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독일-오스트리아

윤이상 (Isang Yun)

정준극 2008. 3. 14. 16:29
 

동양의 도교사상을 반영

Isang Yun(윤이상)


 

윤이상(Isang Yun: 1917-1995)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에서 활동했던 작곡가이지만 1971년 독일 시민이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일에서 살았으므로 편의상 독일 작곡가로 분류한다. 윤이상은 1917년 일제 치하의 통영에서 시인 윤기현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신학문과 서구예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윤이상은 심금을 울리는 저음의 첼로를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일본 유학의 길에 올랐다. 일본에서는 첼로와 작곡을 공부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윤이상은 일제로부터의 한국 독립을 위해 무장운동까지 하려 했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체포당했다. 해방이 되자 윤이상은 통영여고 음악선생으로서 몇 년을 지냈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윤이상은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1955년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이듬해에 본격 음악공부를 위해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윤이상은 파리와 베를린에서 피엘 레벨(Pierre Revel), 보리스 블라허(Boris Blacher), 요셉 로퍼(Josef Rufer),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Reinhard Schwarz-Schilling)으로부터 현대음악 작곡을 공부했다. 그는 다름슈타트음악원 국제여름과정에 참가한 직후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과 ‘일곱개 악기를 위한 음악’을 내놓아 유럽에서 작곡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음악은 극동음악, 특히 한국음악과 서구의 전통적인 고전음악의 융합을 시도한 것으로 유럽에서 새로운 장르의 현대음악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1965년 오라토리오 Om mani padme hum과 이듬해 Reak(예악)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첫 오페라는 1965년의 Der Traums des Liu-Tung(리 퉁의 꿈)이었다. 1971년에는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로 오페라 ‘심청’이 초연되었다. 이 해에 그는 서독 킬문화상을 받았으며 아울러 서독시민권을 획득하였다. 오페라 ‘심청’은 1973년 미국 아스펜음악제에서도 공연되어 관심을 끌었다. 윤이상의 작품에는 중국과 한국의 궁중음악, 그리고 불교와 도교의 신화적인 요소가 담겨있다. 그러나 주된 테마는 도교사상이다. 그는 여러편의 관현악곡, 합창곡 등을 작곡했다. ‘낙양’ ‘예악’ ‘무악’ ‘무궁동’ 등이다. 윤이상은 1990년대에 현대 독일의 5대 작곡가중의 1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1995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3년 그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으며 그로부터 1979년까지 몇차례나 북한을 드나들었다. 겉으로의 이유는 남북 음악가들의 공동음악회를 주선하기 위해서였다. 윤이상의 남북공동음악회에 대한 아이디어가 성사된 것은 한참후인 1990년이었다. 남쪽의 좌파예술가들은 기뻐하였다. 윤이상은 1964년부터 아예 베를린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으며 1967년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그 해에 부인 이수자와 함께 한국 정보부에 의해 서울로 이송되어 정당한 재판결과 간첩혐의가 드러나고 기타 이적행위가 밝혀져 종신형을 받았다. 이에 누가 배후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동이 되어 2백여 음악예술가들이 참여한 탄원서를 한국 정부에 제출했다. 석방 탄원서에는 루이지 달라피콜로(Luigi Dallapicolo),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 하인츠 홀링거(Heinz Hollinger), 마우리치오 카겔(Mauricio Kagel),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기료르기 리게티(Gyorgy Liegti), 아르네 멜나스(Arne Mellnas),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등이 서명하였다. 윤이상은 1969년 석방되어 당시 서베를린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한국 재방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윤이상은 1970년부터 서베를린예술대학 작곡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1971년 한국 국적을 버리고 독일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로부터 북한 방문이 쉬어졌다. 1973년부터 그는 북한의 성원 아래 일본과 미국등지를 방문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남북통일 운동을 추진하였다. 뜻있는 많은 사람들은 윤이상의 정치성향 활동을 크게 우려하였다.1984년 윤이상은 북한의 평양에 노골적으로 윤이상음악원을 개설하였다. 그는 1995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윤이상은 1995년 괴테메달을 받았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는 독일연방정부로부터 대십자훈장을 받은바 있다. 이듬해 베를린에 국제윤이상협회가 설립되었다. 윤이상의 기본적 작품세계는 한국음악을 서구 악기를 이용하여 개발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중심적인 스타일은 다목적인 멜로디 라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윤이상은 이를 Haupttöne라고 불렀다.

 

 '심청' 포스터


 

윤이상의 오페라 수첩

● Der Traum des Liu-Tung(1965 Berlin) ● Die Witwe des Schmetterlings(1967 Bonn: Butterfly Widow) ● Traume(1969 Nuremberg) ● Geisterliebe(1971 Kiel) ● Sim Tjong(1972 Munich)

 

다음은 조선일보 2010년 4월 22일자 A34면에 실린 강규형 명지대명예교수가 기고한 '예술가의 위대한 업적과 정치적 업보'제하의 논단에서 발췌한 것이다. 지난 달에는 통영국제음악제(TIMF)가 열렸다. 통영국제음악제는 통영 출신의 작곡가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설립돼 몇년간 성황리에 진행돼 왔다.... 그를 '숭고한 민족사랑'을 가진 위대한 '애국자'로 칭송하는 예찬 열기는 도가 지나치다. 동베를린 사건 이후 윤이상 부부의 행적은 문제 투성이였다. 북한을 자주 오가며 김일성과 주체사상 찬양 기록은 양적으로 너무 많고 질적으로는 심각하다. 김일성을 '우리 역사상 최대의 영도자인 주석님'이라고 쓴 편지는 압권이다. 다구나 독일 유핵생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마친 오길남씨를 교수를 시켜주겠다면 가족과 함께 입북하도록 권유한 것은 심각한 경우였다. 오 박사는 약속과 달리 북한에 가서 대남 공작원으로 이용됐고, 북한체제의 실상을 알고 나선 탈출했다. 윤이상은 오씨의 북한 복귀를 강요하며 안 돌아갈 경우 '은혜를 베풀어준 주석을 배반'했기에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 '가족은 죽는 줄 아시오'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다 한다. 실제로 오씨 가족은 현재 북한의 강제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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