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바리톤

세계적 바리톤 문화유산 Hermann Prey (헤르만 프라이)

정준극 2008. 3. 25. 09:55
 

세계적 바리톤 문화유산 Hermann Prey (헤르만 프라이)

 


헤르만 프라이는 독일이 낳은 금세기 최고의 바리톤이다. 헤르만 프라이는 오페라와 리트에 있어서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쌍벽을 이루는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굳이 피셔-디스카우와 프라이의 가곡을 비교하자면 피셔-디스카우는 각각의 가사와 음절에 개인적인 중요성을 두고 해석하는 반면, 프라이는 전체 작품에 중요성을 두고 해석하는데 있다. 어느 방법이 좋고 어느 방법이 부족하다고는 말할수 없다. 두가지 방법이 모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프라이의 음성은 놀라운 따듯함을 지닌 리릭 바리톤이가. 그는 모든 다이나믹한 변화를 콘트롤 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프라이는 노래에 코믹한 요소를 전달할수 있는 센스가 있다. 그러한 재능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단히 편안하고 유쾌하게 해준다. 하지만 그러한 코믹 요소 때문에 전체 노래가 음악적 센스를 잃도록 하지는 않고 있다.


1929년 7월 11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1998년 7월 22일, 69세를 일기로 독일의 바바리아 지방 크라일링(Kariling)에서 세상을 떠난 베이스-바리톤 헤르만 프라이는 히틀러 나치정권 아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5살 때에 나치의 소년병으로 징집될 운명이었으나 마침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하여 음악을 공부할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만일 전쟁이 단 한달만이라도 더 끌었다면 그는 군대에 끌려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지 모르며 그렇게 되면 세계는 귀중한 베이스-바리톤을 영원히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를린음악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한 그는 1952년 프랑크푸르트방송국이 주관한 성악경연대회에 우승함으로서 길고도 먼 음악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의 첫 오페라 데뷔는 1953년 비스바덴에서 있었던 달베르(d'Albert)의 ‘아랫마을’(Tiefland)에서 모누치오(Monuccio)를 맡은 것이었다. 그후 함부르크오페라에 7년동안 있으면서 베를린, 비엔나, 뮌헨 등지에서 자주 오페라에 출연하여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베를린을 떠나 미국으로 간 프라이는 1960년부터 10년동안 메트로에서 수많은 역할을 맡으며 놀라운 인기를 차지하였다. 메트로에서의 데뷔 역할은 바그너의 볼프람(Wolfram)이었다. 독일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다시 메트로를 방문한 것은 1987년으로 그 때에는 ‘낙소소의 아리아드네’에서 음악감독 역할을 맡았다. 1973년 런던에서 피가로(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맡은 것은 대성공이었다. 프라이는 초기에 베르디 역할을 맡았지만 후기에는 주로 모차르트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전념하였다. 특히 그는 독일에서 TV에 고정적으로 출연하였으며 이 프로그램으로 놀랄만한 인기를 끌어 마침내 독일을 대표하는 바리톤이 되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 진출한 것은 1959년으로 R.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부인’에서 베이스 주역을 맡았다. 이 공연은 프릿츠 분더리히(Fritz Wunderlich)가 잘츠부르크에 첫 데뷔하는 것이기도 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프라이는 오페라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리사이틀을 더 존중하고 있다. 프라이는 1956년 미국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진 이래 은퇴할 때까지 거의 정기적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리사이틀을 가졌다. 그는 특히 슈베르트 가곡의 해석자로서 잘 알려졌다. 콘서트에서는 바흐의 수난곡들과 브람스의 ‘독일 진혼곡’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필립스사와 수많은 음반을 취입하였다. 가장 유명한 음반은 독일 리트의 역사를 추적한 것으로 중세 음유시인들의 노래로부터 로이터(Reutter)나 블라허(Blacher)의 현대 가곡에 이르기까지를 망라한 것이다. 프라이는 리트뿐만 아니라 오라토리오, 오페라에 있어서도 수많은 음반을 남겼다. 프라이는 1982년부터 함부르크음악대학에서 그가 일생동안 해석해온 음악을 후진에게 전달하려고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그 바로 1년전에는 자서전인 ‘첫 공연날 밤의 열기’(Premierenfieber)를 펴냈다. 그는 직접 오페라를 제작하기도 했다. 1988년 잘츠부르크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제작한 것은 대표적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슈베르트 페스티발'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 플로리안 프라이(Florian Frey) 역시 바리톤으로서 아버지가 맡았던 유명한 역할을 답습하고 있다. 헤르만 프라이는 아름다운 음성과 함께 가장 세련된 음악인으로서 길이 기억될 것이다. 명불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