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테너

노래의 천재 Salvatore Fisichella (살바토레 피시켈라)

정준극 2008. 3. 2. 17:46
 

▒ 노래의 천재 Salvatore Fisichella (살바토레 피시켈라)

 

살바토레 피시켈라 


살바토레 피시켈라는 노래의 신동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란 그는 어릴때부터 가족들 모임이나 마을 행사가  있을때마다 ‘야, 살바토레! 노래 한 마당 불러라!’라는 주문을 받고 수줍어하는 기색은커녕 ‘왜 이제야 시켜요?’라면서 앞에 나와 노래를 불렀다. ‘오 솔레 미오’는 이른바 18번이었다. 살바토레는 10살때에 고향마을의 수도원에 들어가 성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 소년에 불과한 살바토레는 ‘실버 보이스’(Silver Voice)를 가진 음악 신동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테너로서 장밋빛 앞날을 꿈꾸고 있던 그에게 돌연 시련이 닥쳐왔다. 어느날 수도원 신부로서 벨리니 박물관에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살바토레의 피아노 반주를 자주 맡아했던 지오수에 키사리(Giosué Chisari)가 살바토레에게 ‘넌 베이스야! 훌륭한 베이스가 될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이 소리를 들은 살바토레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아닙니다. 절대로 베이스가 아닙니다. 테너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탄데의 베아트리체에서 오롬벨로

  

내친김에 수도원을 떠난 그는 다른 학교에 들어가 엉뚱하게도 과학을 공부했다. 아마 베이스가 되라는 소리에 이유없는 반항심으로 과학자가 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줄 일이 생겼다. 그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야흐로 능력있는 연구원이 되려던 참이었다. 어느날 살바토레는 잘 아는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한 일이 있다. 마침 축가를 부르기로 되어 있는 정상급 테너가 아무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베 마리아를 들으며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했던 신부는 대단히 실망했다. 심지어 그 신부는 결혼식을 중지하고 다른 날 하자는 말까지 했다. 축하객들과 신랑은 황당해서 어쩔줄 몰라 했다. 신랑과 잘 알고 지내던 살바토레가 아베 마리아를 대신 부르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살바토레의 아베 마리아는 그 정상급 테너에 못지않게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노래였다. 결혼식장에 늦게 나타난 그 정상급 테너도 살바토레의 노래를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 저녁 그 테너는 살바토레를 자기의 성악 스승인 사라 메씨나(Sara Messina)의 앞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주선해 주었다. 살바토레의 노래를 들은 사라 메씨나는 그 자리에서 살바토레가 세계 최고의 테너가 될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바토레를 열심을 다해 가르쳤다. 

 

노르마에서 폴리오네


피시켈라의 첫 오페라 데뷔는 스폴레토에서 마스네의 베르테르였다. 피시켈라의 공연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곧이어 이탈리아 전국을 순회하는 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아버지 필리포는 아들이 테너로서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기를 바랐다. 당시 이탈리아를 휩쓸었던 쟁쟁한 테너로는 델 모나코, 디 스테파노, 프랑코 코렐리, 카를로 베르곤지, 라이몬디 등이 있었다. 피시켈라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었다. 베르테르로서의 성공은 피시켈라를 이들 쟁쟁한 테너들과 같은 반열에 들어가도록 한 것이었다. 이날 스폴레타의 베르테르 공연에는 멀리 카타니아(Catania)에서 어머니까지 기차를 타고 달려 내려왔다. 피시켈라가 환호를 받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테너였던 친정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피시켈라의 외할아버지는 피시켈라가 어릴 때부터 대단한 후원자였다. 나중에 피시켈라는 그날의 베르테르를 외할아버지를 위해 불렀다고 털어 놓았다.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 피시켈라는 1971년 로마 오페라(Opera Di Roma)의 초청을 받아 리골레토와 청교도에 출연하여 정상급 테너로서 완전한 인정을 받았다. 로마 오페라에서의 리골레토 공연에는 미렐라 프레니가 질다를 맡았고 코르넬 맥네일리(Cornel MacNeilli)가 리골레토를 맡은 것이었다. 같은 해에 피시켈라는 팔레르모에서 레인러 겐서와 함께 ‘영국 여왕 엘리자베타’(도니제티)를 맡아하여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1973년 피시켈라는 고향 카타니아의 벨리니극장에서 라 보엠의 로돌포를 공연하였다. 이로부터 피시켈라는 세계 최고의 테너로서 세계의 유명 오페라 무대들을 장식했다. 그는 테너 역할중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중요한 역할들에 도전하여 사람들로부터 감탄을 받았다. 예를 들면 1975년 로시니의 ‘글로리아 미사’(Missa Di Gloria) 등이었다. 글로리아 미사에서의 테너 파트는 아무리 훌륭한 벨칸토 테너라고 해도 너무 어려워 꺼리는 것이었다. 피시켈라는 탁월한 벨칸토 테너였다. 스위스의 베른에서 도니제티의 라 화보리타(La Favorita)의 공연이후 데어 분트(Der Bund)지는 ‘피시켈라는 도니제티와 벨리니 작품에서 역사상 가장 뛰어난 테너’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후로 이 수식어는 피시켈라가 가는 곳마다 함께 하였다.

 

라 스트라니에라(La Straniera)에서 아루트루

 

1984년 피시켈라는 또 한번의 개가를 불렀다. 브레겐츠(Bregenz) 페스티벌에서 에디타 그루베로바(La Gruberova라고 부름)의 상대역으로 ‘청교도’의 아르투로를 맡은 것이었다. 평론가들은 ‘도밍고와 파바로티에 필적하는 테너’라고 찬사를 보냈다. 1986년, 피시켈라는 처음으로 메트로의 무대에 섰다. 역시 ‘청교도’였다. 상대역은 조안 서덜랜드였다. 이 공연은 메트로의 역사를 다시 쓸 만큼 성공적인 것이었다. 이 공연으로 이미 정상에 올라와 있는 피시켈라는 왕관을 하나 더 쓰게 되었다. 그는 테너가 상상할수 있는 가장 고음을 내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의 개선행진은 계속되었다. 1990년 푸치니 페스티벌에서 토스카의 카바라도씨를 맡은 것은 그러한 개선행진의 한 스텝이었다. 이와 함께 그의 레퍼토리도 점점 확장되었다. 리골레토, 나부코, 라 트라비아타, 라 보엠, 나비부인, 라 화보리타, 루치아, 로베르토 드브로, 루크레지아 보르지아, 이집트의 모세, 로시니의 오텔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타, 텐다의 베아트리체, 캬풀레티가와 몬테키가, 파우스트, 메피스토펠레, 스메타나의 ‘두명의 미망인’, 메르카단테의 ‘엘리자와 클라우디오’, 만니노(Mannino)의 루이젤라(Luisella), 베르디의 아틸라 등이다.

 

 '청교도'에서 아르투로. 조앤 서덜랜드와 함께


이러한 피시켈라에게 또 하나의 놀라운 성공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2년 라 스칼라에서 공연한 루치아였다. 그야말로 대성공이어서 관중들은 극장문이 닿힌 후에도 몇시간씩이나 극장 밖에서 그날 밤의 감격을 되새겼다. 파리는 그에게 기록적인 갈채를 보냈다. 1992년 5월 샹젤리제 오페라 극장에서의 ‘청교도’였다. 무려 22분간이나 기립박수를 받았다. 파리의 신문들은 그를 금세기 가장 훌륭한 벨리니의 해석자라고하며 찬사를 보냈다. 그해 가을 취리히에서 공연한 벨리니의 ‘해적’(Il Pirata)은 피시켈라가 세계 최고의 테너라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해 준것이었다.  오늘날 피시켈라는 태너의 황제로서 세계에 군림하고 있다. 그의 고음은 어떠한 트릭이나 환상이 아니다. 그는 25년이란 기간동안 처음부터 지금까지 결코 흐트러짐이 없는 똑같은 소리로 일관했다. 그는 과연 이 시대가 낳은 위대한 테너이다. 세상에는 카레라스, 파바로티, 도밍고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피시켈라도 있다.

 

로베르토 드브로에서. 라이나 카바이반스카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