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대 초 로마) 오페라 금지시대
대망의 18세기가 열리는 1700년대 초반의 약 10년동안, 로마의 오페라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공연이 금지되었다. 로마는 르네상스 이후 세계문화의 중심이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된 이래 교황이 자리 잡고 있는 세계종교의 중심이었다. 그러한 로마에서 오페라 공연 금지령이, 그것도 막강한 교황에 의해 내려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해가 바뀌어 1700년이 되자 모두들 18세기의 도래를 기뻐하면서 죽어라고 축하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오락이 없었다. 그나마 재미있게 보았던 오페라가 공연 금지되었으니 마땅히 다른데 갈곳도 없었다.
오페라를 금지했던 교황 인노센트 12세
1701년 교황 클레멘트11세(Clement XI)는 3년전 인노센트12세(Innocent XII)가 작성한 모든 세속적공연의 금지령에 교황의 인장을 쳐서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공연금지의 이유는 스페인 왕위계승에 따른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므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전쟁을 하는데 이곳 로마에서는 한가롭게 무대공연이나 보면서 있을수 없다는 것이었다. 스페인 전쟁이 말할수 없이 악화되자 교황은 가톨릭 주빌리(성년)를 다시 선포하고 기왕의 공연금지령을 더욱 강화하였다. 교회가 정한 성년(聖年) 한해동안에는 신실한 생활을 해야 하며 고성방가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1703년 1월과 2월, 로마에는 뜻하지 아니한 지진이 몰아닥쳤다. 천만다행으로 아무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교회는 이것이야 말로 주님의 크신 은혜라고 보고 더욱 경건해야 하므로 앞으로 5년동안 극장공연은 어떠한 것이든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여 적발하는 대로 스티커를 발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암흑시대에서 오페라가 겨우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1710년에 가서였다.
헨델의 '시간과 진실의 승리'. 이 오페라는 교황에 의해 금지 오페라로 되었다. 라 스칼라 무대. 현대적 연출
로마교황청을 뒤에 업은 가톨릭교회는 오페라를 공연하지 말라고 내세웠지만 문화예술계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설익은 밥을 먹는 소리를 하느냐면서 은근히 반박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하나님, 예수님, 성모 마리아, 사도 바울, 사도 베드로 등을 앞세운 교회측이 유리하였다. 물론 교황의 오페라 금지령 이전에도 가톨릭교회는 극장공연이 성서에 반하는 비도덕적인 것이며 죄악과 저주를 불러오는 것이라고 하여 공격한 일이 있다. 이같은 공격과 비난은 1588년 내린 교황의 칙서, 즉 여자는 대중 무대에 절대로 나설수 없다는 칙령의 연장이라고 할수 있다. 에덴동산에서 여자가 최초로 인류를 죄악으로 유혹하였으므로 여자는 죄악의 원천이라는 묘한 해석이었다. 따라서 여자가 무대에 서면 스스로 죄악을 생산하는 것이 됨으로 절대 안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여자의 오페라 출연을 금지했기 때문에 로마는 때아닌 카스트라티(Castrati)의 왕국이 되었다. 그러나 저러나 교황이 오페라 공연을 금지하는 바람에 오페라 때문에 밥먹고 살던 작곡가, 가수, 연주자, 무대장치가, 심지어는 오페라 후원자들이 할 일과 갈 길이 없어졌다. 그래서 오라토리오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1700년대 초반처럼 오라토리오가 봄날의 꽃처럼 만개한 때도 없었다. 교황인들 예수님과 베드로 등 종교 스토리를 내용으로한 오라토리오 공연을 비도덕적이며 죄악과 저주를 불러오는 것이라고 말할수 없기 때문이었다.
18세기 런던에서 공연된 헨델의 '플라비오' 무대 스케치. 오른쪽 알토 카스트라토 게타노 베렌슈타트, 가운에 소프라노 프란체스카 쿠쪼니, 왼쪽 콘트랄토 카스트라토 세네시노(Senesino)
로마교황청의 오페라에 대한 터무니없는 핍박은 사실 미켈란젤로의 경우에 비하여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난지 몇 달후 로마 교황청은 시스티나 성당의 대작 ‘최후의 심판’에 악마가 숨겨져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대대적인 검열 작업을 벌였다. 그리고 만일 그림 속에서 이단적인 내용이 발견되면 ‘최후의 심판’ 그림을 파괴하겠다고 내세웠다. 현재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에 그려져 있는 ‘최후의 심판’이 그때 교황청의 검열로 가필 또는 수정되었는지, 또는 원본 그대로인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그때 ‘최후의 심판’이 훼손되지 않은 것만은 역사적으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잠시 몇 년동안의 오페라 금지령은 로마 교황청의 다른 예술분야 박해에 비하여 큰 이슈가 되기 어렵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틴 채플
극장이란 곳은 눈과 귀에 자극을 주고 육체와 마음간의 갈등을 가져오게 하는 곳이다. 극장에서는 영광의 찬양과 저주받은 파멸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무대에서 진행된다. 오페라의 스토리도 이 범주에서 예외가 아니다. 배신, 죽음, 음모, 살인, 근친상간, 반역, 저주...이런 것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미화되거나 비난을 받는다. 그러므로 사실 누구라고 할 필요도 없이 당시의 교황이라면 오페라의 내용을 불건전 및 비도덕적 사태로 보고 가만있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페라의 공연이 금지되지 않았던 시절에 극장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오는 사람중에 성직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수 있는가? 가톨릭의 고위성직자 중에는 오페라 파트론(Patron)들도 더러 있었다. 그 중에서 돈 많고 지체 높은 피에트로 오코보니 추기경, 베네데토 팜필즈 추기경, 프란체스코 마리아 루스폴리 공자와 같은 파트론 들은 ‘교황님이시여 지꺼리시라~ 우리는 우리대로 즐기겠소이다!’라면서 자기네들 궁전에서 전보다 더 화려하고 규모가 큰 오페라를 공연하며 즐거워했다. 물론, 오라토리오를 공연한다는 명목을 내세웠기 때문에 교황청이 뭐라고 할 입장도 아니었다. 이들은 왜 교황의 칙령까지 어기면서 오페라를 비호하였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잘 먹고 잘 살다보면 자기를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를 자기 집에서 공연토록 하여 난다하는 손님들의 기를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테아트로 살로네 마르게리타(Teatro Salone Margherita). 왕족들이나 지체 높은 귀족들은 자기들의 저택에 개인 극장을 가지고 오페라를 공연하였다.
오락이 주목적인 오페라에서 점잖은 성서적 대화만이 오갈수는 없는 노릇이다. 야한 대사가 은근히 나오고 자극적인 행동을 보여야 구경하던 귀족들과 귀부인들이 몸을 배배 꼬면서 ‘어머, 어머!’라고 소리치며 은근히 노골적 입장으로 변하는 법이다. 그거야 말로 호색적인 귀족들이 바라던 바가 아닐수없다. 이러한 귀족들의 고상망칙한 취향에 맞추기 위해 도덕적 스토리를 야한 스토리로 슬쩍 둔갑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미안하지만 오라토리오 메시아로 유명한 독실표 헨델의 초기 작품을 보자. ‘시간의 승리와 각성’(Il Trionfo del Tempo e del Disinganno)이라는 오페라의 경우, 주인공들인 아름다움(Bellezza)과 즐거움(Piacere)의 대화를 보면 이건 마치 레스비안(여자 동성연애자)들의 대화와 다를바가 없이 천박하고 야하다. 그런데도 겉으로는 마치 도덕적인 스토리로 치장되어 있다. 더구나 당시는 여자가 노래를 부를수 없었고 대신 남자들이 카스트리티라는 명함으로 무대에 섰기 때문에 여기에서 ‘아름다움’과 ‘즐거움’의 대화는 마치 남자동성연애자들인 게이의 행동 및 대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걸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시기를...’와 같은 오라토리오라고 간주한다면 곤란한 일이다. 여성들이 노래를 부를때에는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당대의 카스트라토인 화리넬리(Farinelli). 가운데. 자코포 아미고니 작.
로마를 방문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상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한쪽으로는 마치 로마가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가톨릭의 수호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악과 멸망에 물들어 있는 도시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관능적인 도시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능미는 매력이기도 했다. 로마의 찬란한 고대문화 유적의 아름다움, 그리고 화려한 문화 예술을 꽃피우게 했던 수많은 후원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수많은 예술가들, 특히 음악가들은 은근히 로마를 동경하였다. 그러한 때에 색슨인 한사람이 로마를 찾아왔다. 그가 성요한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했을때 사람들은 그의 화려한 솜씨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더구나 그는 작곡가라고 했다. 화제의 색슨인은 조지 프레데릭 헨델(1685-1759)이었다. 1706년 말, 로마에 걸어 들어왔다. 그로부터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오페라 양식을 띠고 대환영을 받았다. 헨델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자 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연출도 시도하였다. 오라토리오 공연에 관례를 깨고 성모 마리아의 역할을 여성 성악가에게 맡겨 무대에 오르도록 한 것이다. 거룩하신 성모님을 남자 카스트라토가 맡는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유였고 이에 이의를 내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로마의 오페라 활동은 점차 본궤도에 오르게 되며 더구나 당시에 스칼라티(1660-1725)와 같은 훌륭한 작곡가가 활발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로마는 차츰 기운찬 아리아의 도시가 되었다.
스칼라티의 '예루살렘 왕 세데치아' 표지. 종려주일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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