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정치이념
바그너는 약간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바그너는 1849년, 36세 때에 드레스덴에서의 민중봉기에 간접적으로 가담한 일이 있다. 드레스덴의 봉기는 그해 2월 파리에서의 혁명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민중봉기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체포되었고 더러는 처형되었다. 바그너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손을 써서 다행히 스위스로 도피하였다. 만일 그가 체포되었다면 십중팔구 처형되었을 것이다. 바그너는 작곡뿐 아니라 시, 산문, 논설, 단편과 같은 문학작품을 상당히 많은 썼다. 그 중 어떤 것은 상당히 반유태적인 글이었다. 바그너는 글에서 유태인들을 비난하는 생각으로 ‘히브리 냄새’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하였다. 이러한 반유태 성향 때문에 바그너의 명성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비록 히틀러가 바그너의 음악을 찬미한다고 선언하여 나치 시대에는 상당한 존경을 받았지만 그것 역시 결과적으로는 바그너의 명성을 오히려 곤란하게 만든 것이었다. 바그너의 후손들은 바그너의 진심은 그것이 아니며 공연히 오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만으로 바그너의 반유태 성향이 바로 잡아지고 치유된 것은 아니다. 일례로 바그너는 멘델스존의 음악을 기피하였다. 멘델스존이 유태계였기 때문이다. 바그너가 어쩔수 없이 멘델스존의 작품을 지휘할 때에는 언제나 장갑을 끼고 지휘봉을 들었다고 한다. 바그너는 지휘가 끝난후 마치 유태인의 잔재를 털어 버리듯 장갑을 벗어 버렸다고 한다.
1849년의 드레스덴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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