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바리톤

넬리 멜바와의 인연 John Brownlee (존 브라운리)

정준극 2008. 3. 25. 09:57
 

넬리 멜바와의 인연 John Brownlee (존 브라운리)

  

 


세계적 바리톤인 존 브라운리는 문화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폭넓은 활동을 했 인물이었다. 그는 어떤 일에나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주었으며 무슨 일을 할때에는 뛰어난 조직력을 보여주었다.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대단히 사교적이고 외교적이었고 특히 대중 연설에 뛰어났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어떤 일에 열정을 쏟아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이같은 경륜은 1953067년 미국음악예술가연맹의 회장직을 맡을때 두드러지게 보여주어 모든 예술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존 브라운리는 무려 10년 이상이나 맨해튼음악학교의 교장을 지냈으며(1956-69) 이 학교의 신축이전을 위해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학교가 이전하기 바로 몇 달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존 브라운리를 기념하여 맨해튼음악학교에 붙어있는 동판에는 다름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딸 델피나와 함께 연주

 

그의 지도력으로 이 학교는 이미 지니고 있는 훌륭한 명성을 국내외적으로 한층  높이게 되었다. 학교의 이전은 그의 꿈이었다. 그는 9백50만불에 이르는 학교 확장 계획을 가능케 한 주역이었다. 맨해튼에 대한 그의 위대한 업적은 성악가로서 뛰어난 경력의 결과이다. 호주에서 태어난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코벤트 가든, 파리 오페라, 글린드본 페스티발의 주도적 아티스트였다. 1953-67년에는 미국음악예술가연맹의 회장으로 봉직하였다.

 

돈 조반니

 

1969년 브라운리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0년이 넘게 암과 힘든 투쟁을 했었다. 암으로 진단 받은후 11년 동안이나 생존하였던 것은 온전히 그의 부인의 헌신 때문이었다. 부인 클라라는 남편 브라운리가 세상을 떠난지 11년후인 1980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딸인 브라운리-바슈코브(Brownlee-Bashkow)는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하였고 이제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의 온갖 지식과 재능을 후진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교사로서 활동하고 있다. 존 브라운리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던 바리톤이었으며 모든 젊은 성악도들의 표상이었다. 그는 ‘오페라의 황금시기’였던 19세기말의 아티스트들과 20세기 말의 또 다른 황금시기를 이룩한 아티스트들을 연결해준 교량이었다. 그는 핸섬하고 귀족적인 풍모를 지닌 남자였다. 그는 부드럽고 따뜻한 성격에다가 유머 감각이 뛰어나 누구에게나 친밀감을 주었다. 그는 다정하고 성실한 남편이었으며 아버지였다. 그는 전생에를 통하여 선배들을 존경하였고 동료들을 사랑하였으며 후배들에게 헌신하였다. 

 

 

 


존 브라운리는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호주의 작은 도시 지롱(Geelong)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코르넷 연주자였으며 음성이 좋아 노래를 잘 불렀다. 아버지는 아들 브라운리가 여섯 살때부터 코르넷을 가르쳤다. 그래서 브라운리는 한떼 지롱(Geelong)시립브라스밴드의 멤버로 활동한 일이 있다. 그후 그는 회계사가 되려고 했으나 타고난 바리톤 음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성악가로서의 길을 택하였다. 그는 멜본의 유명한 성악교사인 이보르 부스테드(Ivor Boustead)에게서 레슨을 받았으며 부스테드의 권고로 멜본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자주 출연하였다. 이어 부스테드는 브라운리를 멜바에게 소개하여 오디션을 받게 하였다. 멜바는 브라운리가 나중에 세계의 명성을 얻게 될것이라고 예견하였다. 멜바는 브라운리에게 호주에 있지 말고 영국으로 가라고 적극 권유하였으며 그의 유학을 돕기 위해 모금연주회를 마련해 주기까지 했다. 넬리 멜바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브라운리가 22세 때였다. 과연 멜바의 예견대로 브라운리는 세계적 바리톤이 되었으며 코벤트 가든에서 멜바와 함께 '라 보엠'에 출연한 일도 있다.

 

클라라와의 결혼

 

1923년, 브라운리는 23세 때에 영국행 배를 탔다. 멜바가 브라운리의 레슨선생까지 미리 주선해 주었다. 알제리 출신의 바리톤 딘 질리(Dinh Gilly)였다. 딘 질리는 코벤트 가든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바리톤이었다. 어쨌든 그후 브라운리는 질리 선생의 권유로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바리톤인 안토니오 코토니(Antonio Cotogni)에게 배울 기회를 가졌다. 코토니는 질리를 가르친 선생이기도 했지만 전설적인 장 드 레즈케(Jean de Reszke)와 베야미노 질리를 배출한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때 쯤하여 질리는 오페라 출연보다는 런던과 파리를 왕복하면서 성악 교사로서 더 활동하였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브라운리도 기왕에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브라운리는 어떤 러시아 이민자가 운영하는 펜션에서 지냈다. 그 때 이 펜션에는 이탈리아 귀족가문의 젊고 아름다운 규수로서 소르본느에서 프랑스문학을 공부한 클라라 오도네 디 펠레토(Clara Oddone Di Feletto)도 묵고 있었다. 나중에 미세스 브라운리가 된 여인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1928년 프랑스의 생 피에르 드 샤이요(St Pierre de Chaillot)에서 성황리에 거행되었다.