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아르카디아가 뭐 길래?

정준극 2008. 3. 5. 09:00

아르카디아가 뭐 길래?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에 의한 오페라들은 주로 아르카디아를 무대로 삼고 있다. 아르카디아는 그리스의 산속에 있다는 마을 이름이다. 아르카디아는 자연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전원풍경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샘플이었다. 당시 도시에서는 각종 범죄와 소란이 횡행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그리스의 아르카디아를 동경했다. 고대의 아르카디아가 뒤늦게 알려지게 된것은 시인 필립 시드니(Philip Sydney)경의 공로가 컸다. 시드니경은 1590년 펨브로우크(Pembroke)백작부인을 위해 낭만소설 한편을 썼다. 그 배경이 아르카디아였다. 아무튼 그 소설 때문에 아르카디아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르카디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도시였다. 쥬피터의 아들 아르카스(Arcas)의 이름에서 따온 그리스의 도시이다. 아르카디아를 이상향으로 생각한 17세기의 사조에 힘입어 1689년 로마에 아르카디아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아르카디아 아카데미는 이탈리아 예술의 지나친 인위성에 이의를 제기위해 설립되었다. 이 아카데미의 노선은 음악에도 영향을 끼쳤다. 헨델이 1712년에 발표한 오페라 Il pastor fido의 대본은 가장 뛰어난 아르카디아 스타일이라고 할수 있다.

 

고대의 아르카디아를 그린 작품



 

[아르카디아 아카데미 집중탐구]


‘아르카디아 아카데미’(Academy of Arcadia)의 공식 명칭은 Pontificia Accademia degli Arcadi이다. '아르카디아 어카데미'는 18세기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모든 예술분야, 특히 오페라 예술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친 예술사조였다. 아르카디아 아카데미의 시초는 1656년 2월, 로마의 일부 문화예술인들이 모임을 갖고 고대 그리스의 이상향인 아르카디아의 목가적인 정신으로부터 예술의 순수성을 되찾아 보자는 모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마침 당시 로마에 체류하던 스웨덴의 크리스티나(Christina)여왕이 후원하는 상당수 예술가들이 모임의 주축을 이루었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1654년 양위를 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후 로마에 체류하고 있었다. 로마에서 크리스티나 여왕은 음악가들을 후원하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알레싼드로 스칼라티, 알레싼드로 스트라델라, 아르칸젤로 코렐리(Arcangelo Corelli)등은 크리스티나 여왕을 위해 작곡 활동을 했다. 1689년 로마의 예술가들은 크리스티나 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아카디아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초대 아카디아 아카데미의 원장으로 고인이 된 크리스티나 여왕을 상징적으로 선출하였다. 이들은 크리스티나 여왕을 바실리싸(Basillissa)라고 불렀다. 그리스어로 황비(Empress)라는 뜻이다. 아카디아 아카데미는 설립이후 2백여년을 지나면서 20세기 문화 창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1626년에 태어나서 1632년에 스웨덴의 여왕이 되었으나 1654년에 퇴위하여 16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로 이탈리아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에는 도나 백작부인이라고 불렸다.


아카데미의 이름을 아카디아로 한 것은 옛날 그리스에 있었다는 아카디아에서 제신(諸神)들이 구가했던 목가적인 생활을 본받아 이탈리아 시문학을 개혁하자는 뜻에서였다. 아카디아에는 뮤즈, 아폴로, 판(Pan)신 등이 신화의 황금시기에 목동들과 함께 목가적인 생활을 했다는 곳이다. 아카데미는 판신의 일곱 개 리드로 되어 있는 플루트를 자체 심볼로 삼았다. 처음 창설인은 모두 14명. 이들은 이탈리아 시문학사의 저자인 조반니 마리오 스레스킴베니(Giovanni Mario Crescimbeni)를 초대 원장으로 선출했다. 아카디아 아카데미의 멤버들은 오로지 아카디아의 정신을 발판 삼아 목가적인 주제만을 노래하기로 했으며 모든 예술 활동을 진실의 장(場)으로 되돌아가 수행키로 다짐했다. 이와 함께 그레코-로만(Greco-Roman) 스타일의 전원시(田園詩)를 기반으로 창작활동을 하기로 했다. 이들은 이상적인 요소(파라미터)로서 단순성을 강조하였으며 또한 미적이고 절도 있는 센스를 내세웠다. 특히 데카르트(Decartes)의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존중하였다. 이들은 심지어 이름도 고전적이며 목가적인 신화에서 발췌하여 바꾸었다. 예를 들면 첫 원장인 크레스킴베니(Crescimbeni)의 원래 이름은 카를로 알페시베오(Carlo Alfesibeo)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아르카디안들(아르카디안스: Arcadians)이라고 불렀다. 아르카디안들의 첫모임은 1690년 10월 5일 어떤 수도원에 속해 있는 숲속에서 가졌다. 그러다가 1692년부터는 오르시니(Orsini) 공작 저택의 정원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후안5세(Juan V)도 아르카디아 아카데미의 멤버였다. 후안5세는 로마 근교의 어떤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속한 야니쿨룸(Janiculum)이란 숲에 상시 회관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르카디안들은 여름에는 야니쿨룸 숲에서 모임을 가졌고 겨울에는 로마의 살비아티(Salviati)궁전의 음악당을 ‘아르카디 극장’(Teatro degli Arcadi)라고 이름 붙이고 그곳에서 모임을 가졌다. 헨델도 이탈리아 체류중 아카데미의 모임에 자주 참석하였다.


오늘날의 자니쿨룸 숲. 예전에 이곳에 아카데미 아르카디아 회관이 있었다.


한때 아르카디아 아카데미는 추구하는 노선에서 차이가 생겨 아카데미아 델 퀸티(Accademia del Quinti)가 분파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카디아 아카데미는 계속 성장하여 이탈리아 주요 도시에 지부를 두게 되었으며 회원수도 1천3백명에 이르게 되었다. 회원들은 상당수가 귀족, 성직자, 예술가들이었다. 많은 지성인들이 아카디아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을 명예로 삼았다. 아카디아 아카데미 회원들은 호머(Homer)와 단테(Dante)의 전통적 예술관을 존중하였다. 유명 오페라 대본가인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 1698-1782)는 아카데미 제2기에 해당하는 멤버였다. 메타스타시오가 대본을 쓴 모차르트의 오페라 Il Re Pastore(목동왕)는 아카디아 아카데미의 기본 정신을 충실히 반영한 모델이었다. 세월이 흘러 유럽에서 혁명의 물결이 넘쳐흐르게 되자 지나치게 안일한 아카디아 운동에 반기를 드는 세력이 솟아났다. 결국 시세에 부응하여 아카데미도 프랑스 혁명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었다. 아카데미는 전통적인 명칭은 고수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인본주의 평등사상과 자유주주의 사상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와함께 아카데미는 예술학파를 대표하기보다는 고전주의에 관심을 쏟는 단체로 변모하였다. 그후 1925년 아카디아 아카데미는 역사연구기구인 ‘이탈리아 문학 아카데미’(Accademia Litteraria Italiana)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아르키디아 아카데미의 활동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하지만 18세기의 활동에 대한 모든 자료는 로마 산타고스티노(Sant'Agostino)교회 옆의 Biblioteca Angelica에 보존되어 있다.

 

로마의 안젤리카 도서관. 아카데미 아르카디아에 대한 자료들은 모두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