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슈트라우스 왕조

세번의 결혼

정준극 2008. 3. 7. 18:36

세번의 결혼

 

'왈츠 킹'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세번 결혼했다. 첫번 째는 연상의 소프라노로서 사별했다. 두번째는 연하도 한참 연하의 여배우로서 이혼했다. 세번째는 거의 같은 나이의 헝가리 출신의 회계사로 고용한 여인으로 요한 슈트라우스보다 더 살았다. 세 여인 중에서 나중에 요한 슈트라우스와 합창된 사람은 마지막의 회계사 여인뿐이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 있는 수많은 유명 음악인 중에서 부인과 합장된 경우는 요한 슈트라우스가 유일하다. 세번째 부인인 아델레는 헝가리에서 태어났지만 유태계였다. 따지고 보면 요한 슈트라우스도 유태계였다. 그런데 아델레는 유태교인이 아니라 개신교인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아델레와 결혼하기 위해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리고 국적도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포기하고 독일의 코부르크

공국의 시민권을 얻었다. 첫 부인과는 비엔나의 슈테판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번째 부인과는 4구 뷔덴에 있는 칼스키르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세번째 부인과는 비엔나를 떠나 독일의 코부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비엔나 슈타트파르크에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황금기념상. 포아가이거의 자세.

 

요한 슈트라우스(2세)는 1862년, 37세 때에 7세 연상의 메조소프라노 예티 트레프즈(Jetty 또는 Henriette Treffz: 1818-1878)와 처음 결혼하였다. 슈테판성당에서였다. 예티는 비엔나 사교계에서 발이 넓은 여자였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예티의 후원도 있고해서 결혼후 합스부르크 궁정무도회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이 직위를 얻기 위해 여러번 응모했지만 매번 실패했었다. 비엔나 시청의 공무원들과 다투거나 또는 스캔들 때문이었다. 그가 궁정무도회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일반 서민들을 위한 왈츠가 궁정무곡으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첫 번째 부인 예티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미국 순회연주를 주선하는 등 그의 음악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으나 얼마후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의하면 자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요한 슈트라우스와 결혼하기 전에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낳은 아들 중의 하나가 말썽을 일으켜 심적 고통이 많았고 한편 첫 오페레타 ‘박쥐’를 작곡하던 요한 슈트라우스가 ‘박쥐’ 초연에서 아델레(Adele)를 맡은 젊고 예쁜 소프라노와 스캔들을 일으키자 괴로운 마음에서 자살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박쥐' 초연에서 아델레를 맡은 소프라노와 스캔들이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영화에서나 나온 얘기이며 실제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요한 슈트라우스와 첫째 부인 예티(헨리에타 트레프즈)

 

요한 슈트라우스의 집안에서는 첫째 며느리 예티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숨겨왔다. 가톨릭에서는 자살이 큰 죄악이기 때문이었다. 예티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요한 슈트라우스는 몇 주 후에 여베우 안젤리카 디트리히(Angelika Dittrich)와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 4구의 칼스키르헤에서였다. 릴리라고 부르는 안젤리카는 요한 슈트라우스와 나이 차이가 많았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50세가 넘은 초로(初老)였지만 릴리는 20대의 젊은 여인이었다. 릴리는 낭비벽이 있었고 더구나 바람을 피는 바람에 요한 슈트라우스는 결국 이혼을 결심하였다. 릴리는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의 매니저와 좋아지내게 되어 요한 슈트라우스를 떠나 아예 그 매니저의 집에 가서 살았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이혼을 하려고 애썼지만 가톨릭 사회여서 이혼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 슈트라우스는 독일로 가서 개신교 국가인 코부르크의 시민권을 얻어 이혼을 성사시키고 아예 그곳에서 세번째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두번째 부인 안젤리카 디트리히(릴리)

 

세번째 부인은 요한 슈트라우스가 회계사로 고용한 아델라(Adele)라는 여인이었다. 지금까지의 여인들과는 달리 사람이 조순하고 침착하며 이성적이어서 천방지축의 요한 슈트라우스에게는 안성맞춤의 부인이었다. 다시 설명하지만, 요한 슈트라우스는 아델레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릴리와 이혼부터 해야 하지만 가톨릭에서의 이혼은 금물이므로 어쩔수 없이 오스트리아 국적을 버리고 1887년 개신교국가인 독일의 작손-코부르크-고타(Saxe-Coburg-Gotha) 공국의 시민권을 얻어 릴리와 이혼하고 부인인 아델레(Adele)와 결혼하였다. 일설에는 아델레와는 1882년에 이미 결혼하고 그 후에 오스트리아 국적을 버렸다는 얘기가 있다. 어쨌든 아델레와 결혼한 요한 슈트라우스는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평안을 얻어 작곡에 전념하여 오페레타 ‘집시남작’(Der Zigeunerbaron)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완성하여 다시한번 최고의 인기를 끌게 되었다.

 

세번째 부인 아델레와 함께

 

헝가리의 집시생활을 다룬 오페레타 ‘집시남작’은 헝가리 출신인 아델레로부터 영감을 얻어 완성했다고 한다. 이후 요한 슈트라우스는 오스트리아제국의 프란츠 요셉 황제로부터 전쟁과 경제공황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는 공로로 제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이에 감읍한 요한 슈트라우스는 프란츠 요셉 황제를 위해 ‘황제 왈츠’(Kaiser-Walzer)를 작곡했으며 이어 황제 즉위 50주년 기념으로 ‘황제 50주년 왈츠’(Kaiser Jubilaum)을 작곡하였다. 아델레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조부(祖父)와 마찬가지로 유태계였다. 그러나 훗날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나치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할아버지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부인인 아델레가 유태계라는 사실을 숨기느라고 노력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요한 슈트라우스 묘비(아델레와 함께 묻혀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묘소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Zentral Friedhof)의 음악가 묘역에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묘소 옆에는 생전에 그와 교분을 쌓고 지낸 요한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의 묘소가 있다. 나중에 아델레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묘소에 합장되었다.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버지(요한 슈트라우스 1세), 동생들인 요셉 슈트라우스와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의 묘소도 함께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오페레타 '박쥐'의 초연에서 로잘린데를 맡았던 소프라노 마리 가이스팅거(Marie Geistinger)의 묘소도 있다.

 

 4구에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가 서거한 집의 기념 명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