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러시아

알렉산더 체레프닌(Alexander Tcherepnin)

정준극 2008. 3. 18. 10:05

러시아의 마르코 폴로

알렉산더 체레프닌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알렉산더 체레프닌(Alexander Tcherepnin: 1899-1977)은 러시아에서 아방 갸르드(전위)음악의 개척에 노력하였으며 음악의 세계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모색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는 작곡가, 지휘자 및 생페테르부르그음악원 교수였고 유명한 화가의 딸인 어머니 마리 베노이스는 성악가였다. 체레프닌의 음악적 재능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체레네프닌은 타고난 여행가였다. 러시아의 마르코 폴로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였다. 파리, 런던, 베이징, 상하이, 도쿄, 시카고, 뉴욕에서 살았던 것만 보아도 알수있다. 물론 말년에는 피아니스트인 중국인 부인 리 시엔밍(Li Xienming)과 함께 미국에 정착하여 살았던 미국시민이었다. 그래서 아론 코플랜드는 그를 ‘명예 미국 작곡가’라고 불렀으며 일본의 토루 타케미츠는 ‘일본음악의 상징적 아버지’라는 찬사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체레프닌이 정작 매력을 느낀 곳은 중국이었다. 아마 젊고 아름다우며 재능이 많은 여성 피아니스트 리 시엔밍에게 더 매료했는지 모른다. 아무튼 체레프닌은 이 피아니스트와 결혼하여 살면서 상하이대학 교수로서 몇 년을 지낸 일이 있다.


그가 아방 갸르드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파리에서 부터였다.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초연된 발레작품 Ajanta Frescoes는 당대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가 고전발레가 아닌 전위발레를 처음으로 직접 공연하여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당시 아방 갸르드 발레에 대한 찬반의 논쟁은 음악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자료이다. 찬반의 논쟁은 그의 첫 교향곡에서 더 크게 일어났었다. 1927년 파리에서 초연된 이 교향곡으로 음악계는 거의 폭동 직전이었다. 제2악장이 문제였다. 타악기는 피치가 없는 악보로 되어있었다. 음의 높낮이도 없고 박자도 없었으며 어떤 타악기를 연주하라는 지시도 없었다. 그야 물론 아무것이나 두들기면 타악기가 되는 것이었다. 앞에 있는 비올라를 두들겨도 되고 옆에 있는 트럼본을 아무렇게나 두들겨도 된다는 해석이었다. 당장 야유와 박수와 비난과 찬사가 뒤범벅이 되었다. ‘형용할수 없이 불쾌한 소음’, ‘불협화음의 극치’, 심지어 ‘음악의 볼셰비키즘’이라는 비판이 뒤따랐고 한편에서는 ‘리듬의 성취’ ‘신선한 충격’이라는 평도 나타났다. 체레프닌은 4편의 오페라, 13편의 발레곡, 4편의 교향곡, 수많은 관현악곡과 실내악곡, 그리고 2백 개가 넘는 피아노 소품을 썼다. 그러므로 콘서트를 마련한다면 체레프닌의 작품으로만 프로그램을 편성해도 충분하다는 얘기가 있다.


체레프닌은 4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OI-OI’라는 이상한 제목의 오페라는 1928년 바이마르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Die Hochzeit der Sobeide는 1933년 비엔나 Volksoper에서 초연되었다. Zenit'ba(제니트바)라는 오페라는 1937년 독일 Essen에서 초연되었으며 The Nymph and the Farmer(님프와 농부)는 1952 미국 콜로라도 Aspen야외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님프와 농부’는 중국인 부인 리 시엔밍을 위해 작곡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