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1750-1755) 오페라 폴리티카: 왕의 금화와 부퐁의 수난

정준극 2008. 3. 5. 09:01

(1750-1755) 오페라 폴리티카: 왕의 금화와 부퐁의 수난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749: 이탈리아 작곡가 도메니코 치마로사(Domenico Cimarosa)가 태어났다. 그의 비밀결혼(Il matromonia segreto)은 대단한 인기를 얻으며 공연되었다. 당시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2세는 비밀결혼의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출연자들에게 모두 만찬을 베풀어 주었다. 배가 고프면 공연에 지장을 주므로 힘을 내라는 뜻에서였다.

1751: 세계 최초로 데니스 디더롤(Denis Diderol)이 백과사전을 완성하여 발간했다. 당국은 백과사전의 계몽주의적 내용 때문에 디더롤을 감옥에 가두거나 추방코자 했으나 그는 꿋꿋이 버티어 전35권의 백과사전을 모두 출판했다.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애인이 된 하녀: The Servant Turned Mistress). 세르피나에 소냐 욘체바.

              

1752년부터 1754년까지 파리에서는 오페라에 대한 이상한 논쟁의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표면적으로는 프랑스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의 장점에 대한 논쟁이었다. 논쟁의 방식은 한 진영에서 이탈리아 또는 프랑스 오페라의 장점을 주장하면 상대방이 그 주장을 반박하는 팸플릿을 만들어 배포하는 형식이었다. 서로 상대방의 장점을 따지는 좀 이상한 논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논쟁의 불길은 대단히 뜨거웠다. 논쟁의 포문을 연 사람은 철학자이며 동화작가로서 유명한 프리드리히 폰 그림(Friedrich von Grimm)과 사상가이며 철학자 겸 문학가, 그리고 작곡가인 장 자크 루쏘(Jean-Jacques Russeau)였다. 그 후 프랑스의 모든 지성적인 문화 예술인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논쟁에 관여하게 되었다. 논쟁의 주제는 부퐁(Bouffons)이었다. 부퐁은 파리에 온 이탈리아 순회 공연단의 이름이다.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La serva pardona: The Servant Turned Mistress)이라는 오페라를 공연하기 위해 프랑스를 방문한 오페라단이다. 이 순회 공연단이 무슨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은 아니다. 부퐁은 그저 무고한 희생자였을 뿐이었다. 겉으로의 논쟁은 이탈리아 오페라가 더 훌륭한가, 또는 프랑스의 오페라가 더 훌륭한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논쟁의 배경은 오페라가 아니었다. 당시 유럽 각국에 분출하였던 정치적 위기에 대한 것이었다. 1753년 루이15세가 파리의회 의원들을 모조리 추방한 일이 있다. 의회가 루이15세의 칙령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루이15세가 의원들을 추방하자 의회는 루이15세의 절대적 전제정치에 반기를 들었다. 의회는 루이15세에 대한 항거의 일환으로 왕이 후원하는 오페라를 도마에 올렸다. 그러자니 안주로 씹을 대상이 필요했다. 마침 프랑스를 방문하여 전국순회공연을 펼치고 있는 부퐁이 도마에 오르게 되었다.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

                   

당시 프랑스 오페라는 ‘왕의 금화’(Coin du roi)라고 불렀다. 그만큼 왕이 총애한다는 뜻이었다. 루이왕은 심심풀이 및 남에게 모범을 보인다는 명목하에 금화가 생길 때마다 저금통에 넣는 관습이 있었다. 왕궁의 귀부인 및 비빈들은 어떻게 해서든 왕을 졸라서 이 금화를 받아가려고 온갖 아양을 다부렸다. 왕의 금화를 소지하는 것은 큰 영광이었으며 남들에게 거만을 떨기 위한 기본 물품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오페라는 ‘왕의 금화’처럼 귀부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저 유명한 마담 퐁피두도 프랑스 오페라의 후원자였다. 프랑스 오페라는 그럴듯하게 질러대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아리아를 ‘저게 뭐냐?’면서 공공연히 비난하였다. 한편, 마담 퐁피두가 프랑스 오페라 후원자인데 반하여 왕비인 마리 앙뚜아네트는 당연히 이탈리아 오페라 지지자였다. 왕비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프랑스 오페라가 멜로디가 부족할 뿐 아니라 거창하고 복잡하기만 하다고 비난하면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우아한 아리아를 찬양했다. 논쟁이 정점에 오른 것은 루이15세가 아들 루이 도팽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파리의 모극장에서 역사상 가장 사치의 극을 이룬 프랑스 오페라 공연을 가졌을 때였다. 의회는 그 공연을 무참하게 비난하였다. 왕은 왕대로 목소리를 높혔다. 그 때문에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 전국을 순회 공연하던 이탈리아의 부퐁 오페라단은 많은 고초를 받기도 했고 반면에 격려를 받기도 했다. 3년에 걸친 논쟁의 결론은 무엇인가? 일단 오페라 코미크 또는 오페라 부파의 공연은 사라졌다.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서였다. 그후 20년 동안 프랑스의 오페라 극장에서는 서정적 비극, 즉 비극음악(tragedie en musique)만이 공연되었다. 그후 상당기간이 지난 후에야 젊은 작곡가들이 새로운 감각의 오페라 코미크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오페라가 정치적 논쟁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 이탈리아의 부퐁이라는 오페라단이 프랑스에 와서 '하녀 마님'을 공연할 때에 부퐁 전쟁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