리톤 출연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바리톤으로서 아마 마지막 연주는 1923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있었던 야외 리사이틀일 것이다. 그후 거의 1년 동안 차넬리는 일체의 대중 연주회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924년 10월, 그는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를 맡음으로서 테너로서 대변신을 감행하였다. 나폴리에서였다. 그의 두 번째 테너 역할은 몇 달후 역시 나폴리에서 마이에르베르의 위그노에서 라울(Raoul)을 맡은 것이었다. 잘 아는대로 라울은 상당한 높은 고음을 고난도로 처리해야한다. 그래서 테너들은 라울의 음역을 ‘무자비한 음역’이라고 하며 공연을 꺼려할 정도이다. 그러나 차넬리는 ‘내가 정말 바리톤이었나?’라고 할 정도로 테너 역할을 기막히게 소화하였다. 이후, 차넬리는 당대의 테너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의 간판 역할은 오텔로였다. 역사적으로 가장 훌륭한 오텔로 중의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차넬리의 황금시기는 1928과 1930년에 코벤트 가든에서였다. 이곳에서 차넬리는 ‘제2의 타마뇨’라는 찬사를 받았다. 타마뇨(Tamgno)는 오텔로 세계 초연에서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한 전설적인 테너였다. 코벤트 가든에서 차넬리의 오텔로에 대하여 평론가들은 ‘다른 모든 출연자들을 한데 묶은 것보다 더 생명력이 있었다’라고 입을 모았다. 1928년 차넬리는 모처럼 고국 칠리를 찾았다. 전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차넬리는 마치 국민적 영웅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산티아고 오페라 극장에서의 오텔로는 이 극장이 생긴 이래 가장 기록적인 갈채였다. 이어 그는 산티아고에서 로엔그린, 팔리아치, 카르멘, 그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o e Isotta)의 칠레 초연에 출연하여 칠레 국민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오텔로의 대명사와 같은 차넬리였지만 라 스칼라에서는 단 한번도 오텔로를 맡지 않았다. 다만 1931년 밀라노의 테아트로 달 베르메(Teatro Dal Verme)가 타마뇨의 후계자인 차넬리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차넬리에게 타이틀 롤을 맡긴 오텔로를 무대에 올렸다. 이때 이아고(Iago)는 차넬리의 동생인 카를로 모렐리(Carlo Morrelli)였다. 바리톤으로 뉴욕애서 인기를 끌었던 차넬리의 동생은 오페라를 위해 이름도 카를로 모렐리라고 바꾼 터였다.


오페라의 황금시기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드라마틱 테너중의 한 사람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차넬리는 신장암이라는 뜻밖의 진단을 받아 그를 아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차넬리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 여러 극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갔으며 로마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마에서 발퀴레를 맡아 비록 병마와 싸우고 있는 처지이지만 건재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시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악성종양에 대항할수는 없었다. 건강이 악화된 차넬리는 마침내 고국 칠레로 돌아와 그의 오페라 생애를 마지막으로 장식하였다. 산티아고는 그의 마지막 오텔로를 두 번에 걸쳐 볼수 있었다. 1933년 10월 12일과 15일이었다. 이듬해 2월, 차넬리는 미국에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다. 그는 비행기로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예정대로 연주회를 갖지는 못했다. 주위 사람들은 미국에서 수술을 받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굳이 칠레로 돌아와 1935년 3워 25일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수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잠들었다. 43세 생일을 여칠 남겨두지 않은 날이었다. 사람들은 미국에서 수술을 받았더라면 생명을 연장할수 있었을 터인데 라면서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차넬리는 자기의 앞날을 예견하고 사랑하는 칠레 국민들에게 돌아갔다. 산티아고에서의 그의 장례식은 국장에 비견되는 전국민의 장례식이었다. 차넬리는 황금의 목소리를 지닌 뛰어난 테너였다. 또한 그의 레가토는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그는 음성은 강력하고 힘에 넘쳐 있었다. 그가 원래 바리톤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테너 음성이 얼마나 힘에 넘쳐 있는 전신적인 것인지 짐작할수 있다. 오텔로는 이같은 그의 드라마틱한 음성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바그너의 영웅적 테너 역할도 훌륭히 소화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가 아니었다. 그는 따듯하고 아름다운 음성을 들려주기도 했다. 안드레아 셰니에의 타이틀 롤은 드라마틱하면서도 감미롭고 부드러운 음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