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1650-1700) 골족의 뮤즈 등장: 륄리 대 샤펜티에

정준극 2008. 3. 4. 17:07


(1650-1700) 골족의 뮤즈 등장: 륄리 대 샤펜티에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632 :프랑스 오페라의 아버지인 쟝-밥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가 탄생했다.

1651: 젊을때 왕이 된 프랑스의 루이14세는 발레를 무척 좋아하여 왕이면서도 처음으로 댄서로 무대에 출연하였다.

1664: 륄리가 그의 오페라 La Princess d'Elide에 오케스트라 악기로서 코일처럼 관이 꼬인 나팔을 처음으로 등장시켰다. 이후 이 악기는 프렌치 혼(French Horn)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677: 파리에서는 아이스크림이 디저트로서 대단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당히 값이 비싸서 양이 대단히 적었다. 그리고 빨리 녹지 않도록 하기위해 얼음으로 뚜껑을 만들어 아이스크림 콘(Cone)에 씌웠다. 귀부인들이 오페라를 보며 아이스크림을 살살 먹는 것은 대단한 호사였다.

1700: 조셉 서브르(Joseph Sauveur)는 음정의 바이브레이션 무게를 잴수 있다고 설명했다.

   

티스트 륄리


장 바티스트 륄리와 마르크-안토안느 샤르팽티에를 골(Gaul)족의 뮤즈라고 부른다. 골(Gaul)족은 프랑스 사람들을 말하며 뮤즈는 음악, 무용, 시 등등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초창기 프랑스에서 공연되는 오페라도 거의 모두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원래부터 자칭 예술적 기질이 다분한 사람들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먹는 것도 예술적으로 먹고 말하는 것도 예술적으로 하며 연애도 예술적으로 한다는 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해놓은 것을 살짝 재포장하여 자기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천재적인 소질도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수입한 이탈리아산 오페라에 프랑스식 터치를 약간씩 가미하고는 이를 프랑스 오페라의 위대한 시작이라고 간주하였다. 프랑스식 터치의 대표적인 예로는 원산지가 이탈리아인 오페라에 프랑스 발레를 추가한 것이다.

 


륄리의 '아치스와 갈라테아'


처음에는 오페라의 막간에만 발레를 공연토록 했다. 그러나 오페라보다 발레를 더 좋아하는 프랑스 사람들은 막간의 공연만 가지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막이 시작되기 전에도, 막이 끝나고 나서도 발레를 공연하는 발레-오페라를 공연토록 하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발레를 몇 겹씩 추가했다고 해서 진정한 의미의 프랑스제 오페라를 공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프랑스에서는 오래전부터 순수연극이 상당히 발전해 있었다. 오페라 작곡가들은 이들 순수연극에 음악을 입히면 사람들의 마음을 더 끌어 당길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극에 오케스트라를 추가하다 보니 무대가 스펙터클하게 되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어쩐 일인지 오페라 및 연극제작에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이같은 호화 오페라 제작의 전통은 오늘날 파리의 리도 쇼를 보아도 알수있다.


륄리의 '카드뮈와 에르미온'(Cadmus et Hermione). 2009  파리 오페라 코미크

                  

프랑스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귀족 집 마당에서 공연된 대규모 오페라에 필적하는 호화 및 거대 무대의 제작에 열을 올리며 ‘하면 된다! 우리도 할수 있다!’고 소리쳤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순국산 프랑스 오페라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프랑스 오페라 무대의 배후에는 이탈리아가 버티고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장 밥티스뜨 륄리(이탈리아 이름: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였다. 태양왕 루이 14세를 위해 충성 봉사했던 륄리는 태양왕의 명성에 걸맞는 무대장치 및 음악적 효과를 창안해 내기에 바빴다. 루이14세의 총애를 듬뿍 받은 륄리는 프랑스 오페라계를 완전 장악했다. 그의 지휘 감독하에 몇가지 장르의 오페라가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정적 비극(Tragédie lyrique), 음악적 비극(Tragédie en musique)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휘둘렀던 륄리가 우연찮게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사람들은 ‘미안합니다. 사실은 발레를 사랑합니다!’라면서 또다시 오페라-발레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샤펜티어의 등장은 프랑스 오페라에 또 다른 획을 긋는 것이었다. 샤펜티에는 륄리의 그늘에서 빛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륄리가 세상을 떠난후 발표한 샤펜티에의 메데(Médée)는 종전의 이탈리아식 륄리표 오페라와는 사뭇 다른 바그너 스타일의 깊이가 있는 순수 오페라였다.


'메데'. 베를린 슈타츠오퍼. 소냐 욘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