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의 겨울 나그네 Hans Hotter (한스 호터)
뮌헨 출신의 한스 호터(1909-2003)는 뮌헨 슈타츠오퍼와 35년 계약을 맺었지만 무려 50년을 계속 충실하게 무대생활을 하여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뮌헨에서 그는 두 개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의 세계초연에 출연했다. 1938년 프리덴스타그(휴가: Friedenstag)와 1942년 카프리치오(Capriccio)였다. 한스 호터는 뮌헨에 본거지를 두었지만 비엔나, 함부르크, 슈투트가르트의 객원 아티스트였고 라 스칼라, 코벤트 가든, 콜론 극장, 파리의 그랜드 오페라, 암스테르담의 콘세르트헤바오, 시카고 리릭 오페라, 그리고 메트로의 초청을 받아 공연하였다. 메트로 데뷔는 ‘방랑하는 화란인’에서 화란인 이었으며 1950-54년 시즌에는 바그너의 주요 역할, 돈 카를로의 종교재판관, 살로메의 요카난(Jochanaan), 엘렉트라의 오레스트(Orest) 등 10여 역할을 맡아 찬사를 받았다. 한스 호터는 1952년부터 1966년까지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바그너의 주요 해석자였다. 특히 링 사이클에서 보탄(Wotan)과 군터(Gunther) 역할은 탁월한 것이었으며 파르지팔의 암포르타스(Amfortas)와 구르네만츠(Gurnemanz),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쿠르베날(Kurwenal),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한스 작스(Hans Sachs)와 포그너(Pogner)는 당대의 제1인자였다. 콘서트 바리톤으로서 그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해석의 권위자였다.
한스 호터는 뮌헨에서 당대의 마토이스 뢰머(Matthaus Roemer)를 사사했으며 오페라에 정식 데뷔하기 전에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와 합창지위자 생활을 했다. 첫 오페라 데뷔는 1930년 트로파우(Troppau)에서였다. 이후 브레슬라우(1931), 프라하(1932-34), 함부르크(1934-45)에서 활동했지만 언제나 고향은 뮌헨이었다. 그는 ‘지그프리트’, ‘발퀴레’와 같은 바그너 오페라의 모든 베이스-바리톤 역할에 뛰어났다. 처음 바그너 역할을 맡은 것은 1937년 뮌헨에서 보탄을 맡은 것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보탄이었다. 메트로 데뷔는 1950년이었다. ‘방랑하는 화란인’에서 화란인을 맡은 것이었다. 한스 호터는 메트로에서 13개의 각가 다른 역할을 맡으며 35회의 공연을 가졌다. 그는 1952년부터 바이로이트와 인연을 맺어 12년을 바이로이트의 인물로서 살게 되었다. 이후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서 그는 세계 최고의 바그너 베이스-바리톤으로 존경을 받았다. 특히 한스 작스와 보탄은 비길데 없이 고귀하고 장엄하다는 평을 받았다.
만드리야케
1960년대와 70년대에 그는 오페라무대감독으로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코벤트 가든에서의 링 사이클은 오페라 연출에 대한 그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것이었으며 1971년 폰 아이넴(von Einem)의 ‘노부인의 방문’(Besuch der altern Dame) 세계초연을 연출한 것은 음악사에 남을 업적이었다. 한스 호터는 1928-30년 뮌헨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첫 오페라 데뷔는 1930년 트로파우(Troppau) 슈타츠오퍼에서였다. 1966년, 그는 자서전을 발간했다. 제목은 ‘Der Mai was mir gewogen’(5월은 나에게 친절했다)로서 빌헬름 뮐러의 ‘겨울 나그네’의 한 구절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베이스-바리톤 한스 호터는 2003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계는 보물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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