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독일-오스트리아

훔멜, 요한 네포무크

정준극 2008. 3. 14. 15:16
 

고전에서 낭만으로의 변환

요한 네포무크 훔멜


 

오스트리아 음악가인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 1778-1837: Jan Nepomuk Hummel)의 작품은 고전에서 낭만주의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음악을 반영하는 것이다. 훔멜의 오페라는 거의 잊혀져 있으나 그의 피아노 작품 등은 아직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훔멜은 프레쓰부르크(Pressburg: 현 슬로바키아의 Brastilav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셉 훔멜은 오스트로-헝가리제국 군악학교 교장이었으며 비엔나의 쉬카네더(Schikaneder: 모차르트의 마적 대본 작성자)극장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다. 어느날 요한 훔멜을 만난 모차르트는 어린 훔멜의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자기가 데리고 피아노와 작곡공부를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때 모차르트는 30세였고 훔멜은 8세였다. 훔멜은 2년동안 무료로 모차르트의 집에서 기숙하며 지냈다. 아마 모차르트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은 사람은 역사상 훔멜이 처음일 것이다. 피아니스트로서 훔멜의 첫 무대 연주는 9살 때 모차르트의 콘서트에 출연한 것이었다.  


훔멜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자랑스러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훔멜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어린 모차르트를 데리고 유럽 순회연주를 다녔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린 훔멜을 데리고 유럽 순회연주를 떠났다. 우선 도착한 런던에서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런던에서는 작곡가 무치오 클레멘티(Muzio Clementi)가 훔멜에게 레슨을 하겠다고 자원했다. 훔멜은 런던에서 4년을 보냈다. 어느날 런던을 방문한 하이든이  훔멜의 재능을 보고 감동격하여 얼마후 훔멜을 위해 소나타를 작곡해 주었다. 피아노 소나타 A플랫이었다. 훔멜은 이 소나타를 하이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런던의 하노버연주회장에서 당당하게 초연했다. 하이든은 어린 훔멜에게 자기의 곡을 연주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1기니의 돈을 쥐어 주었다. 프랑스혁명과 그 후의 공포정치로 인하여 훔멜의 프랑스 및 스페인 순회연주는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비엔나에 돌아온 훔멜은 당대의 알브레헤트버거(Albrechtsberger), 하이든, 살리에리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그때쯤하여 청년 베토벤이 비엔나에 왔다. 베토벤은 훔멜보다 8살 위였다. 베토벤도 알브레헤트버거와 하이든에게서 레슨을 받았다. 그로부터 훔멜과 베토벤은 동문으로서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간혹 의견이 달라 격론을 벌이기도 했지만 평생 친구였다. 베토벤이 병마와 싸우며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시기에 훔멜은 자기 부인 엘리자베트, 제자인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Hiller)와 함께 과일을 사들고 베토벤을 자주 찾아가 병문안을 했다. 베토벤은 훔멜에게 자기가 죽은 후에 미발표된 작품을 연주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훔멜은 베토벤의 희망에 따라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후 이 위대한 인물을 추모하는 기념음악회를 주선하였다. 이 음악회를 통하여 슈베르트와 훔멜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도 베토벤이 서거한지 1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훔멜을 존경한 슈베르트는 마지막 3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훔멜에게 헌정하였다. 그러나 이 소나타들이 출판될 당시에는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났으므로 출판업자는 이를 슈베르트가 로베르트 슈만에게 헌정하는 것으로 하여 초판을 출판했다. 슈만은 당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로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작품을 헌정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1804년 훔멜은 하이든의 뒤를 이어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에스터하지 궁전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하이든이 양로원에서도 환영하지 않을 정도로 연로하여 에스터하지 궁전에서의 직분을 감당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훔멜은 7년동안 이곳에 머물렀으나 하이든처럼 성실하지는 못해서인지 아무튼 책임과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기왕에 잘 되었다고 생각한 훔멜은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였다. 그 때 소프라노로서 오페라에 자주 출연했던 엘리자베트 뢰켈(Elisabeth Röckel)을 만났고 만난 김에 결혼했다. 훔멜은 후에 슈투트가르트와 봐이마르의 음악감독에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괴테, 쉴러와 친밀하게 지냈다. 훔멜은 봐이마르에 머무는 동안 이 도시를 유럽 제1의 음악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훔멜은 정상급 음악인을 자주 초청하였다. 훔멜은 또한 봐이마르의 동료 음악가들을 위한 연금제도를 만들었다. 연금의 재원이 부족하면 특별 연주회를 열어 기금을 충당했다. 훔멜은 음악의 지적재산권과 저작권 옹호를 위해 처음으로 투쟁한 음악인이었다. 모차르트가 가난하게 살았던 것은 저작권이 보호받지 못해서라는 얘기가 있다. 훔멜이 더 일찍 사회에 등장해서 음악가 연금제도를 만들고 저작권 보호 운동을 했다면 모차르트의 생명도 연장되었을 것이고 베토벤의 청각장애도 고쳤을 것이다. 훔멜은 1828년 ‘피아노연주예술에 대한 이론 및 실제 완전정복’(A Complete Theoretical and Practical Course of Instruction on the Art of Playing the Piano Forte)라는 책을 썼다. 책이 나오자마자 며칠만에 수천권이 팔리는 인기를 끌었다. 운지법과 장식적 연주에 대한 새로운 스타일을 설명한 책이었다. 19세기 후반의 피아니스트들은 거의 모두 훔멜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칼 체르니(Carl Czerny)는 원래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나 어느날 밤 훔멜의 연주를 보고 훔멜에게 배우기로 결심했다. 훔멜의 초기음악 스타일은 쇼팽, 슈만, 리스트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생의 말년에 이른 훔멜은 수많은 젊은 작곡가들의 등장을 보고 작곡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훔멜은 많은 존경을 받았다. 훔멜은 봐이마르에서 조용하게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프리메이슨이었던 훔멜은 그의 저택에 붙어있는 넓은 땅을 프리메이슨을 위해 유산으로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훔멜의 죽음을 애도했고 사후에도 상당기간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연주회가 열렸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훔멜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고전을 낡은 패션으로 인식하기 때문이었다. 훔멜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이라는 거목의 그늘에 가려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서 위대한 훔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훔멜은 10편 이상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나 몇편은 미완성이었으며 완성된 것도 어떤 것은 악보를 찾을수 없어 어떤 오페라였는지 알수 없다.     


훔멜의 오페라 수첩

● Mathilde von Guise ● Le vicende d'Amore(1804) ● Die vereitelten Ranke(1806) ● Die Hausist zu verkaufen(1812) ● Die Messenier(그랜드 오페라: 1805-10) ● Il viaggiator ridicole(1797: 미완성) ● Dankgefuhl einer Geretteten(1799: 모노드라마) ● Demagorgon(1800 미완성) ● Fünf sind Zwey(1813) ● Der Junker in der Mühle(1813) ● Die Esleschaut (Die Blaue Insel: 1814) ● Attila(1825-27: 미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