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고대 그리스-21세기

나치의 퇴폐음악 금지정책

정준극 2008. 3. 5. 09:56

나치의 퇴폐음악 금지정책

 

1차 대전이 끝난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포효하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자유에 대한 감성을 표현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 젊은 세대는 감성을 자유스럽게 표현하는 재즈음악과 새로은 것을 추구하는 실험적인 음악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의 베를린은 이같은 대담하고 개혁적인 음악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로 인하여 재즈클럽과 캬바레와 같은 밤세계의 향락문화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도 하나의 조류였다. 그러다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새로운 예술형태를 자축하고 있을때 독일은 나치 스와스티카의 그늘에 파묻히기 시작했다. 한편, 사실상 과거 100년에 걸쳐 유럽각국에서는 반유태인 무드가 조성되었던 것도 이 시기의 음악을 평가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과거에도 독일에서는 반유태주의가 구체적으로 나타났었다. 예를 들면 바그너이다. 바그너는 Das Judenthum in die Musik(음악에서의 유태주의)라는 책자를 통하여 유태인에 대한 혐오증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프렌치 캉캉을 추는 어느 캬바레. 나치는 이러한 향락주의 예술을 퇴폐로 규정하였다.

 

퇴폐음악(Entartete Musik) 또는 도태음악(Degenerate Music)이란 용어는 1930년대에 나치가 심리학에서 끌어 쓴 용어이다. '퇴폐'라는 용어는 원래 19세기에 심리학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리학자들이나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질환 또는 비정상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을 '퇴폐'라고 불렀다. 그후 이 용어는 의학뿐 아니라 생물학, 인류학 등 모든 과학문헌에 사용될 정도로 확산되었다. 나치가 이 용어를 활용하였다. 히틀러의 제3제국은 정상적이 아닌 정신질환자, 집시, 공산주의자, 동성연애자, 그리고 유태인들을 '퇴폐집단'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제거해야 건전한 사회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영어로 Jewish, Degenerate, Bolshevik는 모두 같은 뜻으로 해석되었다. 나치는 의학이나 인류학 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형태의 예술도 사회와 국가에 유해하고 퇴폐적이며 국민을 타락으로 이끄는 것이면 도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퇴폐예술(Entartete Kunst)에 대한 정책을 펼쳤다. 퇴폐음악 금지정책은 나치의 이같은 광범위하고 철저한 퇴폐예술 금지정책의 일환이었다. 나치는 도태되어야 하는 퇴폐음악이 어떤 것인지 리스트를 만들고 이런 퇴폐음악을 추방하기 위해 연주를 금지하여 작품을 고립시키고 작곡자를 불명예스럽게 만들며 작곡 활동을 방해하는 시행령을 채택하였다. 나치가 퇴폐음악으로 규정한 이유는 지금 들어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즉, 작품의 내용이 나치정권을 사실상 반대하는 경우, 작곡자의 정치적 견해가 나치정권을 반대하는 경우, 연주자가 나치정권을 반대하는 경우였다. 말할 나위도 없이 유태인 또는 유태계 사람들의 작품이 이에 속한다.


1938년 5월 뮌헨에서 열린 '퇴폐음악' 전시회. 나치는 재즈, 유태인에 의한 음악 등을 퇴폐음악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대중들의 증오심을 유발하기 위해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나치는 열등민족인 유태인들이야말로 위대한 나치정권에 저해가 되는 중심그룹이라고 내세웠다. 그리하여 유태 음악가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유태인들 중에서 유명한 음악가들이 많았다. 작곡가로서는 멘델스존, 아놀드 쇤버그, 프란츠 슈레커(Franz Schreker), 쿠르트 봐일(Kurt Weill),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 베르톨드 골드슈미트(Berthold Godlschmidt) 등이 이에 속했다. 멘델스존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작곡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어릴 때에 루터교로 개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조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심지어 나치 치하에서는 결혼식장에서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이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나치는 퇴폐작품으로서 유태적인 작품, 아프리카 성향의 작품은 모두 이에 속한다고 규정하였다. 예를 들면 크레네크(Ernst Krenek)의 작품이다. 나치는 재즈를 당연히 퇴폐음악으로 규정했다. 아프리카-아메리카 문화에 뿌리를 가지고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는 작곡가나 이들의 작품도 금지 대상이었다. 예를 들면 한스 아이슬러(Hans Eisler)였다. 그리고 앞서도 지적했듯이 나치정권 반대자들에게 동정하거나 동조한 사람도 퇴폐작곡가로 분류하였다. 안톤 베베른(Anton Webern)은 처음에는 히틀러를 지지하였으나 나중에는 지지하지 않았으며 유태계인 쇤버그가 독일에서 추방된 후에도 그와 친교를 유지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나치는 이른바 현대음악, 즉 파울 힌데미트, 알반 베르크, 아놀드 쇤버그, 안톤 베베른의 작품을 퇴폐적이라고 규정하고 금지했다. 이들은 모두 전위적인 새로운 현대음악을 주도해 나간 사람들이었다. 나치는 현대음악이 고전음악에 비하여 열등하다고 규정했다. 그러므로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나치가 추구하는 우량정책, 나아가 문명의 진보정책에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나치는 유태인과 그들이 만든 음악을 퇴폐음악으로 규정하여 핍박했다.


나치는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주장하는 구조와 형식의 포기야 말로 국수주의 나치정권이 신조로 삼고 있는 질서문화의 진전에 반대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나치가 사실상의 권력을 장악하자 이들이 퇴폐라고 주장하는 작곡가들, 또는 연주가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아놀드 쇤버그, 쿠르트 봐일(Kurt Weil),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등은 강제 추방되었다. 칼 하르트만(Karl Amadeus Kartmann)과 보리스 블라허(Boris Blacer)등은 연금상태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수많은 유태계 음악가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연기로 사라졌다. 나치정권이 열광적으로 좋아한 작품으로는 칼 오르프(Karl Orff)의 Carmina Burana(카르미나 부라나)가 있다. 그러나 이 작품도 원래는 나치가 퇴폐작품이라고 비난했던 것이었다. 나치가 바그너의 음악을 숭상했던 것은 잘 아는 일이다. 나치는 1938년에 그들이 스스로 규정한 퇴폐음악의 리스트를 일반에게 공개하여 공연하지 못하도록 했다.   

 

파울 힌데미트는 나치로부터 핍박을 받은 여러 음악가 중의 하나였다.

 

나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가들을 핍박하는데에는 제국음악협회(Reichsmusikkammer)가 큰 역할을 하였다. 나치는 1933년에 인종법을 채택하고 순수 아리안 민족 이외의 민족에 대한 압박에 착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제국음악협회는 독일에 있는 음악인이라면 누구나 등록하도록 지시했다. 등록서류에는 모든 사항을 자세히 적도록 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혈통과 종교이다. 그래서 유태인이나 집시 출신들을 가려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이같은 음악가 등록으로 수백명의 재능있는 작곡가들이 작품 활동에 의도적인 압박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음악은 단순히 제3제국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주가 금지되었다. 나치는 1938년에 퇴폐음악 리스트를 공개하고 이를 어기면 가차없이 체포하였다. 멘델스존, 말러, 쇤베르크와 같은 불후의 작곡가들의 작품이 허용할수 없는 음악으로 분류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개혁적인 음악을 시도코자 하는 작곡가들도 제약을 받았다. 제국음악협회의 등록작업은 1940년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독일에 있는 모든 음악인의 인종과 종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나마 1940년까지는 감시의 대상이었던 유태 음악가들은 신분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 명단을 사용하면 유태인들을 찾아내고 체포하는 일이 아주 쉬웠다. 나치가 퇴폐작곡가로 낙인을 찍은 대표적인 사람들은 누구인지 살펴보자.


나치는 흑인을 유태인과 마찬가지로 취급하고 흑인의 재즈음악을 퇴폐음악으로 규정하였다.

 

- 베르톨트 골드슈미트(Berthold Goldschmidt: 1903-1996): 뛰어난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골드슈미트는 유태인이기 때문에 사실상 히틀러가 집권하기 이전부터 핍박을 받아왔다. 골드슈미트는 1935년 영국으로 도피하여 지냈으나 어쩐 일인지 전쟁이 끝나고 한참 후인 1980년대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골드슈미트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다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이다.

 

-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1885-1973): 독일의 연주계를 주도했던 클렘페러는 1933년 바그너 서거 50주년 기념으로 탄호이저를 지휘한후 나치의 박해를 피하여 미국으로 도피할수 있었다. 그는 1937년 로스안젤레스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1955년 이후에는 건강문제로 로스안젤레스 교향악단을 사임하였다. 그후 런던으로 간 그는 몇년동안 런던 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로 활동했다.

 

- 에른스트 크레네크(Ernst Krenek: 1900-1991): 현대 오페라인 Jonny Spielt Auf(조니가 연주하다)를 쓰기 전까지는 존경받는 독일의 가톨릭이었다. '조니가 연주하다'의 주역은 흑인이었다. 재즈, 흑인영가, 고전음악이 혼합된 뮤지컬 스타일의 작품이다. 자동차, 기차, 사이렌 소리를 특수음향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퇴폐음악으로 규정을 받았다.

 

- 에릭 코른골트(Erik Korngold: 1897-1957): 유태인 음악 신동이었다. 그는 10세 때에 Der Schneemann(눈사람)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스승인 쳄린스키가 오케스트라로 편곡하여 지휘했다. 그는 일찍 미국으로 건너가서 헐리우드에서 활동했다. 1934년부터는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미국에 있을 때인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코른골트의 집과 재산을 압류했다. 코른골트는 다시는 비엔나로 돌아가지 못했다.

 

- 아놀드 쇤버그(Arnold Schoenberg: 아르놀트 쇤베르크: 1874-1951): 쇤버그는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기 직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지만 유태인에 대한 핍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유태인 말살정책이 즉시 중단되어야 하며 유태인의 권익을 옹호하는 연합체가 구성되어야 하고 독립된 유태인 국가가 설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로 인하여 히틀러와 나치의 미움을 받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는 히틀러가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노력을 기울였다.

 

-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1876-1962): 브루노 발터는 슐레징거에서 태어났다. 제3제국 이전에 라이프치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베를린에도 여러차례 객원지휘자로 초청되어 갔었다. 1933년 나치는 발터의 연주회를 '공공질서에 대한 위협'이라면서 취소하였다. 독일의 음악계는 발터의 안전을 더 이상 보장할수 없었다. 발터는 오스트리아로 갔다가 이어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미국에서 저명한 지휘자 겸 음악자문으로 활동했다.

 

- 안톤 베베른(Anton Webern: 1883-1945): 당초에는 비록 나치당원은 아니었지만 히틀러 추종자였다. 그는 히틀러의 주장에 동조하고 만일 히틀러가 집권하면 유태인 정책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믿었다. 베베른은 쇤버그의 친구였다. 나치는 베베른의 무조음악도 퇴폐음악으로 규정하고 연주를 금지하였다. 베베른은 일체의 음악활동을 접어둔채 은둔생활을 하였다. 1945년 연합군이 비엔나를 탈환한지 얼마후 그는 어떤 미군이 그를 군수물자 밀수꾼으로 오해하고 총을 쏘는 바람에 비엔나에서 사망했다.

 

전쟁 후에 어처구니 없이 세상을 떠난 안톤 베베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