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테너

린츠의 겨울 나그네 Richard Tauber (리하르트 타우버)

정준극 2008. 3. 2. 17:40
 

▒ 린츠의 겨울 나그네 Richard Tauber (리하르트 타우버)

 

 

리챠드 타우버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가장 사랑을 받았던 재능 있는 테너였다. 특히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클래식과 대중음악, 그랜드 오페라와 오페레타의 장벽을 뛰어넘은 테너로서 이름을 떨쳤다. 타우버는 모차르트의 멋쟁이 스타일로도 탁월했지만 센티멘탈한 비엔나 호이리게(Heurige: 포도주 주점) 노래와 프랑스 샹송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같은 대중노래들을 마치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처럼 고귀한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오페레타에 있어서 타우버는 그의 멜로디적인 음색으로 인하여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프란츠 레하르가 타우버를 위해 별도의 오페레타를 작곡했던 것만 보아도 알수있는 일이다. 타우버는 레코드를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남겼다. 레코드 수집가들에게 있어서 타우버의 음반들은 언제나 귀중한 존재였다. 테너중에서 가장 많은 오페라 음반을 남긴 사람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카루소이다. 타우버는 그 다음번에 해당한다. 경쟁자가 있다면 맥코맥(McCormack)이 있을 뿐이다. 영화가 보편화가 되고 영화배우들이 대중들의 인기를 끌기 전까지는 성악가들이 음반을 통하여 가장 인기를 끌었다. 카루소는 주로 오페라를 레코딩하였다. 맥코맥은 처음에 클래식을 불렀으나 나중에는 대중들의 요청에 따라 대중음악을 많이 취입하였다. 그리고 영화에 출연하여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타우버는 오페라와 오페레타뿐만 아니라 클래식한 분위기의 대중음악을 취입하였고 영화에도 자주 출연하는 등 모든 재능을 두루 갖추었다. 그런가하면 타우버는 사업가로서 자기 소유의 영화회사를 통해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레코드 취입 면수(面數)만 따져 본다면 카루소는 250면이지만 타우버는 무려 730면이었다.

 


오페라 테너, 추억의 팝송 가수, 피아니스트, 영화배우, 사업가 등 여러 타이틀 이외에도 그는 작곡가와 지휘자로서도 유명하다. 그는 두편의 오페레타를 작곡하여 무대에 올렸다. ‘노래하는 꿈’(Der singende Traum)과 ‘올드 첼시’(Old Chelsea)이다. 그는 재능있는 지휘자였다. 비엔나의 폭스오퍼(Volksoper)에서 그가 지휘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즐겁게 해준 일이었다. 2차대전중 영국에 머물고 있던 그는 런던 필하모리를 이끌고 순회연주를 가기도 했다. 상임지휘자 토마스 비�경 대신 알버트 홀(Albert Hall)에서 일요콘서트를 지휘하여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리하여 후대에 평론가들은 ‘타우버는 위대한 테너였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 위대한 음악인이었다’라고 입을 모았다.

 

'돈 조반니'의 돈 오타비오


리하르트 타우버는 1891년 오스트리아의 린츠(Linz)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린츠극장의 수브레토 소프라노였고 아버지는 유태계 헝가리인으로 연극배우였다. 다만,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사이가 아니었다. 더구나 타우버는 아버지가 연극공연을 위해 미국에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어린 타우버는 일곱 살때까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러나 생활이 곤궁해지나 결국 어머니는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청했고 처음으로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아버지는 곧바로 오스트리아에 돌아와 어린 타우버를 그라츠(Graz)에 살고 있는 어느 부자집에 맡겨 양육토록 했다. 그 부자는 연극배우인 아버지의 맹목적인 팬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타우버를 신부가 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린 타우버는 극장 체질이었는지 도무지 수도원에 대하여 흥미가 없었다. 어머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가족이 함께 살수 없었던 아버지는 어린 타우버를 떠맡기로 했고 직업상 할수 없이 어린 타우버를 데리고 홀아비 생활을 하며 다닐 수밖에 없었다. 프라하에서 3년, 베를린에서도 3년의 생활이었다.  

 


1903년 아버지는 비스바덴(Wiesbaden)극장에 정착하게 되었고 타우버는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타우버는 다른 학과에는 관심이 없었고 음악에 대하여 재능을 보여주었다. 타우버는 아버지의 극장에서 보이 소프라노로도 출연하였으나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보이 소프라노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자 테너가 되려는 야심을 갖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 그 극장에서는 유명한 헬덴테너 하인리히 헨젤(Heinrich Hensel)이 활동하고 있어서 타우버의 우상이 되었다. 타우버는 헨젤이 맡은 오페라 역할을 거의 다 흉내 낼수 있었다. 아들 타우버의 음악적 호기심 및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는 타우버를 비스바덴 상임지휘자인 슐라르 교수와 비엔나의 성악교수인 데무트에게 보내어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토록 했다. 슐라르 교수와 데무트 교수는 타우버를 몇 번 테스트하고 나서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타우버는 음악을 하겠다고 고집하였다. 결국 아버지는 타우버를 프랑크푸르트에 보내어 피아노, 작곡, 지휘를 공부토록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우연찮게 행운이 그를 향하여 미소를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가 다른 일로 바쁘게 되어 타우버를 프라이부르크에 가서 잠시 있도록 했고 그곳에 가있는 동안 바이네스(Beines)교수를 만난 것이다. 바이네스 교수는 유명한 성악가들을 많이 길러낸 유명한 인물이었다. 타우버의 노래를 들어본 바이네스 교수는 그가 소리만 크게 지를줄 아는 것을 보고 피아노로 불러 보도록 했다. 그리고 타우버에게서 모차르트의 테너에 적합한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했다. 1년후 타우버는 콘서트를 가질 정도로 급발전하였다. 아버지는 1년 공부했다고 해서 독창회를 가지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하면서 더 공부하도록 했다. 얼마후 마침 아버지가 헴니츠(Chemnitz)에 있는 두 개 극장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13년, 타우버는 아버지가 책임자로 있는 헴니츠의 극장에서 타미노(모차르트의 마적)를 맡아 처음으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였고 며칠후에는 ‘마탄의 사수’에서 막스를 맡아 열연하였다. ‘마탄의 사수’에는 드레스덴오페라의 제바흐(Seebach) 남작이 참석하였다. 제바흐 남작은 그 자리에서 타우버에게 5년 계약을 제안하였다. 드레스덴에서 타우버는 SOS 테너였다. 기라성과 같은 드레스덴의 테너 주역들 중 사정이 생겨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면 단 이삼일의 통보를 받고 대신 출연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밤을 새워가며 스코어를 암기해야 했다. 브레스라우에서는 파우스트를 48시간 통보를 받고 출연하였으며 베를린에서는 막이 오르기 단 한시간 전에 피아노 연습만 하고 슈트라우스의 아리아드네에서 바커스를 맡아 했다. 가장 유명한 케이스는 투란도트의 독일 초연에서 주역인 칼라프 왕자를 맡은 것이었다. 타우버는 전에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는 투란도트를 단 3일전에 주역 통보를 받고 밤새 연습하여 무대에 섰다.  놀라운 재능과 체력이었다. 칼라프를 맡기로 되어 있는 테너 쿠르트 타우허(Curt Taucher)가 갑자기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드레스덴에 정착해 있는 동안 타우버는 60개 이상의 역할을 소화하였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빠르게 발전한 경우는 없었다. 드레스덴에서 그는 테너 티노 파티에라(Tino Pattiera)와 절친한 친구로서 지냈다. 파티에라가 독창회나 콘서트를 가지면 타우버가 피아노 반주를 맡아해 주었다. 드레스덴에서 만난 또 하나의 젊은 성악가는 엘리자베트 레트버그였다. 1922년 그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제안을 받아들여 비엔나로 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폭스오퍼와 빈극장(Theater an der Wien)의 지휘를 맡는 등 오페레타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1924년 그가 빈극장에서 지휘를 맡았을때 함부르크 출신의 소프라노 카를로타 반콘티(Carlotta Vanconti)를 만났다. 그때 카를로타는 마리차백작부인 역할을 맡아 비엔나 데뷔를 하였고 타우버가 그 오페레타의 지휘를 맡았던 것이다. 얼마후 카를로타는 이탈리아 남편과 이혼하고 타우버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기회 있을때마다 오페레타를 함께 공연하였다. 비록 두 사람이 테너와 소프라노라의 결합이라는 이상적인 만남이었지만 공통의 관심사는 음악이었고 음악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게 되자 4년후 두 사람은 이혼하였다. 카를로타는 뮤지컬 쪽으로만 나가자는 주장이었고 타우버는 전통적 모차르트에 근본을 두고 우수한 오페레타에만 간혹 부업으로 출연하자는 주장이었다. 타우버는 1920년대 중반에 테너로서 피크에 올라섰으며 이후 10여년을 정상에 머물러 있었다.


1924년 3월 5일, 비엔나에서의 돈 조반니 공연은 그의 전성기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타우버는 돈 오타비오를 맡았다. 돈 조반니에서 돈 오타비오는 다른 주역들의 그늘에 가려 별로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 통상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레포렐로(하인)만도 못한 박수를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날의 공연에서 타우버는 주인공인 돈 조반니를 훨씬 능가하는 대단한 박수를 받았다. ‘도이치 알게마이너 자이퉁’지는 ‘타우버는 두 곡의 아리아를 눈부시게 불렀다. G장조 아리아의 마지막 파트에서 어떻게 그렇게 칸틸레나(cantilena)를 불렀는지는 놀랄 뿐이다. B플랫 장조의 아리아에서 콜로라투라 테너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그러한 연주였다’고 찬사를 보냈다. 1935년 그는 영국의 신예스타 다이아나 네이피어(Diana Napier)를 만났고 이듬해 결혼하였다. 1938년 조국인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타우버 가족은 사실상 국적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영국에 귀화를 요청하였고 1940년 모든 절차가 끝나 영국으로 귀화하였다. 미국에서 상당히 좋은 조건으로 타우버를 초청하고 미국시민으로 주선해 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자기의 귀화를 받아준 영국에 남아있기로 결심하고 응하지 않았다. 물론 전쟁이 끝나자 타우버는 미국을 방문하여 레하르의 ‘웃음의 나라’(Land of Smiles)의 영어 초연에 출연하는 등 상당한 활동을 하였다. 남미를 거쳐 런던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지독한 감기로 고생하였고 노래부르는 것을 쉬도록 권고를 받았다. 타우버는 테너에게 노래를 부르지 말라는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불평을 했다. 얼마후 진단 결과 타우버는 폐암에 걸려있으며 더구나 한 쪽 허파는 완전히 불치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런던 공연이 있게 되었다. 슈타츠오퍼는 오랜전의 동료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타우버에게 돈 조반니의 돈 오타비오를 맡아 달라고 청탁했다. 타우버의 나이 56세 때였다. 1947년 9월 27일, 타우버는 코벤트 가든에서 돈 오타비오를 불렀다. 열광의 소용돌이였다. 그의 아름다운 음성은 여전히 건재하였다. 코벤트 가든에 몰려왔던 관객들은 물론, 집에서 라디오로 실황 중계를 듣던 모든 사람들은 타우버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이날의 공연은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는 것이었기에 모두들 타우버에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못했다. 타우버의 인생은 처음 그가 오페라 무대에 섰을때처럼 모차르트로 시작하여 모차르트로 끝을 맺었다. 며칠후 타우버는 왼쪽 폐의 절제 수술을 받았으나 나머지 폐도 못쓰게 된것이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몇 달후인 1948년 1월 8일,  막스 타우버는 세상을 떠났다.

 

1932년 베를린에서 노래를 부르는 리하르트 타우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