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독일-오스트리아

휘츠너, 한스

정준극 2008. 3. 14. 16:02

오페라 '팔레스트리나'의 

한스 휘츠너


한스 휘츠너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한스 휘츠너(Hans Pfitzner: 1869-1949)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공부를 마치고 마인츠오페라의 음악감독을 지냈으며 그후 베를린, 슈트라스부르그, 뮌헨등지에서 65세까지 학생들을 가르친 평생 음악교수였다. 그의 작품 활동은 정년 퇴직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 노익장! 물론 교수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작곡에 전념했다. 휘츠너는 6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첫 작품은 Der arme Heinrich(가난한 하인리히)로서 26세 때에 완성한 것이다. 그 이후에 내놓은 몇편의 오페라는 바그너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1917년에 내놓은 Palestrina(팔레스트리나)는 온전히 자서전적 입장에서 독자적인 경향을 보여준 것이다. 그의 오페라에 흐르는 기본은 독일 낭만주의적 전통이다. 그는 교향곡, 협주곡, 독주곡, 그리고 1백여 편의 가곡을 남겼다. 그는 전쟁기간중 나치와 불화하여서 고전을 겪기도 했다. 휘츠너는 비엔나에서도 살았으며 잘츠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휘츠너의 작품은 팬들에게는 대단한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일반사람들로부터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팔레스트리나'의 한 장면



한스 휘츠너는 자신을 '반현대주의자'(앤티 모더니스트)라고 말했다. 어째서 그랬을까? 휘츠너의 대표작은 오페라 '팔레스트리나'이다. 후기 낭만주의에 해당하는 오페라이다. '팔레스트리나'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의 영욕에 얽힌 생애를 단편이나마 그린 작품이다. 휘츠너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모스크바 어떤 극장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휘츠너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1872년에 고향인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그때 휘츠너는 고작 두살이었다. 휘츠너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다. 휘츠너의 첫 작품은 그가 11살 때였다. 노래 몇 곡을 작곡한 것이었다. 그후 휘츠너는 프랑크푸르트 음악대학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다. 그는 나중에 피아노 선생이었던 제임스 콰스트의 딸인 미미와 결혼하였다. 프랑크푸르트 음악대원을 나온 그는 코블렌츠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가르쳤고 1894년에는 마인츠 시립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봉급 수준이 낮아서 그후 이곳 저곳에서 좀 더 나은 직업을 찾아다니며 지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나이는 40이나 되었다. 그때 겨우 얻은 직장은 슈트라스부르크음악원장 겸 오페라 감독이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는 오페라단을 자기 의사대로 운영할수 있었다. 음악감독으로서 그는 무대감독도 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같은 견해는 그의 나머지 생애에서 어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차 대전이 끝나자 슈트라스부르크가 속한 알자체(알사스)가 프랑스로 넘어간 것이다. 독일인인 휘츠너는 직장을 잃었고 어영부영 절망 중에 지내다보니 어느덧 나이는 50이 되었다. 이같은 곤경은 휘츠너의 성격 형성에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자기가 독일 예술에 기여했다는 엘리트 의식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보상은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가 자기를 거들떠 보지 않는다고 믿었다. 자기의 음악이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독일이라는 커다란 집단이 자기를 소외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자괴감과 문화적 염세주의는 1920년대에 들어서서 더욱 심화되었다. 더구나 1926년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첫째 아들 파울은 뇌막염으로 격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휘츠너는 작품으로 자기에 대한 사회의 악독한 인식을 불식시켜보기로 했다. 1895년에 그의 첫 오페라인 '가난한 하인리히'(Der arme Heinrich)가 선을 보이게 되었다. 하르트만 폰 아우(Hartmann von Aue)의 동명 시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타이틀 롤은 당대의 테너 리하르트 브루노 하이드리히(Richard Bruno Heydrich)가 맡았다. 공연은 하이드리히로 인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최대 걸작인 '팔레스트리나'(Palestrina)는 뮌헨에서 1917년 6월에 초연을 갖게 되었다. 유태인 지휘자인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초연의 지휘를 맡았다. 발터는 위대한 지휘자였다. '팔레트리나'는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62년 2월에 발터는 임종에 앞서서 '나는 세상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팔레스트리나'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작품은 불후의 걸작이라는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휘츠너는 중년 이후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점차 국수수의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초기에는 제3제국의 실력있는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기도 했다. '저런 분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동정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한스 프랑크(Hans Frank)가 그랬다. 한스 프랑크는 히틀러의 개인 변호사였다. 그러다가 히틀러가 집권하자 상승세를 타고 점령지 폴란드의 고위직으로 임명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특히 폴란드의 유태인들을 집단 학살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 전범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다. 그런 그가 나치의 간부로 있을 때에 휘츠너에게 동정적이었다. 그러나 휘츠너는 나치와 잘 지내지 못했다. 오히려 나치가 휘츠너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예를 들면 휘츠너는 유태인 지휘자 브루노 발터와 친밀하게 지냈다. 물론 음악때문에 그러했다. 발터가 '팔레스트리나'의 초연을 지휘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나치는 휘츠너가 유태인과 친밀하다는 이유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휘츠너가 나치로부터 미움을 산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다. 나치는 휘츠너에게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의 극음악을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여름 밤의 꿈'의 극음악은 이미 멘델스존이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다. 그러나 나치는 멘델스존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멘델스존이 작곡한 '한여름 밤의 꿈'의 극음악을 금지했다. 그래서 휘츠너에게 새로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자 휘츠너는 자기가 아무리 새로 작곡을 한다고 해도 멘델스존의 오리지널에는 감히 미치지 못하므로 작곡할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점이 나치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1923년에 휘츠너는 히틀러를 만난 일이 있다. 휘츠너는 나치의 정치 지도가가 된 안톤 드렉슬러(Anton Drexler)와 잘 아는 사이였다. 이때 휘츠너는 췌장에 문제가 있어서 수술을 받았다. 드렉슬러가 다리를 놓아서 히틀러가 병문안을 오게 되었다. 휘츠너와 히틀러는 동성연애와 반유태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휘츠너는 오토 봐이닝거(Otto Weininger)의 동성연애 반대와 유태인 반대 사상을 이해할수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화가 났는지 서둘러서 병실에서 나갔다. 나중에 히틀러는 나치 문화정책 담당자인 알프레드 로젠버그(Alfred Rosenberg)에게 '저 유태인 랍비와 같은 사람과는 다시는 관련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유태인 랍비'라는 것은 유태인에게 동정적인 휘츠너를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조차 모르는 휘츠너는 히틀러가 자기에게 동정적이라고 믿었다. 1933년에 나치가 권력을 잡자 로젠버그는 휘츠너에게 '독일문화를 위한 투쟁연맹'(Kampfbund fur deutsches Kultur: Militant League for German Culture)의 모임에서 강연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기야 휘츠너는 강연을 못하기로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지만 혹시라도 나치 장권에서 적당한 직분을 얻지 않을까 해서 강연을 수락했다. 사실상 나치는 휘츠너를 뒤셀도르프 오페라 감독의 자리, 또는 베를린 시립오페라의 총감독 중에서 하나를 맡길 생각이었다. 그래서 히틀러에게 넌즈시 휘츠너에게 그런 자리를 주면 어떻겠느냐고 까지 말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런 의견을 묵살하고 휘츠너에게 아무런 배려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나치는 점차 휘츠너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휘츠너는 1933년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한스 프랑크와 빌헬름 프리크(Wilhelm Frick)가 잘츠부르크 참석을 반대했다. 당시 한스 프랑크는 바바리아의 법무장관이었고 빌헬름 프리크는 히틀러 내각의 내무장관이었다. 아무튼 대신에 휘츠너는 뮌헨 오페라의 지휘자 자리를 얻을수 있었다. 그러나 수석 지휘자인 한스 크나퍼츠부슈(Hans Knappertsbusch)가 극장 측으로부터, 특히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별명의 극장장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그 문제에 끼어 들었다가 오히려 난처한 입장이 된 일도 있었다.


그러한 연유 때문인지 하여튼 휘츠너는 1934년에 오페라 지휘자, 무대 감독, 음악원 겸임교수의 자리를 모두 상실했다. 다만, 휘츠너는 매달 그저 수백 마르크의 연금을 받는 혜택은 받았다. 수백 마르크라면 당시의 물가로 볼때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정도였다. 그런 대우는 1937년에 괴벨스가 나치 선전장관이 된 후에 해결해 줄 때까지 계속되었다. 휘츠너는 1934년에 나치 집회에서 지휘를 맡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런 역할도 거절 당했다. 그때 휘츠너는 히틀러가 자기를 반쪽 유태인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물론 히틀러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첫 사람은 아니었다. 히틀러의 친구로서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감독인 비니프레드 바그너(Winifred Wagner)도 일찍부터 휘츠너를 반쪽 유태인으로 보았다. 휘츠너는 자기가 유태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순전한 비유태인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억지로라도 입증해야 했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1939년에 이르러서 휘츠너는 아예 나치로부터 무시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다만, 한스 프랑크만이 그나마 휘츠너의 재능을 존경하였을 뿐이었다.


유태인 문제에 대한 휘츠너의 견해는 비논리적이며 모순되는 입장일 경우가 많았다. 휘츠너는 유태인 문제는 인종적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문제라고 보았다. 휘츠너는 일찍이 1930년에 유태인 문제에 대한 성명서를 낸 일이 있다. 그는 이 성명서에서 '유태인들이 독일 정신생활과 독일 문화에 위험하다고 하지만 유태인들은 독일을 위해서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반유태주의는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휘츠너는 그런 예를 얼마든지 들수 있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면 한스 마르슈너(Hans Msrschner)의 오페라 '성전기사와 유태여인'(Der Templer und die Jüdin)은 훌륭한 작품으로서 찬사를 받아야 하는 작품이라고 내세웠다. 휘츠너는 또한 유태인 제자인 펠릭스 볼페스(Felix Wolfes)를 보호해 주었다. 그 즈음에 지휘자 푸르트 뱅글러(Furtwngler)도 유태인 부인을 둔 젊은 지휘자 한스 슈비거(Hans Schwieger)가 당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또한 푸르트뱅글러는 휘츠너와 마찬가지로 유태인 지휘자인 브루노 발터와 계속 친분을 유지하였다. 휘츠너는 또한 어릴 때부터의 친구인 파울 코스만(Paul Cossman)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유태인이기 때문에 자기혐오가 심한 코스만은 아무리 유태교를 신봉하지 않고 있지만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1933년에 체포되어 구금생활을 하고 있었다.


'성전기사와 유태여인'의 현대적 연출. 베를린 코믹 오페라


휘츠너가 유태인인 크로스만을 석방시키려고 노력하자 게슈타포가 휘츠너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다. 특히 게슈타포 대단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가 직접 휘츠너를 조사하였다. 하이드리히는 휘츠너의 첫 오페라인 '가난한 하인리히'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던 헬덴테너 리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아들이어서 휘츠너와 무관한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휘츠너의 배후를 조사하였다. 휘츠너가 크로스만의 석방을 위해 제출한 청원서는 효과가 있었던지 1934년에 석방되었지만 결국 1942년에 다시 체포되었고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실상 휘츠너는 평생을 통해서 여러 유태인들과 함께 일하였고 그들을 지원하였다. 휘츠너는 1930년대 초반에 유명한 콘트랄토인 오틸리에 메츠거 라터만(Ottilie Metzger-Lattermann)의 리사이틀에서 자주 피아노 반주를 했고 그 전에는 네개의 노래(Op 19)를 작곡하여 헌정까지 했다. 오틸리에 메츠거는 아우슈비츠에서 세상을 떠났다. 휘츠너는 1909년에 유태인 평론가이며 유태문화협회 창설자인 아르투르 엘뢰서(Arthur Eloesser)에게 Op 24의 가곡들을 헌정했다. 휘츠너는 그러면서도 반유태주의자들인 평론가 발터 아벤드로트(Walter Abendroth), 빅토르 융크(Victor Junk)등과도 친분을 유지하며 지냈다. 그렇다고 물론 반유태주의적인 욕설이나 비방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당시에 독일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유태인에 대한 욕설과 비방은 이상할 것이 없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휘츠너는 나치가 득세하고 있는 세상에서 한때 연주조차 하지 못하도록 억제를 받았다. 


휘츠너의 집은 전쟁 중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휘츠너가 그나마 혜택으로 가지고 있던 뮌헨음악아카데미 회원권은 취소되었다. 어느 때에 나치주의에 대하여 거리낌없이 비판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초에 휘츠너는 집도 절도 없는 처지가 되었고 여기에 정신 질환까지 겹쳤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나치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어 연금을 다시 받게 되었고 연주금지 조치도 해제되었다. 그리고 잘츠부르크의 양노원과 같은 시설에서 지내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1949년 잘츠부르크 양노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푸르트 뱅글러는 1949년 여름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휘츠너를 추모하여서 비엔나 필과 함께 휘츠너의 교향곡 C 장조를 지휘했다. 오랫동안 무시되었던 휘츠너의 오페라들은 유럽의 극장들에서 하나 둘씩 공연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휘츠너의 음악이 더욱 자주 연주되었고 음반으로도 속속 출반되었다. 1997년 맨하튼의 링컨 센터에서 코벤트 가든이 제작하여 '팔레스트리나'가 공연된 것은 대단한 논란을 불러 일으킨 것이지만 역시 음반으로 나왔다.   


휘츠너의 오페라 수첩

● Der arme Heinrich(가난한 하인리히. 1895. 마인츠) ● Christelflein(크리스마스 요정. 1906. 뮌헨) ● Das Herz(마음. 1931. 베를린) ● Palestrina(팔레스트리나. 1917. 뮌헨) ● Die Rose vom Liebesgarten(사랑정원의 장미. 1901. 엘버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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