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1890) 러시아판 베리스모: 무소르그스키와 보로딘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867: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라스카를 단돈 7백20만불에 샀다. 당시 미국의회는 대통령에게 쓸모없는 알라스카를 비싼 돈을 주고 샀다고 열심히 비난했다. 그로부터 5년후, 알라스카에서 금이 나오기 시작했다.
1872: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 무소르그시키, 세자르 쿠이가 합동하여 오페라-발레 작품인 믈라다(Mlada)에 각각 1막씩 기여했다. 이 작품은 공연되지 않았다.
1881: 모데스트 무쏘르그시키가 이름처럼 모데스트(조심성있는)하지 못하여 알콜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링카
글링카의 두 오페라, 즉 Ivan Susanin(이반 수자닌: 황제를 위한 삶)과 Ruslan and Ludmila(루슬란과 루드밀라)는 러시아 민족오페라를 발전시킬 훌륭한 후계자를 나오게 만든 발판이었다. Ivan Susanin의 후계자는 보로딘의 Prince Igor(이고르 공)과 무쏘르그시키의 Boris Godunov(보리스 고두노프)이다. 웅장하고 대륙적 냄새기 물씬 풍기는 이 두 오페라는 진실로 19세기 러시아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한편 Rusland and Ludmila(루슬란과 루드밀라)가 보여주는 화려한 환상의 세계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어받아 그의 The Golden Cockrel(황금 닭), Sadko(사드코), The Tsar's Bride(황제의 신부)에서 한층 장대하게 펼쳐 주었다. 그러한 때에 러시아에서도 ‘음악적 사실주의’라는 새로운 사조가 힘차게 고개를 들었다. 러시아판 베리스모 운동이다. 다만 러시아의 음악적 사실주의와 이탈리아의 베리스모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탈리아의 베리스모가 사회적 현실을 주제로 삼았던 반면에 러시아의 음악적 사실주의는 음악 그 자체의 변혁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아마도 스탈린의 지나친 공산 사회주의적 개혁에 동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탈출구로서 음악적 베리스모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음악적 사실주의는 오페라의 제1원칙에 기본을 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모든 노래는 가사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므로 노래가 지나치게 장식적이거나 가식적이면 내용의 전달이 어렵게 되어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아리아라는 것도 레시타티브(敍唱)에 음조의 변화를 둔것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또 무슨 말인가 하면 오페라에서 ‘뭐니 뭐니 해도 그저 아리아가 제일이야!’라고 한다면 작품 전체에 흐르는 음악이 영향을 받을수 있으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대표적인 아리아가 우선 머리에 떠오르지만 러시아 오페라에서는 ‘아, 이거다!’라는 아리아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튼 러시아의 오페라에서는 전체적인 음악적 분위기가 작품을 지배한다.
'짜르의 신부' 그림
알렉산더 다르고미츠스키(Alexander Dargomizhsky)라는 작곡가가 있다. 그는 러시아의 음악적 사실주의에 기본을 둔 작품을 처음으로 썼다. 푸슈킨의 시에서 스토리를 따온 The Stone Guest(석상 손님)는 대표적이다. 물론 그 이전에 무쏘르그시키가 니콜라이 고골(Nicolai Gogol)의 소설 The Marriage(결혼)를 그런 방식으로 작곡하려고 시도했었으나 불행하게도 너무 술만 마시며 지내는 바람에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어쨌든 시도 자체는 대단히 의미가 있었다. 무쏘르그시키는 그 미완성 작품에 바그너의 라이트모티브와 같은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 다르고미츠스키의 ‘석상 손님’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와 줄거리가 비슷하다.) '석상 손님'. 볼쇼이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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