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0-1890) 바그너의 초기 오페라: 인생, 우주, 그리고 뭐?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855: 바그너가 런던에서 오케스트라 작품을 지휘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이 대단히 만족해 했다.
1860: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ur Schopenhauer)가 아무런 친척이나 친구도 없이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주위의 누구도 믿지 않았다. 다만 애견 아트마(Atma: 세계의 영혼이란 뜻)가 있었을 뿐이었다. 쇼펜하우에르의 염세주의적 외로움과 행동의 격렬함, 그리고 초차연적 철학 사상은 나중에 바그너 악극에 영향을 주었다.
1872: 쇼펜하우어의 제자로서 초인간(Die Übermensch)을 주장한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sche)가 그의 첫 저술인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s Tragödie)을 바그너에게 헌정했다. 두 사람은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이들의 우호적인 관계는 4년후 바그너가 Parsifal(파르지팔)을 발표하자 니체는 이 작품이 지나친 기독교적 내용으로 도색되어 있다고 비난하며 바그너와 결별했다.
1882: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인 파르지팔이 바이로이트의 훼스트슈필하우스에서 초연되었다. 바그너는 이듬해인 1883년 세상을 떠났다.
1886: 바바리아의 매드 루드비히(미친 루드비히)라고 불린 루드비히2세가 정식으로 미친 사람으로 선포되었다. 루드비히2세는 바그너의 후원자였으며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불필요한 궁전을 건설하였다.
바그너의 초기 오페라인 '사랑금지. 트리에스테 베르디극장. 현대적 연출
베버 이후 독일 오페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상당기간 잠자고 있었다. 따라서 충분한 휴식이 끝났으므로 새로운 도전을 해야할 시기가 이르렀다. 그러한 때에 독일 오페라라는 광활한 창공을 찬연히 가르며 지나가는 하나의 혜성이 등장했다. 리하르트 바그너였다. 바그너는 베버가 꿈꾸던 독일 낭만주의의 비전이 결실을 맺도록 해준 인물이다. 그는 독일 낭만주의의 모든 요소를 자기의 작품에 수용했다. 신화적이며 전설적인 스토리, 인생과 우주에 대한 철학(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영향을 받음), 작품과 혼연일체를 이루는 무대,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내비치는 정치성...여기에 자신만의 대단한 음악적 재능을 더하였다. 바그너의 뮤직 드라마는 심포니 그 자체였다.
로엔그린. 현대적 연출
바그너에게 있어서 오페라는 종교이며 신앙이었다. 그는 자기의 오페라에서 마지막 한 장면까지도 성스러운 종교의식이 반영되고 연결되도록 했다. 자기가 쓴 오페라는 자기의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직접 대본을 썼고 배경을 설계했으며 자기 방식대로 제작을 했다. 심지어 자기 오페라에 합당한 성악의 장르도 새로 태어나게 했다. 이른바 헬덴소프라노(Heldensopran: 영웅소프라노), 헬덴테너(Heldentenor: 영웅테너), 그리고 헬덴바리톤(Heldenbariton: 영웅바리톤)이었다. 그러나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아이디어가 지배토록 한 것이다. 그는 베버의 영향을 받은 첫 오페라 Die Feen(요정들: 1834)로부터 모든 요소를 찬란하게 승화시킨 영광의 마지막 작품인 Parsifal(파르지팔: 1882)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통한 구원이라는 단 하나의 극적인 아이디어를 추구했다. 바그너는 오페라의 역사를 새로 쓴 사람이다.
꽃처녀들에게 둘러 싸인 파르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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