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이탈리아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정준극 2008. 3. 11. 15:36

안토니오 비발디

바로크시대의 위대한 유산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라고 하면 우선 ‘4계’를 연상한다. 바로크 시대를 풍미한 기악곡의 선구자이다. 비발디는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하지만 작곡가로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오페라에 대한 기여 또한 다대하였다. 그는 여러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지만 기악곡의 그늘에 파묻혀 생전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거의 1세기 후에야 그의 오페라에 대한 진면목이 공정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베니스에서 태어난 비발디는 청년 시절에 가톨릭 신부가 되었다. 빨간 머리였기에 사람들은 비발디를 ‘빨간 신부’(The Red Priest)라고 불렀다. 28세 때에 베니스의 어떤 병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음악교사, 합창지휘자, 작곡가로 활동하였고 그 시기부터 그의 작품과 연주가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그의 오페라를 공연하였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결국 말년에 들어서서 인기가 떨어져서 마침내 비엔나에서 곤궁하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오페라가 각광을 받게된  것은 그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후 약 백년부터였다. 비발디의 대부분 작품은 1920년대에 들어와서야 발견되어 무대에 올려지기 시작했다. 비발디는 94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보존된 것은 19편뿐이다. 그 중에서 10편 남짓만이 근년에 녹음되어 알려지게 되었고 나머지 작품들은 불행하게도 아직 단 한 번도 공연된바 없다. 이제 비발디를 집중탐구해 보자


 '다리오의 대관식'. 토리노왕립극장. 다리오가 오론테와 아르파고를 화해시키고 있다.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와 '빨간 사제'(일 프레토 로소)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는 1678년 3월 4일 베니스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베니스는 베니스 공국의 수도였다. 비발디는 태어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다. 신부가 없어서 산파가 세례를 주었다. 그렇게 일찍 세례를 받도록 하는 이유는 대체로 두가지이다. 아기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서 언제 죽을지 모르므로 가톨릭 신앙에 의해 세례부터 받도록 한 것이 하나의 이유이다. 또 하나는 당시에 베니스에 지진이 심하여서 언제 죽을지 모르므로 아기가 태어나면 우선 세례부터 받도록 했던 것이다. 신앙심이 유난히 독실했던 비발디의 어머니는 비발디가 태어나자마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걱정 속에서 무엇보다도 우선 아기 비발디를 하나님께 바쳤다. 즉, 아기 비발디가 만일 살아 난다면 성직자가 되도록 하겠다고 서약한 것이다. 그러나 아기 비발디는 당장 어떻게 되지 않았다. 비발디에 대한 공식적인 세례는 그로부터 두달 후에 산 조반니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비발디의 아버지는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였고 어머니는 카밀라 칼리키오(Camilla Calicchio)였다. 비발디에게는 여덟 형제자매가 있었다.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원내를 이발사였는데 바이올린을 공부해서 전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아버지는 어린 비발디에게 바이올린부터 가르쳤다. 비발디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바이올린을 매우 잘 연주했다. 아버지는 아들 비발디를 데리고 베니스 공국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부자 연주회를 가졌다.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는 사회활동하기를 좋아해서 베니스에서 음악가협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Sovvegno dei musicisti di Santa Cecilia 였다. 산타 체칠리아의 이름을 넣은 것은 성녀 체칠리아가 음악의 수호성인이기 때문이다. 비발디의 아버지가 주동이 되어 이 협회를 창설했지만 회장은 바로크 초기의 이름난 작곡가이며 성마르꼬 바실리카의 음악감독인 조반니 레그렌치(Giovanni Legrenzi)가 맡았다. 비발디는 레그렌치로부터 작곡 이론을 배웠다고 한다. 비발디는 13살 때에 교회 전례음악인 Laetatus sum(RV Anh 31)를 작곡했다. 레그렌치 스타일이었다. 


안토니오 비발디가 세례를 받은 교회에 설치되어 있는 비발디 기념 명판


비발디의 아버지인 조반니 바티스타도 작곡가였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1689년에 조반니 바티스타 로시(Giovanni Battista Rossi)라는 사람이 La Fedelta sfrotunata 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비발디의 아버지가  산타 체칠리아 협회에 회원등록할 때에 조반니 바티스타 로시라는 이름으로 등록했기 대문이다. 그건 그렇고, 비발디의 건강은 어릴 때부터 문제였다. 하다못해 비발디를 낳은 어머니 조차 비발디가 너무 허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포기했을 정도였다. 비발디는 나이가 들자 건강상의 여러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오는 증세가 있었다. 의사들은 천식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바이올린은 계속 열심히 배웠다. 비발디는 여러 목관악기도 배웠다. 그러나 목관악기는 아무래도 천식 증세 때문에 그만두어야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비발디는 15세 때인 1693년부터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정말로 음악가인지 무언지는 집어 치우고 가톨릭 사제가 되고자 했다. 그리하여 10년 후인 25세 때에 신부의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Il Prete Rosso 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빨간 사제'라는 뜻이다. 비발디는 유전적으로 빨간 머리칼이었다. 여기에 사제를 의미하는 빨간 의상을 입었으니 '빨간 사제'라고 불러도 허물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비발디는 역시 건강이 문제였다. 비발디는 사제로 서품을 받은지 1년 후부터 미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좋다는 특별 배려(dispensation)를 받았다. 교회는 이같은 배려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비발디는 거의 모든 미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발디는 평생을 가톨릭 사제로서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1700년대 초반의 베니스 자혜병원. 운하에 면하여 있다.


콘세르바토리오 델로스페달레 델라 피에타(Concervatorio dell'Ospedale della Pieta)

비발디는 1703년에 사제로 서품을 받음과 동시에 베니스에 있는 Ospedale della Pieta(자혜병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의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악장(maestro di violino)로 임명되었다. 비발디는 재능있는 작곡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비발디는 고아원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작곡에도 전념하였다. 대부분 그의 작품들은 그가 자혜병원 고아원에 거의 30년 동안 있으면서 작곡한 것들이다. 베니스에는 이런 고아원이 네곳이 더 있었다. 베니스 공국이 후원하는 고아원들이었다. 고아원의 원생들은 직업교육을 받았고 15세가 되면 떠나야 했다. 여자 아이들은 주로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중에서 재능이 있는 여자 아이들은 15세가 넘어도 남아 있으면서 병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에서 활동할수 있었다. 비발디가 고아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책임 맡고나서부터 이들은 베니스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비발디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위해서 협주곡, 칸타타, 성곡 등을 작곡했다. 특히 직분이 직분이고 기관이 기관이니만치 60곡이 넘는 성곡을 작곡했다. 성곡 중에는 솔로 모테트와 대규모 합창곡이 주류를 이루었다. 비발디는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작곡도 해야 했다. 아이들에게는 음악이론과 악기 연주법 등을 가르쳤다. 비발디는 1716년에 모든 음악활동을 관장하는 음악감독(maestro de' concerti)로 임명되었다.


산타 마리아 델라 피에타 교회. 오늘날 '비발디 교회'라고 부른다. 그러나 비발디의 사후에 완공되었다. 그 옆은 유명한 메트로폴 호텔이다.


비발디가 고아원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수석으로 활동한지 1년 후인 1705년에 그의 첫 작품집이 출판되었다. Connor Cassara 라는 제목이었다. 비발디의 Op 1 로서 두개의 바이올린과 바소 콘티누오를 위한 12개의 소나타를 수록한 작품집이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709년에 두번째 작품집이 출판되었다. 역시 바이올린과 바소 콘티누오를 위한 12개의 소나타이다. 비발디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해준 것은 세번째로 발간된 작품집이었다. Op 3 이었다. L'estro armonico 라는 타이틀의 12개 콘체르티로 되어 있는 작품으로 바이올린 1개, 2개, 4개와 현악기를 위한 협주곡이다. Op 3은 1711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다. Op 3 은 투스카니 대공자 페르디난드에게 헌정된 것이다. 페르디난드 공자는 알레산드로 스칼라티, 조지 프리데릭 헨델 등 여러 음악인들을 후워해 준 사람이었다. 페르디난드 공자는 그 자신이 음악가이기도 했다. 비발디는 페르디난드 공자를 베니스에서 만난 일이 있다고 한다. L'estro armonico는 출판되자 마자 유럽 전역에서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서 1714년에는 Op 4 인 La stravaganza가 출판되었다. 솔로 바이올린과 현악기를 위한 협주곡집이다. 비발디는 Op 4를 자기의 제자로서 베니스의 귀족인 베토르 돌핀(Vettor Dolfin)에게 헌정하였다. 이에 앞서 1711년에 비발디는 아버지와 함께 브레스키아를 여행한 일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그의 '성모애상'(Stabat Mater: RV 621)을 교회 축일의 일환으로 연주하였다. 그런데 아마 '성모애상'을 서둘러서 작곡한 느낌이다. 현악기 파트는 단순하며 첫 세 악장의 음악은 다음 세 악장에서 반복되고 있다. 너무 성의 없이 작곡한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애상'은 비발디의 초기 작품 중에서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오페라 임프레사리오 

18세기 초반에 베니스에서 오페라는 가장 인기있는 음악 이벤트였다. 비발디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었다. 당시 베니스에는 여러 극장들이 있었다. 이들은 관중들을 관심을 끌기 위해서 서로 경쟁이었다. 비발디는 오페라를 작곡하면 대중들의 인기를 끌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했다. 첫 오페라는 Ottone in villa라는 것이었다. 1713년에 베니스가 아닌 비첸자에 있는 가르체리(Garzerie)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그 이듬해에 비발디는 베니스의 테아트로 산 안젤로의 임프레사리오가 되었다. 그의 오페라 Orlando finto pazzo가 그 극장에서 초연을 가졌다. 이 오페라는 대중들의 취향은 아니어서 두어주 후에 막을 내려야 했다. 1715년에는 Nerone fatto Cesare가 공연되었다. 이 오페라의 악보는 분실되어서 어떤 내용인지 알수 없다. 그런데 이 오페라는 7명의 작곡가가 협동하여 완성한 것이다. 물론 비발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긴 했다. 11개의 아리아가 나오는 이 오페라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해 말에 비발디는 Arsilda, regina di Ponto를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작곡했다. 그러나 베니스 당국의 검열로 공연을 허락받지 못했다. 주인공인 아르실다가 리세아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리세아는 실은 여장남자였다. 당국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므로 공연을 허락할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비발디는 이듬해에 허락을 받아서 무대에 올렸고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비발디 는 1716년에 자혜병원을 위해 여러 전례음악들을 작곡했다. 그 중에서 두 개의 오라토리오가 특별히 중요하다. 하나는 Moyses Deus Pharaonis(모세와 바로)이다. 하지만 악보가 분실되어서 어떤 작품인지 알지 못한다. 또 하나는 Juditha triumphans(승전의 유딧)이다. 베니스 공화국이 터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코르푸 섬을 되찾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오라토리오이다. '승전의 유딧'은 종교 음악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1716년에는 또한 두 편의 오페라를 더 작곡하고 제작했다. L'incoronazione di Dario(다리오의 대관)와 La costanza trionfante degli amori e degli odi 였다. La costanza...는 대단한 인기를 끌어서 2년 후에는 Artabano re dei Parto 라는 타이틀로 수정되어 공연되었다. Artabano.,...의 스코어는 분실되었다. 이후로 비발디는 여러 편의 오페라를 더 작곡했고 이것들을 이탈리아 전국에서 환영을 받으며 공연되었다. 비발디의 오페라 스타일은 이른바 진보적이었다. 그래서 보수적인 음악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베네데토 마르셀로(Benedetto Marcello)와 그러했다. 지방판사이면서 아마추어 음악가인 마르셀로는 비발디도 싫고 비발디의 오페라도 싫어서 비발디와 비발디의 오페라를 비난하는 팜플렛을 만들어서 배포하였다. Il teatro alla moda 라는 팜플렛은 비발디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면서 비난하지는 않았다. 표지 그림은 보트가 그려저 있고 한 쪽 구석에는 작은 천사가 사제의 모자를 쓰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이 그려져 있다. 보트는 산탄젤로 극장을 말하며 사제의 모자를 쓴 작은 천사는 비발디를 의미한다. 마르셀로 가족들은 산탄젤로 극장이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 때문에 지루하기 그지없는 법적 소송이 진행되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표지의 또 다른 한 쪽에는 ALDIVIVA 라는 단어가 써 있는데 이것은 A. VIVALDI의 철자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작곡가이며 시인인 베네데토 마르셀로. 비발디의 라이발이었다.


그러면 비발디는 오페라를 몇편이나 작곡했을까? 비발디는 1737년에 후원자인 벤티볼리오(Ventivoglio) 후작에게 보낸 편지를 보내어 '94편의 오페라'라는 표현을 한 것이 있다. 그러면 1737년 이후에도 오페라를 몇 편만이라도 작곡했을 것이므로 비발디가 작곡한 오페라는 줄잡아 94편은 분명하고 여기에 몇 편을 덧붙여서 100편은 작곡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줄곧 파악해서 발견한 오페라는 50여편에 이를 뿐이다. 나머지는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94편의 오페라라는 것이 비발디가 제작하여 무대에 올린 오페라의 숫자라고 볼수도 있다. 하기야 비발디는 거의 25년이란 세월동안 오페라 임프리사리오로 활동했으므로 1년에 간단한 오페라 4편씩만 제작했다고 해도 말이 되는 얘기다. 아무튼 비발디는 생전에 수많은 오페라를 작곡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레산드로 스칼라티, 요한 아돌프 하쎄, 레오나드로 레오, 발다사레 갈루피처럼 우뚝 서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오페라가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 예정기간보다 연장하여 오래 공연된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만투아와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1717년인지 또는 1718년인지 하여튼 비발디는 상당히 좋은 조건의 자리를 제안받았다. 만투아 총독인 필립 공자의 궁정에서 음악감독(Maestro di Cappella)으로 일해 달라는 것이었다. 비발디는 만투아로 가서 3년 동안 지냈다. 이 기간 중에 서너편의 오페라를 완성했다. Tito Manlio 도 그중의 하나였다. 1721년에는 밀라노에 있었다. 전원 드라마인 La Silvia를 내놓았다. 잠시 베니스에 갔다가 이듬해에 다시 밀라노를 찾았다. 오라토리오 L'adorazione delli tre re magi al bambino Gesu(동방박사 세 사람의 아기 예수 경배)도 가져갔다. 이듬해에는 로마로 가서 새로운 스타일의 오페라를 선보였다. 로마에서는 교황 베네딕트 13세가 비발디를 초청하여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비발디는 1725년에 베니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해에 네편의 오페라를 더 작곡했다. 비발디는 베니스에서 있으면서 '사계'(Le quattro stagioni)를 완성했다. 각 계절의 모습을 바이올린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사계'는 네 개의 별도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세 계절은 비발디의 오리지널 콘셉트에 의한 것이지만 '봄'은 그의 오페라 Giustino의 1막에 나오는 신포니아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이다. 비발디가 '사계'에 대한 영감을 얻은 것은 만투아 주변의 시골 풍경으로부터 였다고 한다. '사계'는 당시로서 가히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 왜냐하면 비발디는 음악으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 지저귀는 새들(여러 종류의 새들을 각각 특색있게 표현), 개 짖는 소리, 모기가 윙윙거리는 소리, 목동들이 외치는 소리, 폭풍 소리, 술취해서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 조용한 밤의 풍경, 사냥하는 장면, 얼어 붙은 산하, 스케이트 타는 어린이들의 모습, 겨울밤의 따듯한 불길 등등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표제음악의 선구였다. '사계'는 1725년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12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구성된 Il cimento dell'armonia e dell'inventione(하모니와 창작의 경쟁)에서 첫번재 네 협주곡이 '사계'이다. 


비발디는 만투아에 있는 중에 아주 발랄하고 젊고 예쁜 소프라노인 안나 지로()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안나 지로는 비발디의 제자였다. 비발디의 그의 오페라에 안나 지로를 프리마 돈나로서 등장시켰다. 비발디는 안나 지로의 후견인 격이었다. 비발디와 안나는 연주여행을 다닐 때마다 함께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안나의 언니인 파올리나도 동행하였다. 비발디와 안나가 특별한 관계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친구 이상의 관계였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하기야 비발디는 가톨릭 사제로서 서품을 받은 사람이므로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느니 무어니 하면 난처한 입장이었다. 어느때 누가 비발디에게 안나 지로와 어떤 관계냐고 묻자 비발디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관계가 있다면 선생과 제자의 관계이며 친구의 관계일 뿐이다'라고 확신적으로 대답했다.


말년의 비발디, 그리고 예상치 못한 죽음

비발디의 명성이 한창 높았을 때 그는 유럽의 여러 귀족들이나 왕족들로부터 작곡요청을 받았다. 세레나타(또는 칸타타) Gloria e Imeneo는 1725년에 베니스 주재 프랑스 대사가 루이 15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의뢰한 것이다. 이듬 해에 또 다른 세레나타인 La Sena festeggiante는 프랑스 왕족인 앙리에트 공주와 루이 엘리자베스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되어 베니스의 프랑스 대사관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비발디의 Op 9 La cetra는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 6세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비발디는 1728년에 트리에스테에서 샤를르 6세를 처음 만났다. 그때 샤를르 6세는 트리에스테 신항만의 건축 현황을 시찰하러 왔었다. 샤를르 6세는 비발디의 음악을 듣고 대단히 감동을 받았다. 샤를르 6세는 모든 공식 일정을 미루고 비발디와 오랜 시간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샤를르 황제가 2년 동안 그의 장관들과 대화를 나눈 것보다 더 많은 대화를 비발디와 나누었다고 말했다. 샤를르 황제는 비발디에게 기사의 작위를 주고 황금 메달도 주었다. 그리고 비엔나로 오라고 초청했다. 비발디는 샤를르에게 La cetra의 사본을 증정하였다. 그리하여 비발디는 1730년에 아버지와 함께 비엔나와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하지만 주로 비엔나와 프라하에서 오페라 '화르나체'(Farnace)의 공연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비발디는 이탈리아 출신의 뛰어난 대본가들과 협동하여 몇 편의 오페라를 만들수 있었다. L'Olimpiade와 Catone in Utica는 당대 최고의 대본가인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가 쓴 대본으로 만들었다. 당시 메타스타시오는 비엔나 궁정 시인으로 아르카디아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또 하나는 La Griselda로서 젊은 대본가인 카를로 골도니(Carlo Goldoni)의 대본을 사용한 것이다. 비엔나를 일차 방문했던 비발디는 막강한 샤를르 6세의 얘기도 있고 해서 비엔나에 정착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베니스의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베니스로 돌아왔다.


비발디를 비엔나로 초청한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 6세 황제. 그의 뒤를 이은 군주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였다. 샤를르 6세로 인하여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Österreichischer Erbfolgekrieg: 1740–48)이 일어났다.


비발디는 그 시대의 다른 여러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말년에 접어 들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작품은 과거에 베니스에서 그랬던 것 처럼 대단한 추앙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의 음악적 취향이 급하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비발디의 음악은 유행에 뒤쳐진 것이 되었다. 비발디는 비엔나에 가는 경비 등등을 충당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악보들을 팔기 시작했다. 비발디는 비엔나에 가서 궁정 작곡가로 임명을 받으면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비발디는 1739년 후반에 베니스를 떠나 비엔나로 향하였다. 비발디는 비엔나로 가는 도중에 그라츠에 들려서 예전에 만투아에서 가깝게 지냈던 안나 지로를 만났다고도 하지만 확실치 않다. 비발디가 비엔나로 떠난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오페라를 비엔나에서 공연하는 일을 관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캐른트터토르극장 옆에 숙소를 정했다. 말안장 만드는 사람의 부인이 남편이 죽자 방을 세를 놓아서 먹고 지내는 집이었다. 오늘날 자허(Sacher) 호텔 자리이다. 비발디가 비엔나에 도착하고나서 얼마 후인 1740년 10월에 그를 초청한 샤를르 6세 황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비발디를 돌보아 줄 황실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의지할 곳도 없게 되었다. 그후로부터 비발디는 빈궁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이듬해인 1741년 7월 27일인가 28일에 향년 63세로 오늘날 자허 호텔이 있는 자리의 집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비발디는 7월 28일에 칼스키르헤(Karlskirche) 옆에 있는 어떤 시립병원이 소유하고 있는 땅에 매장되었다. 그곳은 무연고자나 극빈자 또는 처형당한 사형수의 시신을 매장하는 장소였다. 기록에 의하면 비발디의 무덤은 무덤이라고도 할수 없는 아주 평범한 것이었다고 한다. 비발디의 무덤은 오늘날 비엔나공과대학(TU)에 속한 지역이지만 무덤이 사라진지는 오래이다. 다만, 비엔나공과대학의 건물 벽면에 그런 사실을 기록한 명판이 부착되어 있어서 이곳이 비발디가 묻혔던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비발디의 장례식은 슈테판대성당에서 조촐하게 거행되었다. 장례미사에서는 통상 진혼곡 등등이 연주되지만 비발디의 경우에는 어떠한 음악도 연주되지 않았다.

비발디가 매장되었다고 생각되는 지점에는 오늘날 비엔나공과대학의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건물의 외벽에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이 자리에 1789년까지 시민병원 또는 극빈자 및 죄수들의 묘지가 있었으며 1678년 3월에 베니스에서 태어난 안토니오 비발디가 1741년 7월 28일 이곳에 매장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사후의 명성
비발디는 생전에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특히 프랑스에서 그랬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에 대한 기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바로크 시기가 지나나 비발디의 협주곡들은 '그런 것들이 있었나?'라고 할 정도로 무시되었다. 비발디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사계' 마저도 바로크 이후의 고전 시대와 낭만 시대에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그의 협주곡 C 장조를 비발디 스타일로 작곡하여서 비발디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이를 바탕으로 프랑스의 음악학자인 마르크 팽셰를(Marc Pincherle)이 비발디의 작품을 하나부터 열까지 세밀하게 조사하는 작업을 펼쳤다. 그로인하여 새로 발견된 비발디의 작품들이 많아졌다. 토리노의 기업가들인 로베르토 포아(Roberto Foa)와 필리포 조르다노(Philippo Giordano)가 그들의 아들들을 추모해서 비발디의 작품 악보들을 될수 있는대로 매입해서 토리노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와 함께 세계의 음악학자들 사이에는 비발디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알프레드 카셀라, 에즈라 파운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20세기 비발디 리바이발의 촉진제였다.

그러는 중에 1926년 또 다른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피에드몽 수도원에서 종교음악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도서관의 장서 중에서 비발디의 작품들을 14개 묶음으로 만들어서 보관해 둔 것을 발견했다. 살펴보니 나폴레옹 전쟁 때에 대부분 분실되었던 것으로 여겨졌던 악보들이었다. 그런가하면 18세기에 이 수도원을 소유했던 두라쪼 대공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 중에서도 상당량의 비발디 악보들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정리해 보니 협주곡 300편, 오페라 19편, 기타 성악-기악곡 100편이라는 엄청난 작품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비발디의 미발표 작품들에게 생명을 준 사람으로서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알프레도 카셀라(Alfredo Casella: 1883-1947)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알프레드 카셀라는 1939년에 처음으로 '비발디 주간'을 조직했다. 이때에 새로 발견된 '글로리아'(Gloria)와 '올림피아드'(l'Olimpiade)가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예술활동이 활발해지자 비발디의 작품은 언제나 성공을 거두었다. 근자에도 비발디의 작품들이 새로 발견되고 있다. 2003년과 2005년에는 호주의 음악학자인 재니스 스토키그트(Janice Stockigt)가 시편의 구절을 가사로 삼은 Nisi Dominus와 Dixit Dominus의 악보를 발견했다. 2006년에는 분실되었다고 믿어졌던 오페라 Argippo의 악보가 발견되었다. 체코의 하프시코디스트이며 지휘자인 온드레이 마체크(Ondrej Macek: 1971-)가 우연히 발견했다. 그가 이끄는 호프무지치 오케스트라가 이 오페라를 2008년에 프라하성에서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했다. 1730년에 처음 연주된 이래 거의 280년만에 들어보는 연주였다. 비발디의 작품은 오늘날 RV 넘버로서 정리되어 있다. 네덜란드의 음악학자인 피터 리옴(Peter Ryom)이 정리했다. RV는 Ryom Verzeichnis의 약자이다.


비발디의 오페라 수첩

RV

제목

대본초연일초연 장소기타
729Ottone in villaDomenico LalliMay 1713Vicenza, Teatro di Piazza
727Orlando finto pazzoGrazio BraccioliNovember 1714Venice, Teatro Sant'Angelo
819Orlando furioso1714Venice, Teatro San Angelopart survives in manuscript, parts later reworked in RV 728 q.v.
724Nerone fatto CesareMatteo NorisCarnival 1715Venice, Teatro Sant’Angelopasticcio (Francesco Gasparini, Giuseppe Maria Orlandini, Carlo Francesco Pollarolo, Vivaldi)
706La costanza trionfante degl'amori e de gl'odiiAntonio MarchiCarnival 1716Venice, Teatro San Moisèreworked as Artabano, re dei Parti (RV 701) in 1718, then as Doriclea (RV 708) in 1732
700Arsilda, regina di PontoDomenico Lalli27 or 28 October 1716Venice, Teatro Sant'Angelo
719L'incoronazione di DarioAdriano Morselli23 January 1717Venice, Teatro Sant'Angelo
737TietebergaAntonio Maria Lucchini16 October 1717Venice, Teatro San Moisè
Anh 58Il vinto trionfante del vincitoreAntonio MarchiAutumn 1717Venice, Teatro Sant’Angelopasticcio, possibly with some music by Vivaldi
701Artabano, re dei PartiAntonio MarchiCarnival 1718Venice, Teatro San Moisèreworking of La costanza trionfante (RV 706)
699Armida al campo d'EgittoGiovanni PalazziCarnival 1718Venice, Teatro San Moisè. Further performances in Venice on 26 December 1730 and 12 February 1738.[1]reworked as Gl’inganni per vendetta (RV 720) in 1720
732ScanderbegAntonio Salvi22 June 1718Florence, Teatro della Pergola
736TeuzzoneApostolo Zeno28 December 1718Mantua, Teatro Arciducale
738Tito ManlioMatteo NorisCarnival 1719Mantua, Teatro Arciducale
778Tito ManlioMatteo NorisCarnival 1720Rome, Teatro della Pacepasticcio. Act III only by Vivaldi.
704La Candace, o siano Li veri amiciFrancesco Silvani and Domenico LalliCarnival 1720Mantua, Teatro Arciducale
720Gl’inganni per vendettaGiovanni Palazzi or Domenico Lalli1720Vicenza, Teatro delle Grazie[2][3]reworking of Armida al campo d’Egitto (RV 699)
739La verità in cimentoGiovanni Palazzi26 October (?) 1720Venice, Teatro Sant'Angelo
715Filippo re di MacedoniaDomenico Lalli27 December 1720Venice, Teatro Sant’Angelopasticcio
734La SilviaEnrico Bissari28 August 1721Milan, Reggio Ducale
710Ercole su'l TermodonteGiacomo Francesco BussaniJanuary 1723Rome, Teatro Capranica
717GiustinoNicolò Beregan / Pietro PariatiCarnival 1724Rome, Teatro Capranica
740La virtù trionfante dell’amore, e dell’odio, overo Il TigraneFrancesco SilvaniCarnival 1724Rome, Teatro Capranicapasticcio (only Act II by Vivaldi)
721L’inganno trionfante in amoreMatteo NorisAutumn 1725Venice, Teatro Sant'Angelo
707CunegondaAgostino Piovene29 January 1726Venice, Teatro Sant'Angelo
712La fede tradita e vendicataFrancesco Silvani16 February 1726Venice, Teatro Sant'Angelo
Anh 55La tirannia castigataFrancesco SilvaniCarnival 1726Prague, Sporck Theater
709Dorilla in TempeAntonio Maria Lucchini9 November 1726Venice, Teatro Sant’Angelopasticcio
722IpermestraAntonio Salvi25 January 1727Florence, Teatro della Pergola
711FarnaceAntonio Maria Lucchini10 February 1727Venice, Teatro Sant'Angelo
735Siroe, re di PersiaMetastasioAscension 1727Reggio Emilia, Teatro Pubblico
728Orlando furiosoGrazio BraccioliAutumn 1727Venice, Teatro Sant'Angelo
730Rosilena ed OrontaGiovanni PalazziCarnival 1728Venice, Teatro Sant'Angelo
702AtenaideApostolo Zeno29 December 1728Florence, Teatro della Pergola
697ArgippoDomenico LalliAutumn 1730Prague, Sporck Theaterseven arias were rediscovered in Regensburg by ondrej Macek
696Alvilda regina de' GotiGiulio Cesare CorradiSpring 1731Prague, Sporck Theateronly some arias by Vivaldi, probably from other operas. Transferred to the Anhang as RV Anh. 88
733SemiramideFrancesco Silvani and Domenico LalliCarnival 1731Mantua, Teatro Arciducale
714La fida ninfaFrancesco ScipioneCarnival 1732Verona, Teatro Filarmonico
708DoricleaAntonio Marchi1732Prague, Sporck Theaterreworking of La costanza trionfante (RV 706)
723MotezumaGirolamo Alvise Giusti14 November 1733Venice, Teatro Sant'Angelo
725L'OlimpiadeMetastasio17 February 1734Venice, Teatro Sant'Angelo
695L’AdelaideAntonio SalviCarnival 1735Verona, Teatro Filarmonico
703Il Tamerlano (Il Bajazet)Agostino PioveneCarnival 1735Verona, Teatro Filarmonicopasticcio
718GriseldaApostolo Zeno / Carlo Goldoni18 May 1735Venice, Teatro San Samuele
698AristideCarlo GoldoniAutumn 1735Venice, Teatro San SamueleTransferred to the Anhang as RV Anh. 89
716Ginevra principessa di ScoziaAntonio Salvi17 January 1736Florence, Teatro della Pergola
705Catone in UticaMetastasio26 May 1737Verona, Teatro Filarmonico
726L'oracolo in MesseniaApostolo Zeno30 December 1737Venice, Teatro Sant'Angelo
777Il giorno felice?1737VeniceTransferred to the Anhang as RV Anh. 92
731Rosmira (Rosmira fedele)Silvio Stampiglia27 January 1738Venice, Teatro Sant'Angelo
713FeraspeFrancesco Silvani1739Venice, Teatro Sant'Angelo


[비발디의 스승 코렐리]

아르칸젤로 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1713)는 비발디의 스승이었다. 비발디의 유명한 Concerto Grosso는 원래 코렐리의 아이디어에 의한 것이었다. 코렐리의 성공적인 모델은 비발디뿐만 아니라 바흐와 헨델에게까지 영향을 끼쳐 이들이 콘체르토 그로쏘의 걸작들을 만들어 내게 하였다. 코렐리가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지만 그의 콘체르토 그로쏘 스타일은 훗날 여러 오페라의 오케스트레이션에 반영되었다. 코렐리는 ‘근대 바이올린 기법의 아버지’ ‘세계 최초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콘체르토 그로쏘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